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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몰년도 | ? ~ 기원전 106년 |
| 이름 | 위청(衛靑) |
| 자 | 중경(仲卿) |
| 시호 | 열후(烈侯) |
| 출생지 | 하동군 평양현(平陽: 現 산서성 임분(린펀)시) |
1. 개요
중국 전한 한무제 때의 명장. 한나라가 벌인 대(對) 흉노 전쟁의 가장 커다란 핵심이었고, 적지 않은 시간에 걸쳐 대단한 공적을 세웠다. 한무제가 벌인 대반격의 선봉에 섰던 인물.
그러나 곽거병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자 하늘의 편애를 받은 인물 때문에, 살아 생전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는 불운한 인물. 사실 곽거병이야 출생과정은 좀 복잡할 망정 분명 좋은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인 터라, 자기계발을 해야 할 시기에 변변한 교육도 못 받고 남의 집 종이나 다름 없던 하찮은 삶을 살다 당시 기준으로 중년에 가까운 나이에 접어들어 낙하산으로 발탁돼 엄청난 전공을 세운 위청이 보는 관점에 따라선 더 '타고난' 천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곽거병이 워낙 어린 나이에 넘사벽에 가까운 군공을 세운 터라 무시되기 일쑤다. 게다가 위청 본인부터가 비천한 출신 성분에 따른 콤플렉스 때문인지 큰 공을 세우고도 항상 몸을 사리고 스스로를 낮추는 방향으로 처신을 해서... 결론적으로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2인자, 콩라인의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2. 집안 내력
2.1. 불쌍한 소년 위청
어린 시절의 위청은 비천한 삶을 살았다. 형편이 넉넉치 않았고 출생마저도 천했다. 위청의 모친이었던 위온(衛媼)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에 불과했다. 그 하녀가 정계(鄭季)라는 하급관리와 사통해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위청이었다.[1]아버지 정계는 평양후(平陽侯)[2]의 관리이면서, 평양후의 시녀였던 위온과 사사로히 정을 통해 자신을 낳은지라 신분이 비천했다. 이후 아버지 정계를 따라가 양 치는 일을 도왔는데 새어머니와 그 이복형제들은 위청을 형제 취급도 해주지 않고 종처럼 부려먹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위청은 우연히 다른 사람을 따라 감천궁(甘泉宮)의 감옥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구경하는데, 목에 칼을 쓴 죄수 한 명이 위청을 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는 귀인이다! 후에 크게 될 것이다."
위청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남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매질과 욕설을 안 당하면 다행인데, 어찌 벼슬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2.2. 청년 시절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위청은 집을 나가 다시 평양후의 집에서 평양공주를 섬겼다. 평양공주의 기사(騎士) 노릇을 했는데, 공주가 외출할 때 말을 끌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가던 중,위청의 인생이 바뀔 일이 벌어졌다. 한무제는 황후 진아교(陳阿嬌)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아교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질투심이 심했으며 의부증도 있어 한무제는 아교에게 완전히 정을 떼었다.이를 지켜보던 한무제의 누나 평양공주는 이 상황을 난감히 여겼는데, 황태후 효경황후 왕씨는 자식이 4명이었으나 아들은 한무제뿐이었고, 그 무제조차도 자식이 없어 황통이 끊길까 걱정했다. 이에 여자들을 여럿 소개해 주었으나 한무제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무제의 눈에 들어온 것이 평양공주의 집에서 노래하는 가희 위자부였다.[3] 한무제는 위자부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누이가 존귀해지며 위청도 정씨 성에서 위씨 성을 썼고, 건장궁(建章宮)에서 일하게 되었.[4]
이후 위자부가 한무제의 아이를 임신하자 본래 무제의 정실인 아교의 질투심이 폭발해 위청을 잡아 죽이려 사람을 풀었다.[5] 위청은 죽을 위기에 놓였으나 친구였던 기랑(騎郞)[6] 공손오(公孫敖)가 소식을 듣고 급히 장사들을 이끌고 도와주어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이 소식은 한무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무제는 위청을 건장궁의 궁감(宮監) 겸 시중(侍中)[7]으로 삼았다. 그리고 위씨 집안을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위청의 누이이자 위자부의 첫째 언니인 위유(衛孺)는 태복 공손하(公孫賀)에 시집을 보냈고, 둘째 언니인 위소아(衛少兒)가 진장(陳掌)이라는 남자와 살고 있자 진장을 불러들여 귀하게 대접했다.[8]
그리고 위청은 이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다.
