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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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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개요2. 일생
2.1. 젊은 시절2.2. 전설의 시작2.3. 북벌2.4. 북벌의 실패2.5. 말년
3. 기타4. 대중문화5. 둘러보기

1. 개요

陳慶之
(484~539)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명장.

는 자운(子雲)이었다. 문벌을 중시했던 양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출신으로 고관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본디 시종 출신이었지만 그의 주인이었던 양무제 소연이 바둑을 좋아하여 그가 부르면 한밤중에도 달려왔기 때문에 소연이 그를 좋아했다. 훗날 소연이 남제후폐제 소보권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그를 따라 수도 건강[2]을 공격했으며 소연이 황제가 되자 주서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군을 이끌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기록을 남기며 '불패의 명장'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북위군이 종리에서 양나라군 선봉 10,000명을 공격해서 장수 조경종이 죽게 생기자 300명의 기병대로 조경종을 구출하는가 하면, 북위 정벌(북벌)때는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벌을 시행하며 낙양 등 30여 개의 성을 점령했다. 그 외에도 북위의 병력이 먼 행군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이 숨은 을 200여 명의 기병으로 급습하여 격파하기도 했다. 다만 북벌 자체는 실패로 끝났고, 군이 붕괴되어 진경지 혼자 도주하게 된 사례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평소에 자주 백성들에게 베풀어 인기가 좋았으며 식량난이 있을 때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았다.

성격이 신중하고 생활도 검소했으며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연의》의 두예처럼 무장임에도 궁술이나 승마에 능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부하를 잘 위로하고 그들이 열심히 싸우도록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의흥군(義興郡) 국산(國山) 사람이었다. 이곳은 지금의 강소성 무석시 의흥(宜興) 서남의 땅이다.

진경지는 어릴 적부터 제(齊)나라의 황족이었던 소연(蕭衍)의 근위무사였다. 말도 못타고 활도 못쏘지만 소연은 바둑을 매우 좋아해서 열중하면 매일 밤부터 아침까지 중단하지 않고 계속 두었다고 한다. 그 시기 동료들은 모두 지쳐서 잠을 잤지만 진경지만이 잠을 자지 않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즉시 달려갔기에 소연으로부터 매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소연은 옹주자사(雍州刺史)로서 양양(襄陽)에 주둔했는데, 그의 형이 제나라의 폭군 소보권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남강왕(南康王) 소보융(蕭寶融)을 받들고 반란을 일으켰다. 소연의 반란군은 동진(東進)하여 제나라의 수도 건강(建康)을 점령하고 소보권을 폐살(廢殺)했다.

소연은 소보융을 제나라의 황제(和帝)로 옹립했다가, 곧이어 선양(禪讓)을 받아 신왕조를 열었다. 서력 502년의 일이었다. 신왕조의 국호는 (梁)이었고, 초대 황제인 소연의 시호(諡; 죽은 후의 이름)는 무제(武帝)였다. 무제를 따랐던 진경지는 주서(主書)가 되어,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었다. 그는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아 나라를 위한 일에서 공적을 세우길 염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사에 의하면 진경지에 대한 기술은 20년 정도 비어져 있는 것이 문제이다. 소설 《분류》에서는 진경지와 무제가 바둑을 두어 5승 2패를 했다는 이야기나, 무제의 형 소의(蕭懿)가 남제의 폭군 소보권에 의해 살해당하는 시기에 진경지가 그 전령으로 이야기했다고 했으나 이러한 삽화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사의 <열전>에는 진경지가 종리의 싸움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써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2.2. 전설의 시작

다시 정사로 돌아와서. 보통(普通) 6년(525) 북위(北魏)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원법승(元法僧)이 팽성(彭城)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원법승은 황제를 칭했으나 북위의 공격을 받자, 양나라에 복속을 요청했다. 진경지는 무위장군(武威將軍)이 되어, 호용아(胡龍牙), 성경준(成景寯) 등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원법승을 응대하기 위해 나섰다. 일을 무사히 마친 후 귀환하여 선맹장군(宣猛將軍)-문덕주사(文德主師)에 임명되었다. 또한 진경지는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장왕(豫章王) 소종(蕭綜)을 서주로 호송했다.

