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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릉(李陵) |
| 자 | 소경(少卿) |
| 출생지 | 농서군(隴西郡) 또는 천수군(天水郡) 성기현(成紀縣)[1] |
1. 개요
중국 전한(前漢) 무제(武帝) 시기의 무장. 군을 이끌고 적과 맞붙은 싸움은 평생 단 한 번뿐이었고 그마저 패전으로 끝났기 때문에, 무장으로서의 역량을 가늠할 근거는 많지 않다.하지만 그 단 한 번의 싸움에서 보여 준 처절함과 그 뒤로 이어진 삶의 비감에 견줄 만한 인물은 드물다. 이릉의 생애는 후대 중국에서 수많은 시와 비극의 소재가 되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이름을 떨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인생이 더럽게 꼬이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표본이 되어 버렸다.
행운의 아이콘인 곽거병과는 정반대의 무장이다. 게다가 불운은 이릉 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고 집안 대대로 이어졌다. 조상인 이신은 초나라 정벌에서 대패했고, 할아버지 이광(李廣)은 평생 흉노와 싸우고도 제후에 봉해지지 못한 채 자결했으며, 작은아버지 이감(李敢)은 곽거병의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릉 대에 이르러서는 일가가 몰살당하고 가문의 명성마저 땅에 떨어졌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이광의 후손을 자처하는 이씨 일족이 후대까지 이어져, 무천진 관롱집단 출신인 당나라 황실이 이들을 조상으로 내세웠다는 점일까.[2]
2. 집안 내력
이릉은 이름난 무장 집안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인 이신은 진(秦)나라의 시황제가 통일 전쟁을 벌일 무렵의 장수로, 초나라 정벌 등을 맡았던 지휘관이다.[3] 다만 가장 큰 무대였던 초나라 정벌에서 대패했기에, 이후 가문도 부침을 겪었으리라 짐작된다.할아버지 이광은 문제 때부터 무제 때까지 전장을 누빈 역전의 명장으로, 인품과 용맹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청렴하고 강직했던 것과 달리 삶은 순탄치 않았다. 흉노와 70여 차례나 싸우고도 끝내 제후에 봉해지지 못했고, 기원전 119년 위청을 따라 막북 원정에 나섰다가 길을 잃어 기한 안에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자, 문책을 받느니 죽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광의 셋째 아들이자 이릉의 작은아버지인 이감은 아버지의 죽음을 위청의 탓으로 여겨 위청을 쳐서 다치게 했는데, 얼마 뒤 위청의 조카인 곽거병이 사냥터에서 이감을 활로 쏘아 죽였다.[4]
이광의 맏아들 이당호(李當戶)는 낭관이 되었다. 무제가 총신 한언(韓嫣)과 장난을 치다가 한언이 무례하게 굴자, 이당호는 그를 때려 쫓아 버렸다. 무제는 이 일로 이당호를 용감하다고 여겼지만, 이당호는 일찍 죽고 말았다. 이릉은 바로 이당호가 죽은 뒤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3. 생애
3.1. 한나라의 장군
젊은 시절 이릉은 시중(侍中) 겸 건장감(建章監)으로 조정에서 일했다. 이때 같은 시중이던 소무(蘇武)와 가까이 지냈고, 훗날 조정의 실권자가 되는 곽광(霍光), 상관걸(上官桀)과도 평소 친분이 있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5], 할아버지처럼 아랫사람을 아끼고 겸손하게 대해 명성이 높았다.무제는 이릉에게 이광의 기풍이 있다고 여겨 기병 800명을 맡겼다. 이릉은 이들을 이끌고 거연(居延)을 지나 흉노 땅 2천여 리 깊숙이 들어가 지형을 살폈는데, 흉노군과 마주치지는 않고 돌아왔다. 이후 기병 지휘관인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단양(丹陽) 출신의 초나라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주천(酒泉)과 장액(張掖)에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무탈하기만 할 듯한 상황이었으나……
3.2. 구렁텅이로
3.2.1. 위풍당당한 출정
이릉이 활동할 무렵, 한나라는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라는 전대의 위대한 지휘관들이 쌓은 성과를 바탕으로 흉노에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위청과 곽거병의 시대가 끝난 뒤 무제가 중용한 장수는 이광리(李廣利)였다.[6] 이광리는 본래 여동생 이부인이 무제의 총애를 받아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을 낳은 덕에 장수가 된, 이른바 외척 빽으로 출세한 인물에 가까웠다.[7] 서쪽의 대완(大宛) 정벌을 끝내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지휘관으로서 이렇다 할 역량을 보여 주지도 못했다.
기원전 99년 여름 5월, 무제는 이광리에게 기병 3만을 주어 주천에서 출발해 흉노의 우현왕을 치게 했다. 이때 무제는 이릉을 불러 이광리 군의 보급 부대를 맡기려 했다. 그러자 이릉은 머리를 조아리며 청했다.
| "신이 거느리고 변방에 주둔하는 병사들은 모두 형(荊)·초(楚)의 용사이자 기이한 재주를 가진 검객들로, 힘으로는 능히 호랑이를 잡고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힙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한 부대를 맡아 난간산(蘭干山) 남쪽으로 가서 선우의 병력을 나누어, 그들이 이사장군[8]에게만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臣所將屯邊者,皆荊楚勇士奇材劍客也,力扼虎,射命中,願得自當一隊,到蘭干山南以分單于兵,毋令專鄉貳師軍。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자신이 따로 움직여 흉노의 주의를 끌고 전력을 분산시켜, 이광리가 받을 압박을 덜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내줄 기병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 "남의 밑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것이냐? 나는 이미 군사를 많이 일으켜서 너에게 줄 기병이 없다." 將惡相屬邪!吾發軍多,毋騎予女。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그러자 이릉은 기병은 필요 없으며,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치겠다면서 보병 5천 명이면 선우의 본거지까지 짓밟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무제는 그 기개를 장하게 여겨 출정을 허락했다.