3. 전공
3.1. 낙하산 장군
한나라는 고조 유방이 흉노 묵돌선우에게 패배한 후로 군사적으로는 쭉 흉노에 눌린 상태였고, 흉노가 여후를 희롱했던 것은 당시 한과 흉노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흉노가 침략한 경우 나아가지 않고 수비에만 그쳤다. 이처럼 전쟁을 피하는 동시에 한문제, 한경제의 치세를 거치며 한의 국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대해져 무제 시기에 이르러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처음 작전은 흉노의 군세를 유인해 복병으로 섬멸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신선우에게 간파당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30만 대군으로 정벌을 감행해 얻어낸 것은 전무했기에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여론이 거세져 작전을 입안한 왕회(王恢)는 절망하고 자살해 버렸다. 한나라가 다시 한번 원정군을 준비한 것은 4년 뒤[9]의 일이다.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 등의 장수들이 출진하여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다른 방향으로 출진하였다. 위청이 출발한 곳은 상곡(上谷)으로, 현재 베이징의 북서쪽쯤 되는 위치다.
위청은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어 출진했는데, 이전까지 위청은 군대와 아무런 연이 없었으며 무제가 위자부의 동생이 공을 세우길 원했기에 밀어넣은 것에 가까웠다. 패망해야 당연하나 결과는 의외의 상황으로 흘러갔다. 위청만이 흉노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했으며 공손오는 사망자 7천 명을 내는 참혹한 대패를 당했다. 심지어 이광은 군사들이 전멸해 본인도 포로로 잡혔다 겨우 도망쳤다. 위청은 흉노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용성(龍城)에 들어가 흉노 총 700명을 사로잡거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한나라의 군대가 흉노에게 승리를 거둔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위청은 이 공으로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
기원전 129년, 누이인 위자부는 한무제의 자식을 낳았는데, 이때 위청은 3만 명의 병사로 출격하여 흉노군 수천 명을 물리치고 포로로 잡는 공을 세워 경사가 겹쳤다.
3.2. 한나라 군대의 기둥
기원전 127년, 이번에는 흉노에서 먼저 공격을 감행했다. 요서태수가 살해되었고 어양군의 2천여 명을 잡아갔다. 이에 반격하여 장군 이식(李息)이 대군(代郡)에서 출발, 위청은 운중(雲中)에서 출발을 해서 고궐(高闕)[10]까지 나아갔다. 하남 땅을 빼앗고 농서(隴西)[11]까지 도달하여 끝을 내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가축 수십만 마리를 잡고, 흉노의 백양왕과 누번왕을 달아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삭방군(朔方郡)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위청은 이 공으로 3800호를 얻고 장평후(長平侯)가 되었다.
기원전 124년, 위청은 다시 3만 기를 이끌고 고궐에서 출진, 흉노의 우현왕과 교전했다. 우현왕이 술을 마시고 있자 밤에 군사를 일으켜 완전히 포위해 우현왕은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간신히 달아났다. 위청이 이끄는 한군은 우현왕의 비장 10여 명과 남녀 1만 5천여 명, 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어 돌아갔다. 돌아오는 길 중에 위청은 자신이 대장군에 임명되었음을 알았다. 또한 6700호를 추가로 받았고 위청의 아들인 위항(衛抗) 등도 후작에 봉해졌는데, 위청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신은 황공하옵게도 군중에서 대죄하게 되었으나[12] 폐하의 신령하심에 힘입어 군대가 크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여러 교위들이 힘써 싸운 공입니다. 황공하옵게도 폐하께서는 이미 신 위청에게 봉읍을 더해주셨습니다. 신 위청의 아들들은 포대기에 싸인 아이들로 아직 수고로이 일을 한 바가 없는데도, 지금 임금께서는 땅을 갈라 세 놈 모두를 열후에 봉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군중에서 대죄하며 군사들에게 힘써 싸울 것을 권한 까닭이 아닙니다. 항 등의 세 놈이 어찌 감히 책봉을 받으오리까!"