북위는 안풍왕(安豊王) 원연명(元延明), 임회왕(臨淮王) 원욱(元彧) 등을 파견하여 병사 20,000명[3][4]을 이끌고 남하하여, 척구(陟口)에 주둔했다. 원연명은 부장인 구대천(丘大千)을 먼저 파견하여 심량(심량)에 요새를 쌓아 올리게 해 근방에 병위(兵威; 병사들의 위세)를 나타내도록 했다. 진경지는 그 방루(防壘)의 약한 곳을 찾아내고, 재빠르게 공격해 파괴했다. 후에 예장왕 소종이 양나라를 버리고 북위에 귀순하여 양나라군은 총체적으로 붕괴되었지만, 진경지는 관문을 부수어 깨뜨리고는 밤중에 퇴각해 군사를 보전했다.

보통 7년(526), 양나라의 영주자사(郢州刺史)-안서장군(安西將軍) 원수(元樹) 등이 북쪽 길에서 여장(黎漿)을 공격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 하후단(夏侯亶) 등이 남쪽길에서 수양(壽陽)을 공격하자, 진경지는 하후단을 따라 가절(仮節)-총지군사(總知軍事)에 임명되어 수행했다.

북위의 양주자사(揚州刺史) 이헌(李憲)은 그의 아들 장균(長鈞)을 파견하여 2곳의 요새를 쌓아 진경지의 진군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경지가 이를 공격해 격파하자, 이헌은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마침내 항복하여, 진경지는 수양성(壽陽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북위 측의 요새 52개를 항복시키고, 75,000명의 남녀(인구)를 획득했다. 이 공적으로 진경지의 관직은 동궁직합(東宮直閤)으로 옮겨졌고,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대통(大通) 원년(527), 양나라의 영군(領軍) 조중종(曹仲宗)이 와양(渦陽)을 공격하자, 진경지는 그를 따라 나섰다. 이에 대응해 북위는 정남장군(征南將軍)-상산왕(常山王) 원소(元昭)가 이끄는 기병, 보병 합쳐 50,000명[5]의 군세를 이끌고 원군으로 달려와, 전군(前軍)이 타간(駝澗)에 이르니 와양에서 겨우 45리의 거리까지 육박했다. 진경지는 이를 맞아 싸울 것을 생각했다. 그러자 동료인 위방이 말했다.
"적군의 선봉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벌여 이긴다 해도 공적을 세우긴 부족하고, 만약 불리해지기라도 하면 우리군의 기세가 꺾일 수도 있소. 병법(《손자병법》 <군쟁>편)에서 말하는 이일대로[6]의 책략을 취하는 것으로 출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에 대해 진경지는
"북위의 병사는 먼 곳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모두 지치고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오. 전군(全軍)이 집결하지 않은 이때 어떻게든 전군(前軍)의 사기를 꺾어야 하오. 그러자면 그들이 생각치 못한 방법을 써야 하오. 정보에 의하면 그들이 주둔한 곳은 나무가 무성한 곳이니 밤에는 나오지 않을 것이오. 이때 출격한다면 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소. 모두가 만약 의혹을 가지고 있다면 나 진경지 혼자서라도 나가서 싸우겠소."
라고 말했다.

진경지는 휘하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격해, 북위의 전군(前軍)을 격파했다. 이 때문에 북위의 병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진경지는 귀환하여 제장들과 더불어 진영을 옮겨 서진하여 와양 근교의 요새를 점령하고는 북위군과 대치했다. 봄부터 겨울에 이를 때까지 양국 군대 간의 충돌은 수백 회에 달했으나, 양나라군의 사기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북위의 원군은 양나라군의 후방에 요새를 쌓고 있었다. 조중종 등은 배후에 적을 두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후퇴할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진경지는 군문의 깃발을 붙잡고는
"함께 여기까지 온 지 1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금과 병기 대부분을 소모하여 장군들 모두 투쟁심은 사라지고, 모두들 오직 전선의 후퇴 및 축소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공적을 세우는데, 두려워해 움츠러들고 물러나려고만 합니까! 나는 군사를 사지에 두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바로 병사을 규합시키고, 나가서 싸웁시다. 군을 나누고 싶다면 분명히 말하시오. 나는 따로 은밀히 내린 칙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이 같은 건방짐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주상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 조중종은 그 장계(壯計)에 따랐다.