그리고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에게 군사를 이끌고 중간까지 나가 이릉의 부대를 맞이하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노박덕은 곽거병 휘하에서부터 싸웠고 남월(南越) 정벌에서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활약한 이름난 장수였다.[9] 그런 그에게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내는 이릉은 애송이에 불과했고, 그 뒤를 받쳐 주는 역할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노박덕은 무제에게 따로 상주했다.
| "바야흐로 가을이라 흉노의 말이 살쪄 있으니, 아직은 그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릉을 봄까지 머물게 하였다가, 주천과 장액의 기병 각 5천 명을 함께 거느리고 동쪽과 서쪽의 준계산을 아울러 치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方秋匈奴馬肥,未可與戰,臣願留陵至春,俱將酒泉、張掖騎各五千人並擊東西浚稽,可必禽也。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자신이 후방에 남는 대신 봄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나아가 협공하자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무제가 이 상주문을 보고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다는 데 있었다. 무제는 이릉이 앞에서는 "적은 숫자로 대군을 박살 내겠음!" 하고 큰소리를 쳐 놓고, 막상 출정할 때가 되자 겁을 먹고 노박덕을 시켜 이런 글을 올리게 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화가 난 무제는 노박덕에게 조서를 내려 서하(西河)로 가서 흉노의 침입로를 막으라고 명령했다.
| "내가 이릉에게 기병을 주려 했더니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치겠다'고 하더라. 지금 오랑캐가 서하로 들어왔으니, 군사를 이끌고 서하로 가서 구영(鉤營)으로 통하는 길을 막으라." 吾欲予李陵騎,云『欲以少擊眾』。今虜入西河,其引兵走西河,遮鉤營之道。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앞서 내줄 기병이 없다고 말한 것은 무제 자신이었는데, 이 조서에서는 마치 이릉이 기병을 마다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무제는 이릉에게 9월에 출발해 홀로 준계산(浚稽山)[10] 남쪽을 오가며 흉노를 살피고, 적이 보이지 않으면 수항성(受降城)으로 와서 군사를 쉬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이릉은 후방의 지원군 없이 북쪽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3.2.2. 절망적인 싸움
처음에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릉은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거연을 나서 30일 동안 북쪽으로 행군한 끝에 준계산에 이르러 군영을 세웠다. 그리고 지나온 산천의 지형을 지도로 그려, 휘하의 기병 진보락(陳步樂)을 통해 무제에게 보고했다. 진보락이 이릉은 장졸들의 신망을 얻어 모두가 목숨을 걸고 따른다고 전하자, 무제는 크게 기뻐하며 진보락을 낭(郎)으로 삼았다.그런데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릉은 이광리를 돕기 위해 흉노의 시선을 돌리는 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의 저제후 선우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적의 주력을 그대로 만난 것이다.
이때 선우가 이끈 흉노군은 기병만 3만에 달했다. 진보락처럼 전령 노릇을 하는 기병이야 있었겠지만, 애초에 무제가 내줄 기병이 없다고 했던 만큼 이릉의 부대에는 기병 전력이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 기병 없이 대규모 기병을 상대해야 했으니, 이릉은 극도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
이어지는 《한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은 당시 한나라 보병이 기병을 상대할 때 어떤 진형을 짰는지 직접 보여 주는 드문 사례다. 흉노에게 포위당한 이릉은 두 산 사이에 큰 수레를 둘러 진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직접 병사를 이끌고 진영 밖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앞줄에는 창과 방패를 든 병사를, 뒷줄에는 활과 쇠뇌를 든 병사를 세웠다.
흉노는 한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얕잡아 곧장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이릉은 맞서 싸우며 1천 개의 노(쇠뇌)를 일제히 쏘게 했고, 흉노군은 시위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흉노군이 산 위로 달아나자 한군은 추격해 수천 명을 죽였다.[11] 크게 놀란 선우는 좌우의 병력을 모두 불러 모았고, 이릉이 상대해야 할 적은 8만 흉노 기병으로 불어났다.
그때부터 지옥 같은 싸움이 이어졌다. 흉노군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쉴 새 없이 공격해 왔고, 이릉은 죽을힘을 다해 막아 내면서 조금씩 남쪽으로 물러났다. 며칠 뒤 산골짜기에 이르자 이릉은 부상자를 점검해, 세 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에 태우고, 두 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를 끌게 하고, 한 군데만 다친 사람은 무기를 들고 싸우게 했다.[12]
이릉은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옛 용성(龍城) 길[13]을 따라 4~5일 동안 물러난 끝에 큰 늪지대의 갈대밭에 이르렀다. 흉노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불을 지르자, 이릉도 맞불을 놓아 불길을 피했다.
남쪽으로 내려가 산 아래에 이르자, 남쪽 산 위에 있던 선우가 아들에게 기병을 주어 이릉을 치게 했다. 이릉의 군사는 나무 사이에서 걸어서 싸우며 다시 수천 명을 죽였고, 연발 쇠뇌를 선우에게 쏘아 선우가 산 아래로 달아나기까지 했다. 이날 이릉은 흉노 포로 한 명을 붙잡아, 선우가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들은 한나라의 정예병이라 쳐도 꺾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밤낮으로 우리를 남쪽 변경 가까이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혹시 복병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此漢精兵,擊之不能下,日夜引吾南近塞,得毋有伏兵乎?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하지만 흉노의 장수들은, 선우가 몸소 수만 기를 이끌고도 한군 수천 명을 없애지 못한다면 앞으로 변방의 신하들을 부릴 수 없게 되고 한나라는 흉노를 더욱 얕볼 것이라며 반대했다. 대신 평지가 나올 때까지 남은 4~50리의 산골짜기에서 한 번 더 힘껏 싸워 보고, 그래도 깨뜨리지 못하면 돌아가자고 했다. 흉노가 걱정한 복병은, 노박덕이 이미 서하로 떠나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버텼다면 흉노가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릉의 군세는 점점 위급해졌다. 흉노 기병은 많았고, 싸움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이릉은 흉노군 2천여 명을 더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터졌다. 이릉의 군후(軍候) 관감(管敢)이 교위에게 모욕을 당하자 흉노로 달아나 항복하고는, 이릉 군의 사정을 낱낱이 밀고해 버린 것이다.
| "이릉의 군사는 뒤따르는 구원군도 없고 화살도 거의 떨어졌습니다. 앞장서는 것은 장군 휘하의 군사와 교위인 성안후(成安侯) 한연년(韓延年)[14]의 군사 각 800명뿐이고, 노란 깃발과 흰 깃발을 쓰고 있습니다. 정예 기병을 보내 이들에게 활을 쏘면 바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陵軍無後救,射矢且盡,獨將軍麾下及成安侯校各八百人為前行,以黃與白為幟,當使精騎射之即破矣。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관감의 말로 한군의 사정을 알게 된 선우는 크게 기뻐하며 총공격을 퍼부었다. 흉노군은 "이릉과 한연년은 어서 항복하라!"고 외치며 길을 막고 맹공을 가했다. 산 위에서 사방으로 쏘아 대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고, 이릉의 군사들은 단 하루 만에 화살 50만 발을 모두 쏘아 버렸다. 결국 수레도 모두 버려야 했다. 남은 병사 3천여 명은 수레의 바퀴살을 잘라 무기로 삼았고, 군리들은 짧은 칼을 들었다.