예컨대 "열심히 싸운 것은 부하들인데, 한 것이 없는 아들들이 후작 위에 오르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무제는 부하들도 챙겨줄 것이라 답했다.한편, 위청의 옛 주인 평양공주가 남편과 헤어지고 난 뒤 공주가 재혼을 하려 마음을 먹었다.[13] 주위에서 위청을 추천하였는데, 공주는 "우리 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 사람과 결혼하나요?" 하고 반문했다. 이에 사람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지금 가장 권세가 강한 사람이 대장군입니다."
이에 위청과 평양공주는 결혼했다.
3.3.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다음 해에도 위청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양(定襄)에서 출발해 1만 명 가까이 흉노 병사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위청의 부하인 소건(蘇建)과 조신(趙信)이 수천 명으로 진군하다 수만 대군을 이끄는 흉노 선우와 맞닥뜨렸다. 한군은 하루가 넘도록 분투하지만 숫자 열세를 이기지 못해 전멸 직전까지 갔다. 조신은 흉노 선우의 설득으로 항복하고[14] 소건은 전멸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위청은 부하들에게 일의 처리를 물었다. 의랑(議郞) 주패(周覇)는 소건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대장군께서는 출정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비장의 목을 베신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소건이 군대를 버렸으니 목을 베시어 장군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참모들은 반대했다."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이르길, 작은 부대는 굳세게 대적한다 해도 큰 부대에게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小敵之堅 大敵之擒)고 했습니다.[15] 지금 소건은 수천으로 선우의 수만과 마주쳤습니다. 하루가 넘도록 힘껏 싸우는 동안 군사들은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소건이 스스로 돌아왔는데도 그의 목을 베신다면, 이는 장수들에게 앞으로는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보이는 일입니다. 소건의 목을 베시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민하던 위청은 일을 한무제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나 위청은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친척이 되는 까닭에 군중에서 대죄할 수 있었고, 고로 난 지금껏 내 위엄이 없을까 근심한 적이 없었소. 주패는 나에게 위엄을 드러낼 것을 권했으나 이는 신하된 자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오. 게다가 신하의 직분상 장수를 베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도 내 비록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 하나 감히 국경 밖에서 멋대로 장수를 죽일 수는 없소. 이 일을 천자께 소상히 고해 천자께서 친히 판단케 하여 신하된 자가 감히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좋지 않겠소?"
소건은 무제의 분노를 사 사형당해야 했으나 속전을 내고 풀려나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역사책을 만들기 위해 취재하던 사마천을 만나 겪었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 날 영승(寧乘)이 위청에게 "현재 왕부인이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 집안이 가난하니 도와주면 여러 가지로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했다. 위청은 말을 듣고 왕부인에게 금 오백을 바쳤고, 한무제는 위청에게 조언한 영승을 동해도위(東海都尉)에 임명했다.