북위의 병력이 13개의 요새를 세워 그것에 의지하고 있자, 진경지는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밤중에 출격해 4개의 요새를 빼앗고는 와양 성주 왕위(王緯)을 항복시켰다. 남은 9개의 요새에는 북위의 병력이 충분히 주둔하고 있었다. 허나 양나라군이 진중에서 북위 포로의 목을 베고, 군의 북소리와 더불어 공격에 나서자 기어코 북위군은 패주하여 제각기 베어죽거나, 사로잡히거나 와양강의 강물의 흐름에 삼켜지면서 전투는 끝나게 되었다. 뒤이어 진경지는 와양성의 남녀 30,000여 명을 항복시켰다.

양무제 소연의 명령에 따라 와양의 땅은 서서주(西徐州)에 편입되었다. 양나라군은 승리에 힘입어 이윽고 성부(城父)에까지 진격했다. 무제는 이를 치하하고 몸소 진경지에게 칙서를 전했다.
"원래 장군의 가문이 아니고, 또 대호(大豪; 대호족)의 태생이 아니어도, 풍운(風雲)을 일으켜 승진할 수 있었다. 심사기략(深思奇略)이 있어 매우 훌륭한 일이다. 곤란을 극복해 끝낼 수 있다. 주문[7]을 열고 빈객을 기다려, 성명(聲名)이 죽간(竹簡)에 드리워져[8] 차후에도 이른다. 너무나 훌륭한 대장부가 아닌가."

2.3. 북벌

대통 초년, 북위의 북해왕 원호선비화한 갈족계 글호족 이주씨(爾朱氏)의 전횡(專橫)에 괴로워한 끝에 스스로 양나라에 망명하여 북위의 황위를 잇기 위해 힘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양무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진경지를 가절(仮節)-표용장군(飇勇將軍)에 임명하여, 원호를 북쪽으로 호송할 것을 명령했다.(대통북벌) 원호는 환수(渙水)에 이르러 위나라 황제(魏帝)의 호(號)를 칭하고, 진경지에게 지절(持節)-진북장군(鎭北將軍)-호군(護軍)-전군대도독(前軍大都督)의 지위를 제수했다. 양나라군은 질현(銍縣)에서 출발해 전진하여 형성(滎城)을 빼앗기 위해 곧 휴양(睢陽)에 이르렀다.

북위의 장군 구대천은 7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9성을 나눠 쌓아 양나라군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경지는 이를 공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3개의 요새를 함락시키고 구대천을 항복시켰다. 뒤이어, 북위의 정동장군(征東將軍)인 제음왕(濟陰王) 원휘업(元暉業)이 우림서자(羽林庶子)군 20,000명을 이끌고 양[9]과 송[10]의 땅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원휘업은 고성(考城)으로 전진하여 주둔했는데, 고성의 사방(四方)은 물길이 있어 지키기 쉽고, 수비는 견고했다. 진경지는 물에 뜨는 방루를 쌓을 것을 명령하고는 이것을 이용해 그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북위군의 원휘업은 생포되었고, 병량을 실은 마차 7,800량을 획득해, 대량(大梁)에 보냈다. 위제 원호는 진경지를 위장군(衛將軍)-서주자사-무도공(武都公)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진경지는 곧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갔다.

북위의 좌복야(左僕射) 양욱(楊昱), 서아왕(西阿王) 원경(元慶), 무군장군(撫軍將軍) 원현공(元顯恭) 등이 어장우림종자서자(御仗羽林宗子庶子)군의 병사를 합쳐 70,000명을 이끌고, 형양에 주둔하여 원호와 진경지의 앞을 막아섰다. 북위의 병사는 정예였고, 성은 또 험준하고 견고해 진경지가 여러번 공격해도 쉽사리 빼앗을 수가 없었다.