3.2.3. 어쩔 수 없는 투항
만신창이가 된 이릉의 군대가 산골짜기로 들어서자, 선우는 그 뒤를 막고 산모퉁이에서 바위를 굴려 수많은 한나라 병사를 죽였다. 피해가 너무 컸고,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해가 저물자 이릉은 간편한 평복으로 갈아입고, 따라나서려는 병사들을 막으며 말했다.
| "나를 따르지 마라. 대장부가 혼자 가서 선우를 잡아 오겠다." 毋隨我,丈夫一取單于耳!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혼자서 선우를 어떻게든 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될 일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한참 뒤에 돌아온 이릉은 크게 탄식했다.
| "우리는 졌다. 모두 죽을 것이다." 兵敗,死矣!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그 모습을 본 어느 군리가 이릉에게 권했다.
| "장군의 위세는 흉노조차 벌벌 떨게 하였습니다. 단지 천명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지금은 일단 흉노에게 항복하셨다가 훗날 길을 찾아 한나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착야후(浞野侯)[15]도 포로가 되었다가 나중에 도망쳐 오자 천자께서 손님의 예로 대우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물며 장군이야 어떻겠습니까." 將軍威震匈奴,天命不遂,後求道徑還歸,如浞野侯為虜所得,後亡還,天子客遇之,況於將軍乎!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이릉은 "그만두시오. 내가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장사(壯士)가 아니오."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깃발을 모두 베어 버리고 진귀한 물건은 땅에 묻은 뒤 탄식했다. "화살 수십 발만 더 있어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이제는 다시 싸울 무기가 없으니 날이 밝으면 앉아서 포박당할 뿐이다. 각자 새와 짐승처럼 흩어지면, 그래도 살아 돌아가 천자께 보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릉은 병사들에게 마른 식량 두 되와 얼음 반 덩이씩을 나눠 주고, 변경의 요새인 차로장(遮虜鄣)에 먼저 닿은 사람은 기다렸다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한밤중에 북을 쳐서 병사들을 깨우려 했지만, 북마저 찢어져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릉은 한연년과 함께 말에 올라 장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천 명의 흉노 기병이 뒤쫓아 왔고, 한연년은 결국 전사했다. 이릉은 "폐하를 뵐 면목이 없다."라고 말하고는 끝내 흉노에 항복했다. 패배한 곳은 한나라 요새에서 고작 10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흩어진 5천여 병사 가운데 무사히 요새까지 돌아온 사람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릉은 8만 기에 달하는 선우의 군대에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16] 그 처지에서 거둔 것으로는 무서운 전과였다. 이 전투는 존 린(John A. Lynn)의 《배틀: 전쟁의 문화사》(원제: Battle: A History of Combat and Culture) 등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오늘날로 치면 보병 부대가 훨씬 많은 기갑 부대를 상대로 분전한 셈이다.
한편 이광리는 한군의 주력을 이끌고 천산(天山)으로 진군해 우현왕을 격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이오현 동남쪽에서 흉노 대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죽을 위기에 처했고, 조충국(趙充國)이 장사 100여 명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은 덕에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이 원정에서 이광리 군은 병력의 6~7할을 잃었다.
3.3. 사마천, 이릉을 변호하다
| 사마천(司馬遷) |
이릉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무제는 차라리 이릉이 장렬히 싸우다 죽었기를 바랐다. 그래서 관상가를 불러 이릉의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을 살피게 했는데, 상을 당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 뒤 이릉이 흉노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무제는 크게 노하여, 앞서 이릉의 소식을 전했던 진보락을 추궁했다. 진보락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워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거둔 이릉이었지만, 신하들은 무제의 분노에 편승해 하나같이 이릉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무제의 물음에 오직 한 사람만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바로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이었다.
| "이릉은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병사들과는 신의를 지켰으며, 늘 분발하여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에 목숨을 바치고자 했으니, 평소 마음에 쌓아 온 바가 나라의 선비다운 기풍이었습니다. 이번 거사에서 한 번 불행을 당했을 뿐인데, 제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를 지키는 신하들이 그 허물을 부풀리고 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입니다. 이릉은 5천이 못 되는 보병을 이끌고 오랑캐의 군마가 내달리는 땅 깊숙이 들어가 수만의 군사를 억눌렀습니다. 오랑캐는 죽은 자를 수습하고 다친 자를 부축하기에도 겨를이 없어, 활을 당길 수 있는 백성을 모두 동원해 그를 에워싸고 공격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1천 리를 싸우며 돌아왔고, 화살이 다하고 길이 막히자 병사들은 빈 활을 당기며[17]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의 적을 향해 다투어 목숨을 걸었습니다. 부하들이 죽을힘을 다하게 만들었으니, 옛날의 명장이라 해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몸은 비록 패하여 적에게 떨어졌지만, 그가 적을 꺾은 공은 천하에 드러내기에 충분합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마땅히 기회를 얻어 한나라에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陵事親孝,與士信,常奮不顧身以殉國家之急。其素所畜積也,有國士之風。今舉事一不幸,全軀保妻子之臣隨而媒糵其短,誠可痛也!且陵提步卒不滿五千,深輮戎馬之地,抑數萬之師,虜救死扶傷不暇,悉舉引弓之民共攻圍之。轉鬭千里,矢盡道窮,士張空拳,冒白刃,北首爭死敵,得人之死力,雖古名將不過也。身雖陷敗,然其所摧敗亦足暴於天下。彼之不死,宜欲得當以報漢也。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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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무제(漢武帝) |
사마천은 이릉과 같은 조정에서 일하기는 했지만 친분은 전혀 없었고, 술 한잔 함께 나눈 적도 없는 사이였다.[18] 그런 이릉을 사사로운 정 없이 합리적으로 변호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무제는 사마천이 이광리의 공을 깎아내리고 이릉을 위해 변명한다고 여겨, 그에게 사형을 내려 버렸다.