3.4. 막북 대전투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 ─ 전자는 산서의 북방에 이는 후흐호트 지역을 출발하였고, 후자는 북경 북서쪽에 있는 현재 선화 근처의 상곡을 출발하였다 ─ 은 고비를 가로질러서 현재 외몽골에 있는 흉노의 본거지에 도착하였는데, 헤르만은 위청이 옹긴 강의 하류까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략)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중략)
곽거병은 대담하게 외몽골 툴라 강과 오르콘 강 상류까지 1천 킬로미터를 쳐들어갔다. 그는 80명 이상의 흉노 수령을 잡았고, 그들의 땅에 있는 산에서 신성한 희생의식을 거행했다. 곽거병은 귀환 직후인 기원전 117년에 죽었다. 섬서의 함양에 있는 이 위대한 장군의 무덤에는 흉노를 짓밞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을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中
기원전 119년, 한무제는 장수들과 의논해 흉노 쪽에서는 한군이 보급 등 여러 문제로 사막을 건너 오래 싸우지 못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역으로 대군을 일으켜 공격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해 봄, 한나라는 위청과 곽거병에게 각각 기병 5만을 주고 보병과 치중병 수십만 명으로 기병을 지원했으며 이광, 공손하 등 흉노 전쟁에서 전공을 올린 무장들을 참전시켰다. 본래 곽거병은 정양(定襄)[16]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흉노의 포로를 심문한 결과 선우는 동쪽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대군(代郡)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위청은 정양에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선우를 상대하는 역할은 곽거병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흉노에서 이 소식을 듣고 한군이 사막을 건넌 후 피로해져 공격에 용이할 것으로 판단해 물자와 정예병을 북쪽에 두어 지친 한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흉노 선우의 군대는 기다리던 곽거병의 군대가 아니라 위청의 군대와 마주쳐 버렸다.[17] 곧바로 전투가 벌어져 위청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선우의 군대를 둘러싸 격파했다. 사로잡히기 직전이었으나 선우는 수백명의 기마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돌파하여 도주했다.선우의 탈출을 알아챈 위청이 200여 리를 추격하였으나 사로잡지 못했다.
그 사이 곽거병은 1천여 리를 주파해 고비 사막을 그대로 넘어 흉노의 영역을 가로질러 진군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따르면, 곽거병의 진격은 북경 북서쪽 선화 부근에서 오르콘 강 상류 바이칼 호 부근까지 이른다고 한다.[18]
전투가 끝나고 곽거병은 5800호를 증봉받았으며 그의 부하들도 많은 상을 받았다. 그러나 위청과 그의 부하들은 흉노 선우를 패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선우를 사로잡지 못한 점 때문에 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대사마의 직위를 새로 두어 표기장군과 대장군을 모두 대사마로 불렀으며 곽거병과 위청의 녹봉이 같아졌다. 곽거병의 위세가 올라가자 위청의 주위 사람들 대다수가 곽거병에게로 가버렸다. 위청의 주변에 남아있던 사람은 임안(任安)단 한 명뿐이었다.[19]
3.5. 이광의 죽음
막북 전투에서 선우의 위치를 알아낸 위청은 이광에게 길을 돌아 진군하게 하고 본인은 바로 진군했다. 이광은 위치를 옮겨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위청은 무제의 명령이 있어 들어주지 않았다. 이광은 대노해 위청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이광이 길을 잃어 늦게 돌아와 참전하지 못해 위청은 밥과 술을 주며 길을 잃은 연유를 물었으나 이광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청은 장사(長史)를 불러 이광을 질책했는데, 이에 이광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자살했다.이광이 죽자 한나라 국민 모두가 슬퍼하며 이광을 죽게 한 위청을 비난했다.[20] 이후 대노한 이광의 아들 이감[21]이 위청을 만나 흠씬 패 주었는데, 위청은 이 일을 숨겼으나 삼촌이 두들겨 맞았다는 것을 안 곽거병은 격분해 사냥터에서 활을 쏘아 이감을 죽였다.
3.6. 말년
10년 가까이 흉노와 전면전을 벌이며 군마와 병사가 대량 소모되어 한나라의 전쟁도 한동안 흉노와 싸우기보다는 남월이나 고조선을 상대한 싸움에 집중된 탓에 위청이 전공을 세울 흉노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으며 위청은 다시 전쟁에 참여하는 일이 없었다.위청의 첫째 아들 위항, 둘째 위불의, 셋째 위등이 법에 저촉되어 후작 지위를 몰수당했다. 위청은 기원전 106년에 죽었다. 위청이 죽고 난 뒤 위씨 일가는 무고의 화에 연루되어 떼죽음을 당했다.
