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탱리고도선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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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흉노 선우 오사려선우 烏師廬單于 | ||
칭호 | 오사려선우(烏師廬單于) / 아선우(兒單于) | |
성 | 난제(攣鞮) | |
휘 | 오사려(烏師廬) | |
아버지 | 오유선우(烏維單于) 난제오유(攣鞮烏維) | |
숙부 | 구려호선우(句黎湖單于) 난제구려호(攣鞮句黎湖)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102년 |
재위 기간 | 기원전 105년 ~ 기원전 102년 |
흉노의 제7대 선우. 오유의 아들로 어려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선우(兒單于)로 불렸다.
기원전 105년에 서북쪽으로 이동해서 좌측은 운중군, 우측은 주천군, 돈황군과 싸우게 하였으며, 전한에서 흉노를 이간시키기 위해 두 명의 사신을 각각 오사려 선우와 우현왕에게 위문보냈다.
기원전 104년에 한나라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 명의 사신을 자신이 끌고 오면서 한나라의 의도를 알게 되자 한나라의 사신 두 명을 붙잡았으며, 어려서부터 잔인해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흉노의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104년 겨울, 초원에 큰 눈이 내려 가축 대부분이 얼어 죽는 재해가 발생했다.[1] 막남보다 훨씬 척박한 막북 지방으로 이주한 흉노의 입장에서 굉장히 큰 타격이었고, 이는 내부의 반발과 함께 작용했다.
이 때문에 좌대도위가 한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기원전 103년 봄에 이를 알아채고 좌대도위를 죽였으며, 좌측의 군사가 착야후 조파노를 생포하고 한나라의 곽종, 유왕 등이 항복하자 기습 부대를 보내어 수항성을 공격하게 하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기원전 102년에 직접 다시 수항성을 공격하려고 시도하다가 성에 도착하기 전에 병사하였다.
[1] 이를 백재(白災)라고 한다. 겨울 혹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주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