사형을 면하려면 속죄금을 내거나 궁형, 즉 거세형을 받아야 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사마천은 속죄금을 낼 수 없었고[19], 사기의 저술이라는 대업을 끝내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다. 결국 사마천은 치욕을 감수하고 궁형을 받아들였다.[20]
시간이 흐른 뒤 무제는 이릉을 구원하지 못한 일을 후회했다.
| "이릉이 요새를 나설 때 강노도위에게 조서를 내려 맞이하게 했어야 했다. 미리 조서를 내린 탓에 늙은 장수가 간사한 꾀를 부리게 만들었다." 陵當發出塞,乃詔彊弩都尉令迎軍。坐預詔之,得令老將生姦詐。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하지만 노박덕의 상주를 이릉의 계략으로 의심해 후방의 지원군을 거둬들인 것은 다름 아닌 무제 자신이었다. 무제는 사자를 보내 간신히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위로했다.
3.4. 끝없는 불운
기원전 97년, 무제는 이광리에게 기병 6만과 보병 7만을 주어 다시 흉노를 치게 했다. 흉노 선우가 10만 기로 맞서면서 양군은 10여 일 동안 맞붙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싸움을 그쳤다. 이 원정에서 무제는 이릉의 일을 마음에 두고,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公孫敖)[21]에게 흉노 땅 깊숙이 들어가 이릉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러나 공손오는 아무 성과 없이 돌아와 이렇게 보고했다.| "포로를 붙잡아 물어보니 '이릉이 선우에게 병법을 가르쳐 한군에 대비하게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捕得生口,言李陵教單于為兵以備漢軍,故臣無所得。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이 말을 듣고 다시 분노한 무제는 이릉의 어머니와 동생, 아내와 자식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씨 가문의 명망도 땅에 떨어져, 이씨 문하에 드나들던 농서의 선비들조차 이를 수치로 여길 지경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릉은 분개하여, 훗날 한나라 사신이 오자 따져 물었다.
| 그 후 한나라가 흉노에 사신을 보내자, 이릉이 사신에게 말했다. "나는 한나라를 위해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흉노 땅을 휩쓸었지만, 구원군이 없어서 패했을 뿐이오. 내가 한나라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우리 집안을 몰살했단 말이오!" 사신이 말했다. "이소경께서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한나라에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릉이 말했다. "그건 이서지, 내가 아니오!" 其後,漢遣使使匈奴,陵謂使者曰:「吾為漢將步卒五千人橫行匈奴,以亡救而敗,何負於漢而誅吾家?」使者曰:「漢聞李少卿教匈奴為兵。」陵曰:「乃李緒,非我也。」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사정은 이러했다. 이서(李緒)는 한나라의 새외도위(塞外都尉)로 해후성(奚侯城)을 지키다가 흉노의 공격을 받자 항복한 인물이었다. 선우는 그를 빈객으로 대접하여 늘 이릉보다 윗자리에 앉혔는데[22], 선우에게 병법을 가르친 사람이 바로 이 이서였다. 한나라에서는 그 사정을 모르고 이릉의 집안을 결딴낸 것이다. 자기 집안이 이서 때문에 몰살당했다는 사실에 비통해한 이릉은 사람을 시켜 이서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를 안 선우의 어머니 대연지(大閼氏)가 이릉을 죽이려 하자, 선우는 이릉을 북방에 숨겨 두었다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다시 불러들였다.
선우는 이릉을 장하게 여겨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고 우교왕(右校王)으로 삼았다.[23] 이때 한나라에서 나고 자랐다가 흉노에 투항한 위율(衛律)도 정령왕(丁靈王)에 봉해졌다. 다만 위율이 늘 선우 곁에 머물며 국사에 관여한 것과 달리, 이릉은 대개 밖에 머물다가 큰일이 있을 때만 들어와 의논에 참여했다. 훗날에는 흉노에 복속된 호걸(呼揭)의 왕이 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3.5. 귀부하지 않은 소무
이 무렵 흉노에는 이릉의 옛 동료 소무도 붙잡혀 있었다. 소무는 기원전 100년 사신으로 흉노에 왔다가 억류되었는데, 끝내 항복을 거부하여 북해(바이칼호) 부근에서 홀로 양을 치며 궁핍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릉은 흉노에 항복한 것이 부끄러워 감히 그를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선우의 명으로 소무를 찾아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항복을 권했다. 소무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저는 스스로 이미 죽은 몸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입니다. 왕[24]께서 기어이 이 소무를 항복시키려 하신다면, 오늘의 즐거움을 마치고 바로 앞에서 죽는 것으로 대답하겠습니다." 自分已死久矣!王必欲降武,請畢今日之驩,效死於前!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중 소무 부분) |
그 지극한 정성을 본 이릉은 탄식하며 말했다.
| "아! 그대는 의로운 선비로구나. 이 이릉과 위율의 죄는 하늘에 닿았구나!" 嗟乎,義士!陵與衛律之罪上通於天。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중 소무 부분) |
이릉은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소무와 헤어졌다. 그 뒤 이릉은 직접 물자를 건네기가 부끄러워 흉노인 아내를 시켜 소무에게 소와 양 수십 마리를 보내 주었다. 또 나중에 다시 북해로 찾아와, 변경에서 붙잡은 운중군 사람의 말을 빌려 무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소무는 남쪽을 향해 피를 토하며 통곡했고, 몇 달 동안 아침저녁으로 곡을 했다.