4. 평가
처음으로 흉노에 일격을 먹였으며 가장 오랫동안 대 흉노전선에서 별다른 패배도 없이 한나라를 수호하던 장군.위청이나 곽거병이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던 것은 본인의 능력도 출중했으나 무제가 밀어준 것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22] 이미 한나라의 국력은 강대해졌고 흉노는 쇠퇴하였는데 다른 장수들은 모두 패배하고 위청과 곽거병만 공을 세운 것은 무제가 위황후의 동생, 조카를 열후로 만들기 위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최고의 장비와 정예병을 주었으니 군사적 천재라는 말은 과장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양이나 치던 위청을 거기장군에 임명해 파병했고, 곽거병은 항상 따로 정예병을 선발했는데 그 병졸과 장비, 군마가 다른 장수들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훗날 무제의 심기를 건드려 지원을 받지 못해 고군분투하다가 패배하고 투항한 이릉만 보더라도 황제의 지원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위청은 운도 좋았는데, 어떠한 병법 공부나 실전 경험 없이 첫 출전에 정처없이 행군하다 들이닥친 곳이 하필이면 흉노의 수비가 가장 허술하고 중요한 제사를 주관하던 용성이다. 같이 출전한 이광은 운이 없어 선우의 병력과 맞닥뜨려 부대가 전멸하고 이광 본인은 흉노에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러나 아무나 밀어준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무제는 훗날 이광리를 위청과 곽거병처럼 밀어주었지만 그 결과는 둘에 비할 바가 못 된다.
5. 성격
곽거병은 태생부터 고귀한 신분에 황제마저 그의 편이라 오만하여 행동을 멋대로 했다.행동에는 기백이 있었으나 속내를 숨기는 바가 없었다.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일반 병사들의 심정이나 상황을 몰라 황제가 수십 승의 수레에 음식을 채워서 보냈으나 음식이 먹고 남는 탓에 병졸들이 굶주렸음에도 주지 않고 전부 버렸다.그에 비해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겪은 위청은 아랫사람들을 돌볼 줄 알았으며 성품이 어질었다. 사마천은 "대장군은 사람됨이 어질고 선하고 겸손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온화하고 부드러움으로 천자에게 아첨하여 천하 사람들 중에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도 했다.사람됨이 좋았으나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성품이었다는 것이다.무릇 황제의 측근이라면 듣기 좋은 말만 해서는 안되며 무리해서라도 충언을 할 필요가 있음에도 위청은 그러지 않았다. 소건이 사마천에게 자신이 위청과 나눈 대화를 말해주었는데, 소건은 "천하의 어진 사대부들 중에 대장군을 칭찬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오죽하면 드라마에서 이렇게 묘사되었을까?
하지만 위청 본인이 이에 답한 말이 있는데, 소건이 위청에게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는 일을 하라 권하자, 위청은 그런 일은 "남의 주인되는 자들이나 하는 권한이다." 라며 사양했다.
"나는 단지 국법을 받들어 직무에만 따르면 그만입니다. 내가 어찌 사대부들을 불러 모으겠습니까."
사대부로 뛰어나지 못해도 장군으로서는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사생아 노비 출신에 제대로 된 교육도 군사 훈련도 받지 못했으나 무제의 총애를 이유로 출세한 사람이다. 장군이 된 후에는 전공을 쌓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으나 출신이 한미하고 기반이 단단하지 못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의 총애였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라도 황제에게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고, 노비 출신인 자신을 매형으로 삼고 한 제국의 장군 자리에 앉힌 황제에게 쓴 소리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한무제가 위청을 등용해 장수로써 성공했으며 아첨으로 총애를 유지해 정계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6. 가족
부친 정계는 하급관리였다.모친 위온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다. 위온은 위씨 성의 남자에게서 위장군, 위군유, 위소아, 위자부를, 정계에게서 위청, 위보, 위광을 낳았다.
