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15:50:03

오은지(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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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吳隱之
(? ~ 413)

동진의 인물. 자는 처묵(處默). 연주 복양군(濮陽郡) 견성현(鄄城縣) 출신. 삼국시대 위나라 시중 오질의 6세손. 얼굴과 자태가 아름다웠고 청담을 좋아했으며, 문학과 역사도 두루 섭렵해 시를 잘 짓기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2. 생애

아버지가 사망하자 10여 세에 불과했던 오은지는 매번 구슬피 울었는데, 그 애절함 때문에 행인들마저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홀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셨지만, 얼마 안가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 상을 다시 치르게 되니, 오은지는 몸을 상할 정도로 과하게 애도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장례식에서 북을 울려줄 사람도 고용하지 못한 오은지는 매번 자신의 곡소리를 크게 내어 이를 대체하고자 하였다. 그가 곡소리를 낼 때면 항상 두 마리의 학이 날아와 같이 울어주었고, 저녁에는 그의 집으로 기러기떼가 몰려들었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다.

당시 태상 한백은 오은지의 이웃이었는데, 한백의 어머니 은씨(殷氏)는 오은지의 곡소리가 들릴 때마다 식사를 멈추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한백에게 이르길
"만약 네가 인재를 선발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면 마땅히 저런 인물을 천거해야 한다."
라 하였다. 한백은 모친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시간이 흘러 이부상서에 임명에 되자마자 오은지를 등용해 보국공조(輔國功曹)에 임명했다가 참정로군사(參征虜軍事)로 옮겼다. 그 무렵에 원진(袁真)의 세력이 대사마 환온에게 제거당하면서 원진 휘하에서 공조를 지내던 형 오탄지(吳坦之)도 여기에 연루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에 오은지가 형을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 청하자, 환온은 흔쾌히 오탄지를 용서하고 석방시켜 주었다. 이후 오은지는 환온을 섬기며 봉조청, 상서랑, 진릉태수, 국자박사, 태자우위솔, 산기상시, 저작랑, 수정위(守廷尉), 좌위장군 등 중앙의 여러 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오은지는 요직을 역임하면서도 청렴함을 유지하여 자신이 받은 녹봉은 친족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바람에 겨울에 걸칠 옷조차 없었다고 한다.

광주(廣州)는 산과 바다로 둘러져 있어 진귀한 보물들을 많이 생산했는데, 북방 출신의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풍토병과 창궐했고 그 곳의 원주민들 또한 진나라의 통치를 받는 것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자사로 부임하고 싶어하는 관리들이 적게나마 있었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그냥 광주에서 나오는 보물이 탐나서 자원하는 것뿐이었기에, 막상 부임하면 백성들을 수탈하기 바빴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뿌리뽑기 위해 융안 연간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오은지를 용양장군, 가절, 광주자사, 영평월중랑장(領平越中郎將)으로 삼았다.

오은지는 부임하러 가는 길에 광주에서 20리 떨어진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이르러, 일부로 "탐천(貪泉)"이라 불리는 샘을 찾아갔다. 당시 그 지역 백성들 사이에선 탐천의 물을 마시면 없는 탐욕도 생겨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그와 동행하던 가족들이 의아해하자 오은지가 말했다.
"영남(嶺南)을 지나면 청렴을 잃는다는 소리가 거짓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이로써 마음에 어지러움을 없애겠다."
그러고는 탐천의 물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시를 하나 지은 뒤에 다시 길을 떠나 광주에 도착했다.

오은지는 광주에 부임한 이래로 청렴한 생활을 고집하여 항상 끼니를 야채와 건어물 따위로 해결하고, 전임 자사가 쓰던 화려한 휘장과 의복, 집기 등을 모두 거두어 창고에 넣어 두었다. 한번은 부하가 오은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생선의 뼈를 손수 발라냈지만, 오은지는 되려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그 부하를 쫓아내 버리기도 하였다. 이로써 지역이 크게 교화되고 치적이 돋보이게 되자,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오은지를 전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금전 50만 전과 곡식 1,000석을 하사했다.

원흥 3년(404년) 7월, 노순이 거병하여 광주 남해군(南海郡)을 침구하고, 광주자사 치소가 위치한 번우(番禺)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은지는 장병들을 거느리고 굳게 지켰고, 도중에 오은지의 장남 오광지(吳曠之)가 전사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반란군에게 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성벽에 의지해 약 100여 일 동안 노순의 공세를 막아내던 중, 노순이 야습을 가해 성벽을 넘고 번우성을 함락시켜 버렸다. 성 안으로 진입한 노순군이 여기저기 방화를 저지르면서 민가 3,000여 채가 전소되었고, 죽은 자는 10,000여 명이나 되었다. 오은지는 성을 빠져나와 가족들과 함께 수도 건강(建康)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노순에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광주를 장악한 노순은 평남장군을 자칭하고 광주의 업무를 보았으며, 자신의 군대가 저지른 화재로 사망한 이들의 시신을 모아 공동묘지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동진 조정에 공물을 바치니, 당시 막 환현을 토벌하고 정신이 없었던 조정은 일의 경위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노순을 광주자사로 인정해주었다.

의희 원년(405년) 5월, 환현을 몰아내고 조정을 바로세운 유유가 노순에게 사람을 보내 오은지를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때 평남장사 왕탄도 가세하여 노순을 설득한 덕에 오은지는 마침내 풀려나 다시 건강으로 복귀했다. 이후 탁지상서, 태상을 역임하다가 중령군으로 옮겨졌다.

의희 8년(412년), 오은지는 은퇴하여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금장자수(金章紫綬)와 금전 10만 전, 곡식 300석을 하사받았다.

의희 9년(413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 좌광록대부로 추증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