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한 지 몇 해 뒤, 한나라와 흉노는 화친을 맺었다. 한나라가 소무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자 흉노는 소무가 이미 죽었다고 둘러댔지만, 소무의 부하였던 상혜(常惠)의 꾀로 소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5] 결국 소무의 귀환이 결정되자, 이릉은 술자리를 마련해 소무를 축하하며 말했다.
| "이제 족하께서 돌아가시니, 흉노에서는 이름을 드날리고 한나라 황실에서는 그 공이 드러났습니다. 옛날 죽백(竹帛)에 기록되고 단청으로 그려진 사람이라 한들 어찌 자경(子卿)[26]을 넘어서겠습니까? 이 이릉이 비록 둔하고 겁 많은 사람이지만, 만약 한나라가 잠시나마 이 이릉의 죄를 용서하고 노모를 온전히 지켜 주어, 큰 치욕 속에 품어 온 뜻을 떨쳐 일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면, 조말이 가(柯)의 회맹에서 한 것[27]에 가까운 일을 해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이릉이 지난날 잊지 않았던 바입니다. 그러나 한나라는 이 이릉의 집안을 잡아들여 몰살하여 세상에 다시없을 큰 살육을 저질렀으니, 이제 이 이릉이 무엇을 돌아보겠습니까? 끝났습니다! 그저 자경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으니, 한번 헤어지면 영영 끝입니다." 今足下還歸,揚名於匈奴,功顯於漢室,雖古竹帛所載,丹青所畫,何以過子卿!陵雖駑怯,令漢且貰陵罪,全其老母,使得奮大辱之積志,庶幾乎曹柯之盟,此陵宿昔之所不忘也。收族陵家,為世大戮,陵尚復何顧乎?已矣!令子卿知吾心耳。異域之人,壹別長絕!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중 소무 부분) |
이어서 이릉은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 徑萬里兮度沙幕 만 리 길을 가로질러 사막을 건넜네 爲君將兮奮匈奴 임금의 장수 되어 흉노 땅에서 떨쳐 싸웠네 路窮絶兮矢刃摧 길은 끊어지고 화살과 칼은 꺾였으니 士衆滅兮名已隤[28] 군사들은 죽고 이름은 이미 무너졌네 老母已死 雖欲報恩將安歸 노모는 이미 돌아가셨으니, 은혜를 갚고자 한들 어디로 돌아가리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중 소무 부분) |
노래를 마친 이릉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무와 작별했다.
이 밖에 남조 양나라 때 엮인 《문선(文選)》에는 이릉이 소무에게 보냈다는 편지와 시가 실려 있지만, 오늘날에는 후대에 지어진 위작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이야깃거리 문단 참조.
3.6. 나는 이미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소
무제가 죽은 뒤 어린 소제(昭帝)를 보좌하여 정권을 잡은 것은 곽광과 상관걸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 이릉과 친했기 때문에, 이릉의 옛 친구인 농서 사람 임입정(任立政) 등 세 사람을 흉노에 보내 이릉을 불러오게 했다.임입정 일행이 흉노에 도착하자 선우는 술자리를 열어 한나라 사신들을 대접했고, 이릉과 위율도 그 자리에 함께 앉았다. 선우 앞이라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임입정은 이릉에게 눈짓을 보내며 자기 칼자루 끝의 고리를 거듭 어루만지고[29] 발을 잡아 보이면서[30],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을 넌지시 전했다.
뒷날 이릉과 위율은 소고기와 술을 가지고 한나라 사신들을 위로하러 와서 함께 노름을 하며 술을 마셨다. 두 사람 모두 흉노의 옷을 입고 흉노식으로 상투를 틀고 있었다. 임입정은 일부러 큰 소리로 "한나라는 이미 대사면을 내렸고 나라 안은 평안하오. 주상께서는 아직 나이가 젊으시고, 곽자맹(곽광)과 상관소숙(상관걸)이 정사를 맡고 있소."라고 말하며 이릉의 마음을 넌지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이릉은 아무 대꾸 없이 임입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31] 짧게 한마디만 했다.
| "나는 이미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소." 吾已胡服矣!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잠시 뒤 위율이 옷을 갈아입으러 자리를 비우자, 임입정은 본격적으로 이릉을 설득했다. 이릉이 곽광과 상관걸의 안부를 묻자, 임입정은 "두 분께서는 소경께서 고향에 돌아오시기를 청하시니, 부귀는 걱정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이릉은 임입정의 자를 부르며 "소공(少公), 돌아가는 것이야 쉬운 일이오. 다만 다시 치욕을 당할까 두려울 뿐이니, 어찌하겠소!"라며 거절했다.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위율이 그 말을 일부 듣고 이렇게 말했다.
| "이소경은 현명한 사람이라 굳이 한 나라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옛날 범려는 천하를 두루 떠돌았고, 유여(由余)는 서융(西戎)을 떠나 진(秦)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그리 다정하게 나누고 계셨습니까?"[32] 李少卿賢者,不獨居一國。范蠡徧遊天下,由余去戎入秦,今何語之親也!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자리는 그렇게 파했다. 임입정이 뒤따라가 마지막으로 "그래도 돌아올 마음이 없소?"라고 묻자, 이릉은 이렇게 대답했다.
| "장부가 두 번 치욕을 당할 수는 없는 법이오." 丈夫不能再辱。 (《한서》 권54 〈이광소건전〉) |
이릉은 이미 한 번 적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겪었고, 그 뒤 무제의 명으로 가족까지 모두 잃었다. 한나라에는 그를 반겨 줄 가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제가 살아 있을 때는 사마천을 빼면 누구 하나 변호해 주지 않던 사람들이 무제가 죽은 지금에 와서 돌아오라고 해 봤자, 이릉으로서는 냉소밖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33] 이릉이 말한 두 번째 치욕은, 돌아간 뒤 다시 죄인으로 몰리거나 흉노에서 고위직을 지낸 일로 비난받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중용하고 새 가족까지 이루게 해 준 흉노를 버리고 떠나는 것 역시 또 한 번의 변절이 된다.
이릉은 흉노에서 20여 년을 산 끝에 기원전 74년(원평 원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임입정 이후에도 한나라가 다시 사람을 보내 귀환을 권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훗날 흉노가 여러 선우로 나뉘어 다투던 혼란기에, 이릉의 아들은 앞서 선우를 자칭했다가 그 칭호를 버린 오자도위(烏藉都尉)를 다시 선우로 옹립했다. 그러나 호한야 선우가 오자도위를 사로잡아 처형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4. 이야깃거리
중국사를 논할 때 상당히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중국 사서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이고, 사마천을 이야기할 때 도저히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가 궁형을 당한 일인데, 그 원인이 바로 이릉을 변호한 일이기 때문이다.4.1. 이릉의 이름으로 전하는 글
남조 양나라의 소명태자 소통(蕭統)이 엮은 《문선(文選)》에는 이릉이 소무에게 지어 주었다는 시 세 수(〈여소무시(與蘇武詩)〉)와, 소무가 귀국한 뒤 보냈다는 편지 〈답소무서(答蘇武書)〉가 실려 있다. 다만 이 글들은 《한서》에는 실려 있지 않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가 《사통(史通)》에서 문체가 전한 사람의 것 같지 않다고 지적하고 송나라의 소식(蘇軾)도 위작이라고 단정한 이래, 후대 사람이 이릉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이릉의 처지를 절절하게 그려 내어 오랫동안 널리 읽혔다.〈여소무시〉 가운데 첫째 수는 다음과 같다.
