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30 12:36:59

관감

管敢
?~?

중국 전한(前漢) 한무제(武帝) 시기의 인물. 사서에서는 짦게 언급만 될 뿐이므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BC 99년, 한나라의 장군인 이릉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진군하였다.

그런데,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릉은 이광리를 돕기 위해 흉노의 시선을 돌리는데서 끝나야만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 선우와 정면으로 대치하고 말았다. 즉, 적의 주력을 그대로 만났어야 했다는 말이었다.

당시 흉노의 전력은 무려 기병 3만. 당초부터 한무제가 내줄 기병이 없다고 말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릉의 부대는 기병전력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기병 전력이 전혀 없이 적의 기병을 막아내기 힘들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때, 이릉은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한서 - 자치통감의 언급은, 이 당시 한나라 군의 기병 방진에 대해 몇 안되게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는 순간이다. 이릉은 적에게 포위들 당하자, 우선 큰 수레를 둘러 진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릉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가 1선에는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을 배치하고, 2선에는 궁과 노를 가진 병사를 배치하였다.

흉노는 한나라 부대가 숫자가 자신들에 비해 적자, 이를 우습게 여기고 바로 진격을 하여 다가왔다. 이에 이릉은 1천개 노로 삽시간에 공격을 가해, 흉노군은 대파되었고, 이릉이 기세를 타고 역공을 가하자 순식간에 수천명이나 되는 흉노 병사가 죽고 도망을 쳤다.

그러자 놀란 흉노 선우는 주변의 모든 전력을 소환했다. 그렇게 되자, 이릉의 적은 8만 흉노 기병으로 변해있었다.

그 후로부터는 끝없는 지옥의 순간이었다. 흉노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이용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이릉은 죽을 힘을 다해 이를 막아내었다. 이릉은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조금씩 조금씩 전선을 남쪽으로 이동시켰는데, 며칠이 되자 산골짜기 지역에 도착했고, 이릉은 여기서 부상자들을 점검하여 세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에 태우고, 두군데를 다친 사람은 수레를 끌으며. 한군대만 다친 사람은 무기를 들고 싸우게 하였다.[1]

싸움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름은 병사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가다가, 과거 위청이 진군하던 길을 따라 계속 후퇴했고, 늪지대의 갈대밭 속까지 도착했다. 그러자 흉노는 위에서부터 바람을 따라 불을 질렀고, 이릉은 여기에 대해 맞불을 질러 대항하였다. 이릉의 부대는 조금씩 남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싸움은 하루에도 수십번을 이루어지고 있었다. 흉노 선우는 이릉의 공격에 한번 도망가기도 했을 정도. 이때 이릉은 흉노의 포로를 한명 잡았는데, 포로로부터 흉노 선우가 "적의 공격이 너무 심하고,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는데 아마 복병이 있을 듯 싶다. 후퇴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2] 흉노가 걱정하는 복병은, 이미 노박덕이 전선을 이동하여 한 명도 없는 상황. 하지만 조금만 더 싸웠다면 흉노가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벌어졌다. 이릉의 군후(軍候)였던 관감은 교위에게 모욕을 받자 흉노로 도망하여, 이릉군의 상태를 낱낱하게 밀고해버린것
"이릉의 군사는 뒤에 구원군도 없으며, 화살도 또 소진되었고, 다만 장군의 휘하와 교위인 성안후(成安侯) 한연년(韓延年)[3] 뿐이며, 각기 800명씩 앞에서 가는데, 황색과 백색을 깃발로 쓰고 있으니, 마땅히 정예의 기병을 보내서 그들을 사격하면 바로 격파됩니다.

관감의 말에 요시 그란도 시즌을 외친 선우는 총공격을 가했다. 이제 이릉의 군사는 단 하루에 50만개의 화살을 모두 소비하였고, 수레도 죄다 버렸다.

결국 이후 이릉은 더 이상 버틸 방법이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결국 흉노에 항복하는 비운의 신세가 되었다. 이릉의 파멸에 관감이 제대로 역할을 해버린것이다.

이후 행적은 알 수가 없다. 흉노에 항복하였으니, 초원에서 생을 마쳤을 것으로 보인다.


[1] 이때 이릉은 병사들이 데려온 여자들도 찾아내었다. 병사들이 군중에 여자를 데려와 그렇고 그런 식으로 쓴것. 이릉은 이들을 모두 '처리' 했다.[2] 다만 만약 여기서 물러나면, 한나라가 흉노를 더욱 가볍게 여긴다고 부하들은 선우를 저지했다. 대신, 평지에서 한번더 싸워보고 그때도 안되면 후퇴하자고 하였다.[3] 아버지인 한천추가 남월에서 전사하여, 성안후로 책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