이부형 위장군은 시중을 지냈다.
큰이부누나 위군유는 승상 공손하와 결혼했다.
이부누나 위소아는 곽거병의 생모이다.
작은이부누나 위자부는 한무제와 결혼하여 무사황후 위씨가 되었다. 한선제의 증조할머니이기도 하다.
아내는 한무제의 누나 평양공주이다.
장남 위항은 장평후에 봉해졌다. 무고의 화 때 처형당했다.
차남 위불의는 음안후에 봉해졌다.
아들 위등은 발간후에 봉해졌다.
위등의 증손자 위상은 관내후에 봉해졌다.
7. 기타
산시성(섬서성)에 무덤이 있고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는 곽거병의 무덤이 있다. 또 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는 김일제의 무덤이 있다. 서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한무제의 황릉이 있는데, 위청, 곽거병, 김일제가 신하로서 황릉의 동쪽 1km 떨어진 곳의 배장묘에 각각 묻혔기에 셋의 무덤이 모여 있는 것이다.#8. 대중매체에서
2012년 드라마 선녀호지묵선에 조연으로 등장한다.2014년 드라마 위자부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미천한 신분이지만 무예가 뛰어나고 지략을 겸비한 영웅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이부누나가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궁중암투와 위기 속에서, 언제나 그녀 곁을 지키며 묵묵히 돕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다.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높은 자리에 오른 뒤에도 교만하지 않고 신중하게 처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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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국 · 위수국 · 언기국 · 아탐자리국 · 비륙국 · 비륙후국 · 욱립사국 · 선환국 · 포류국 · 포류후국 · 서저미국 · 동저미국 · 겁국 · 호호국 · 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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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염 · 조비연 · 소의 부씨 · 정도정희 · 효애황후 · 효원소의 · 중산위희 · 효평황후98권 「원후전(元后傳)」 99권 「왕망전(王莽傳)」 왕정군 왕망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1] 본래 이름은 위청이 아니라 정청(鄭靑)이다.[2] 조참의 증손.[3] 위자부는 위온의 딸로 위청의 누이이다.[4] 한서의 위청곽거병열전이나,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 모두 위청이 어느 시점부터 궁궐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언급이 없다. 과정을 봤을 때 이때부터 궁전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5] 무제의 아이를 품은 위자부를 죽일 수 없으니 위청을 죽이려 한 것이다.[6] 황제를 시중하는 무관[7] 황제를 좌우에서 모시고 수레와 복식을 관리한다.[8] 이 위소아의 아들이 곽거병이다.[9]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광 6년(기원전 129),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원광 5년(기원전 130)이다.[10] 내몽골 지역.[11] 감숙성 난주시.[12] 대죄란 신하가 죄를 짓고서 결과를 기다린다는 뜻인데, 관직을 얻는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겸손의 표현.[13] 당시는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다.[14] 조신은 본래 흉노 사람이다가 한에 항복한 인물이었다.[15] 손자병법의 말이다.[16] 산시성(山西省) 신저우(忻州)에 있는 현.[17] 이장군열전에 따르면 위청의 포로가 선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18] 곽거병의 군대가 산에 올라 한해(翰海)를 바라보았다고 하는데, 김영수 역 사기 열전을 참조하면 한해는 고비 사막 혹은 바이칼 호를 의미한다고 한다.[19] 임안은 훗날 역사서 <사기>를 쓴 사마천의 친구로 궁형을 당한 직후 사마천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기 위해 쓴 편지 <보임안서>의 그 임안이다.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사람으로 청년시절 매우 가난하였으나,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어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은 익주자사(益州刺使)에 이르렀다. 그런데 기원전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 임안은 처형되기 전에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 역시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 때에 하지 못했다. 결국 그 해 겨울, 임안은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졌다.[20] 위청은 무제의 명을 따랐을 뿐 직접적인 죄는 없었으나 비난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21] 이광이 죽을 당시 이감은 곽거병 휘하에 있었다.[22] 진순신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