| 良時不再至 좋은 때는 다시 오지 않으리니 離別在須臾 이별이 눈앞에 닥쳤네 屏營衢路側 갈림길 옆에서 서성이며 執手野踟躕 손을 맞잡고 들판에서 머뭇거리네 仰視浮雲馳 고개 들어 보니 뜬구름 내달리다 奄忽互相逾 문득 서로를 앞질러 가네 風波一失所 바람에 한번 머물 곳을 잃으면 各在天一隅 저마다 하늘 한 귀퉁이에 있게 되리 長當從此別 이제부터 길이 헤어져야 하니 且復立斯須 잠시만 더 이렇게 서 있자 欲因晨風發 새벽바람 부는 것에 실어 送子以賤軀 이 천한 몸으로나마 그대를 보내고 싶네 (《문선》 권29 〈이소경여소무시(李少卿與蘇武詩)〉 3수 중 제1수) |
〈답소무서〉(《문선》 권41 수록)의 전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위키문헌에서 볼 수 있다. 편지 속의 이릉은 "그대는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라며 한나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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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께 올립니다. 당신께서 근면성실하여 훌륭한 덕이 널리 알려지고, 태평한 시절에 조정에서 일하면서 명예를 드높이셨으니, 정말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옛 사람들은 외국으로 멀리 몸을 피하는 일을 슬퍼했습니다. 서로 멀리서 바라보면서 옛 친구를 회상하니,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전에 제가 보낸 서신을 잊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답장을 하셔서 형제보다 더 간절하게 위로해 주시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비록 우둔하나 어찌 감동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 적에게 항복한 후로 지금까지 처신하기 어려워 홀로 앉아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민족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부드러운 가죽 팔찌를 차고 취막(毳幕)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양고기와 우유로 배고픔과 갈증을 풀었습니다. 눈을 치켜뜨고 웃으며 말하려 하지만, 누가 저와 함께 기뻐하겠습니까? 오랑캐 땅에는 얼음이 두껍고 변방 땅은 얼어 갈라집니다. 들리는 것은 비풍의 쓸쓸한 소리뿐입니다. 차디찬 9월이 오면 변방 밖의 풀은 말라 버립니다. 밤중에 잠을 못 이루어 멀리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오랑캐 피리 소리 서로 화답하고 방목하는 말들 슬프게 울어 신음 소리가 무리 지어 들립니다. 이러한 소리가 변경 사방에서 들립니다. 아침에 일어나 앉아서 이런 소리를 듣노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 자경! 어찌 저라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과 헤어진 후, 더욱 즐거운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노모께서는 연로하신데도 죽임을 당하시고, 처자는 죄가 없는데도 살육을 당했습니다. 저는 국은을 버려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귀국하여 영광을 받고 저는 여기 남아 수모를 받고 있으니 이것이 운명이란 말입니까? 예의를 아는 곳에서 내쳐져 이 무지한 곳에 와서, 임금님과 부모님의 은혜를 버리고 야만인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슬픕니다. 선군(先君)의 자손이 오랑캐 족속으로 변하다니! 저의 슬픔 더욱 큽니다. 공로가 크고 죄는 적은데도 임금님의 현명하신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저의 작으나마 국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마저도 저버려졌습니다. 매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심장을 도려내어 스스로를 밝히고 목을 잘라 의지를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나라가 저를 버렸으니, 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수치스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억지로 용기를 내어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이러는 것을 보고 듣기 거북한 웃음으로 저를 위로했지만, 이방에서의 즐거움은 사람들 슬프게 하고 근심만 더해 줄 뿐입니다.
아, 자경! 사람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 서로 마음을 이해하여 주는 것이 귀중합니다. 저번에 보낸 서신은 바쁘게 써서,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 선제(先帝)께서 저에게 보병 5천을 주셔서 먼 흉노 지역까지 출정했습니다. 다섯 장군이 길을 잃어 저 혼자서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보병을 거느리고 식량을 만 리 이상 운반하면서, 한나라 국경을 떠나 강한 오랑캐 땅에 들어가 오천 명의 군사로 십만 대군을 대적했습니다. 피로에 지친 병사를 독려하여 흉노의 정예 기병을 막아 냈으며, 적장의 머리를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았습니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흔적을 없애고, 먼지를 쓸어 내듯이 용맹한 적장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군사들이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능력이 없어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맡기가 어려웠지만, 이러한 때에 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흉노가 패한 후, 거국적으로 군대를 일으키고 다시 날랜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그 수가 십만이 넘었습니다. 흉노 군장이 몸소 진영 앞에서 저의 군사를 포위했습니다. 외국에 나와 있는 저의 군대와 자기 영토에 있는 흉노군의 형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저의 보병과 흉노의 기병 세력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친 병사들이 다시 싸움에 임했는데, 한 사람이 천 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목숨을 다해 다투어 앞에 있는 적을 죽였습니다. 부상자와 시체로 들판이 가득 찼고, 살아남은 사람은 백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부상당해 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리치며 팔을 휘두르자, 부상당하고 병든 군사들이 모두 칼을 들고 오랑캐를 가리키니, 오랑캐들도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병사들은 화살이 바닥났습니다. 손에는 조그마한 무기 하나도 없고 머리에는 투구도 없이, 소리 지르며 앞다투어 진격했습니다. 이때 천하 사람들은 제가 진노했다고 여기고, 저를 위하여 전사들이 피눈물을 머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흉노 군장이 저를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병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역적이 그에게 후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흉노 군장이 달려와 재차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 고황제(高皇帝)께서는 30만 대군으로도 평성(平城)에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때 맹장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지모 있는 신하들이 비 오듯 많았으나, 이레 동안이나 굶주리고 나서야 간신히 곤란한 상황을 면하셨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해 어찌 쉽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일하는 고관들이 제가 죽지 못한 것을 원망스레 이야기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죽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자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구차하게 살며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입니까? 어찌 임금과 어버이를 배신하고 처자를 버려 가면서 이익을 꾀하겠습니까? 제가 죽지 않은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번 서신에 말씀드린 것처럼 임금님께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은 덕을 보답하는 것만 못합니다. 옛적에 범려(范蠡)는 회계에서 수치를 당했으나 죽지 않았고, 조말(曹沫)은 제나라와 세 번 싸워 세 번 패하는 수모를 당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려는 구천의 원수를 갚고, 조말은 노나라의 수치를 씻었습니다. 저의 변변치 못한 생각도 이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어찌 뜻을 세워 꾀하지도 않았는데 원성이 생기고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부모와 형제들이 죽음 당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그대께서 또 '한 왕조가 공신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대는 한나라 신하인데 어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소하(蕭何)와 번쾌(樊噲)는 구금당했고,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은 죽임을 당했으며, 조조(晁錯)는 피살당했고, 주발(周勃)과 두영(竇嬰)은 죄를 입었습니다. 그 외에 천자를 돕고 공을 세운 가의(賈誼)와 주아부(周亞夫) 같은 사람들은 정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었고 재상과 장군이 될 만한 그릇인데도, 소인배들의 참소로 인해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재주가 있었으나, 비방을 받아 능력을 펴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위해 누가 슬퍼한 적이 있었습니까? 저의 할아버님께서는 공로가 천하를 덮을 듯했고, 의기와 용맹은 삼군 중에 제일이셨습니다. 다만 권력 있고 높은 공신과 대신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먼 지역에서 자결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신과 의사(義士)들이 창을 가지고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공신들에게 후하게 대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전에 자경께서는 몇 명 안 되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강한 오랑캐 나라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불리한 때를 만나 칼 위에 엎드려 목숨을 돌보지 않아야 할 때도 있으셨고, 이곳저곳 떠돌며 고생하시다 변경 북방 황야에서 거의 죽을 뻔하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젊어서 사신으로 가서 백발이 성성해서야 비로소 돌아오셨습니다. 노모께서는 돌아가시고 살아 있던 처도 개가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천하에 매우 드문 일로 고금을 통해서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랑캐들도 당신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샀는데, 천하를 통치하는 임금께서는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께서는 봉지와 천승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께서 귀국하신 후 받으신 것은 겨우 2백만 전(錢)뿐이고 직위는 속국(屬國)에 불과했으며 봉지는 조금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공로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게다가 공훈과 능력 있는 사람을 해친 신하들은 모두 만호후가 되었으며 황제의 친척들과 아첨하는 무리들은 모두 조정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일찍이 이처럼 대접을 받으셨으니, 제가 어찌 바랄 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한 왕조에서 제가 절개를 지켜 죽지 않은 것을 엄하게 책하고, 그대가 절개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박하게 상을 내렸습니다. 먼 곳에서 이런 소식을 접한 신하가, 멀리 바라보고 달려가 목숨을 다해 명을 받들기란 실로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번 생각해도 후회스럽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은혜를 버렸지만 한 왕조는 덕을 버렸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충신은 비록 반드시 격렬하게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목숨 버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정말 편안하게 지낸다면, 임금께서 어찌 항상 저를 생각하시며 못 잊어하시겠습니까?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내지 못하면, 죽어 오랑캐 땅에 묻힐 뿐입니다. 그러니 누가 다시 몸을 굽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고, 대궐로 돌아가 옥리가 법을 가지고 장난칠 기회를 갖게 하겠습니까? 그대는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아, 자경! 또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왕래도 없고 길도 다릅니다. 살아서 서로 다른 곳에 있고 죽어서도 서로 다른 곳의 귀신이 될 터이니, 당신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대신 옛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주시고, 임금님께도 힘써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대 아드님은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저를 생각하시고,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이릉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4.2. 문학과 예술 속의 이릉
워낙 처절한 삶을 산 인물이다 보니 그 비감 때문에 여러 시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변새시(邊塞詩)는 한나라를 빌려 당대의 변방을 노래한 작품이 많아 이릉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도 있다. 그중 만당 시인 진도(陳陶)의 〈농서행(隴西行)〉은 이릉의 5천 군사를 연상시키는 구절로 시작한다.| 誓掃匈奴不顧身 五千貂錦喪胡塵 可憐無定河邊骨 猶是春閨夢裡人 결단코 흉노를 쓸어버리겠노라고,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전쟁터로 나갔지만, 담비 가죽과 비단 옷을 입은 오천의 병사는, 오랑캐 땅에서 티끌이 되어 버렸네. 애석하게도, 그들의 뼈는 무정하 강가에 흩어져 있건만, 머나먼 고향의 아내와 연인들은 여전히 꿈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련만. (진도, 〈농서행〉 4수 중 제2수. 《당시삼백수》 수록) |
일본에서도 그 용맹과 장렬함은 유명했던 듯, 일본의 군기물 《장문기(將門記)》[34]에도 요시마사는 물을 얻은 용의 마음처럼 힘을 내고, 옛날 이릉(李陵)의 분투함을 이루었다., 이릉(李陵)의 채찍을 들어, 바람같이 통과해 지나가고, 새같이 날아서 도착했다. 같은 표현이 보인다.
일본의 소설가 나카지마 아츠시가 이릉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이릉(李陵)》을 썼다. 이릉뿐 아니라 사마천과 소무의 삶까지 함께 그려 낸 명작이다. 특이하게도 제목은 작가가 붙인 것이 아니다. 작가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발견되어 출판된 유고라 제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첩에 '막북', '막북비가' 등 제목 후보로 보이는 단어가 남아 있었지만 끝내 정하지 못했고, 유고를 정리한 사람들이 지금의 제목을 붙였다.
일본의 만화가 히사마츠 후미오(久松 文雄)가 그린 만화 《사기》 시리즈에도 이릉을 주인공으로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중국 전통 음악 가운데 〈이릉이 한나라를 그리다(李陵思漢, 이릉사한)〉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은 문명 5의 확장팩 〈신과 왕〉에서 훈족 문명의 배경 음악으로 편곡되었다. 이를 두고 작곡가가 흉노와 훈족을 같은 집단으로 보는 가설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훈족이 즐긴 음악을 알아낼 길이 없어 흉노와 관련된 가장 가까운 음악을 가져다 썼을 가능성이 높다.
4.3. 후손 전설
《신당서》 〈회골전 하〉에 따르면 "키르기스인들은 모두 키가 크고 붉은 머리털, 흰 얼굴, 초록 눈동자를 지녔으며, 검은 머리털을 불길하게 여겼다. 눈동자가 검은 사람은 반드시 이릉의 후손이라고 했다."[35]고 한다. 키르기스는 스스로 이릉의 후손이라 당 황실과 조상이 같다고 했고, 당 중종도 키르기스는 당과 같은 일족이라 다른 번국과 견줄 바가 아니라며 이를 인정했다.[36]1940년 예니세이강 상류의 하카스 지역 아바칸 인근에서 한나라 양식의 궁전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이릉의 거처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만 다른 인물의 거처로 보는 견해도 있어 확정된 것은 아니다.
북주와 수나라의 장군 이목(李穆)도 자신을 이릉의 후손이라 했다. 이릉이 흉노에 들어간 뒤 그 자손이 대대로 북방에서 살다가, 북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다시 농서 지방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나라의 명장 이광필의 아버지로 거란 추장 출신인 이해락(李楷洛)도, 당나라에 귀순할 때 자신이 이릉의 후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 기원전 114년 농서군의 일부를 떼어 천수군을 설치하면서 성기현은 천수군 소속이 되었다. 따라서 이릉이 그 이전에 태어났다면 농서군 성기현, 이후에 태어났다면 천수군 성기현 출신이 되는데, 이릉의 출생 연도가 전하지 않아 어느 쪽인지 확정할 수 없다.[2] 오호십육국시대에 서량(西涼)을 세운 이고(李暠)가 이광의 16세손을 자칭했고, 당나라 황실은 다시 이고의 후손을 자처했다. 다만 이 계보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당 황실이 내세운 것은 이릉이 아니라 이광의 후손이라는 계보다.[3] 만화 킹덤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4] 곽거병이 한창 총애를 받던 때라 무제는 이 일을 덮고, 이감이 사슴에 받혀 죽었다고 둘러댔다.[5] 이광의 기록을 보면 이 집안은 대대로 활쏘기를 가법으로 전수해 왔다.[6] 이름이 비슷하지만 이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7] 사실 명장이던 위청도 출세는 누나 빽으로 하긴 했다.[8] 이광리를 가리킨다. 대완 정벌 때 대완의 이사성(貳師城)을 치라는 뜻에서 이 칭호를 받았다.[9] 이후 법을 어겨 제후 작위를 잃고 강노도위로 강등되어 거연에 주둔하고 있었다.[10] 권중달 역 《자치통감》 주석에 따르면 울란바토르 북쪽이다.[11] 한나라의 쇠뇌는 흉노 기병의 활보다 멀리 쏠 수 있어서, 보병이 진형을 갖추고 일제히 사격하면 기병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있었다. 문제 때의 조조(晁錯)도 한나라의 강한 쇠뇌는 흉노의 활로 당해 낼 수 없다며 이를 한군의 장점으로 꼽았다.[12] 이 무렵 이릉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북을 쳐도 기세가 오르지 않자 군중에 여자가 있는 탓이라 여겨 수레를 뒤졌다. 그러자 변방으로 이주당한 관동 지역 도적들의 처자식 가운데 병사들의 아내 노릇을 하며 군을 따라온 여자들이 수레 속에 숨어 있었고, 이릉은 이들을 모두 칼로 베어 죽였다. 이튿날 다시 싸워 흉노군 3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13] 용성은 흉노가 해마다 모여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기원전 129년 위청이 첫 흉노 원정에서 이곳까지 쳐들어간 적이 있다.[14] 아버지 한천추(韓千秋)가 남월 정벌에서 전사하자 그 공으로 성안후에 봉해졌다.[15] 조파노(趙破奴)를 말한다. 흉노에게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온 장수다.[16]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이다.[17] 《한서》 원문은 '士張空拳'인데, 같은 대목을 사마천의 〈보임안서〉에서는 '張空弮'(빈 쇠뇌를 당기다)로 적는다. 번역은 이 뜻을 따랐다.[18] 사마천이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19] 이보다 앞선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 정벌에 나섰던 누선장군 양복은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속전을 바치고 서민으로 강등되어 목숨을 건졌다.[20] 사대부에게 궁형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겨졌고, 사마천도 〈보임안서〉에서 그 고통을 절절하게 토로했다. 비슷한 예로 후한 말의 채옹은 왕윤에게 처벌받게 되자, 얼굴에 먹물을 새기는 경형이나 발꿈치를 자르는 월형을 받아도 좋으니 한나라 역사서를 완성하게 해 달라고 청했지만, 왕윤은 이를 거절했고 채옹은 옥중에서 죽었다.[21] 위청의 친구로, 젊은 시절 위청이 붙잡혀 죽을 뻔했을 때 구해 준 인물이다.[22] 이서를 죽인 이릉에게 선우의 어머니가 크게 분노한 것으로 보아, 이서를 특히 아낀 쪽은 선우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다.[23] 자기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적장에게 왕의 지위를 줄 정도였으니, 적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무공이었던 셈이다.[24] 우교왕이 된 이릉을 가리킨다.[25] 자세한 경위는 소무 문서 참조.[26] 소무의 자.[27] 춘추시대 노나라 장수 조말(曹沫)은 제나라와 싸워 세 번 패하고 땅을 빼앗겼지만, 뒤에 가(柯)에서 열린 회맹에서 비수로 제환공을 위협해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이릉도 언젠가 이처럼 패배의 치욕을 씻고 한나라에 보답할 날을 기다렸다는 뜻이다.[28] 판본에 따라 隤를 聵로 적기도 한다.[29] 고리를 뜻하는 환(環)은 돌아온다는 뜻의 환(還)과 발음이 같다. 전한 시대의 상고한어에서도 두 글자의 음은 같았다.[30] 발(足)을 잡은 것은 달아나라(走)는 뜻을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31] 흉노식으로 튼 자신의 상투를 매만져 보임으로써, 자신이 이미 흉노 사람이 되었음을 드러낸 것이다.[32] 범려나 유여처럼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닌 사례를 들며, 이제 와서 옛 나라를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고 넌지시 경고한 것이다.[33] 다만 사마천이 홀로 자신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릉이 알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4]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35] 원문: 人皆長大,赤髮、皙面、綠瞳,以黑髮為不祥。黑瞳者,必曰陵苗裔也。 (《신당서》 권217하 〈회골전 하〉)[36] 원문: 而國與我同宗,非它蕃比。 (《신당서》 권217하 〈회골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