북위의 장군 원천목(元天穆)의 대군이 얼마 있지 않아 도착했고, 표기장군(驃騎將軍) 이주조[11]가 거느리는 호기(胡騎) 5,000명, 기병 장수(騎將) 노안(魯安)이 거느린 하주의 보병, 기병(夏州步騎) 9,000명이 선봉으로 파견되어 양욱을 구원하러 왔다. 또 우복사(右僕射) 이주세륭[12]도 파견되어, 서형주자사(西荊州刺史) 왕비(王羆)의 기병 10,000명이 호뢰관(虎牢關)에 주둔했다. 원천목은 이주조 등과 앞뒤로 형양 근교에 도착해 양나라군을 포위하니 그 병력이 무려 300,000명에 달했다. 양, 위 두 나라 군대의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형양은 아직 빼앗지 않아, 양나라군의 병사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진경지는 말의 안장을 풀고는 여물을 먹이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성을 빼앗고 땅을 얻어, 수입이 적지 않다. 그대들은 위나라 사람의 부모•형제를 죽이고, 위나라 사람의 자녀를 약탈해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다. 원천목의 군사는 모두 이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과 7,000명이며, 적병은 300,000명에 이른다.[13] 오늘 벌어질 일에 따라 생기는 길은 우리의 생존을 도모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민족의 기병과 평원에서 싸울 힘이 없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반드시 눈앞의 성루(형양성)을 빼앗을 필요가 있다. 그대들에게는 망설이고 있을 짬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든 스스로 사지로 들어가야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경지는 양나라 북벌군의 전 병력을 성을 공격하는 데 투입하여 동양(東陽)의 송경휴(宋景休), 의흥(義興)의 어천민(魚天愍)이란 장사가 성벽을 먼저 올라 뛰어넘어 성안으로 쳐들어가자 기어코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양욱을 사로잡았다. 곧이어 원천목이 이끄는 북위의 대군이 성을 포위했으나 진경지는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성을 베개삼아 맞서싸워 이들을 크게 격파했다.

노안은 진지 가까이에서 항복을 요청했고, 원천목과 이주조는 단신으로 도망쳤다. 형양에 있었던 북위군의 비축물을 접수하자 소, 말, 곡식과 옷 등이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경지가 호뢰관으로 진군하자, 이주세륭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다.

북위의 제10대 경종 효장제 원자유(元子攸)는 공황에 빠져 병주(幷州)로 도망쳤다. 임회왕 원욱, 안풍왕 원연명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부고(府庫)를 봉한 뒤 법가(法駕)를 정비하여 참칭 황제 원호를 맞이하고는 낙양궁 어전전(御前殿)으로 모셨다.

원호는 개원(改元)하고 대사면을 시행했다. 그는 진경지를 시중(侍中),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하고 10,000호의 식읍을 증봉했다.

한편, 북위의 대장군 상당왕 원천목과 왕노생(王老生), 이숙인(李叔仁) 등은 4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대량(大梁)을 공격해 함락하고는 왕노생과 비목(費穆)에게 병사 20,000명을 나눠주어 호뢰관을 점거하도록 했다.

그들은 양, 송 2주(州)에 들어왔으나, 진경지가 기습을 가하자 모두 항복했다. 이때 원천목과 10여 기의 병사들만이 북쪽으로 도망쳤다. 양무제 소연은 몸소 칙서를 하사하여 진경지를 칭찬했다.

진경지의 휘하 병사들은 모두 하얀 옷으로(白袍) 치장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가는 곳마다 항복하거나 따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낙양에서 이런 동요까지 불려지게 되었다.
"이름난 사령관이나 대장이(名師大將) 굳게 지키더라도, 천병만마(千兵萬馬)의 대군이 있더라도 백포(진경지의 부대)를 피하라."[14]

진경지가 치현에서 출발하여 수도 낙양에 이르기까지 140일 동안 32개 성을 함락시키고, 47회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그를 막을 적이 없었다고 한다.

2.4. 북벌의 실패

북위의 효장제 원자유가 단신으로 도주했기 때문에 황궁의 시위(侍衛)와 빈(嬪)은 그대로 낙양에 남겨져 있었다. 이것을 얻은 원호는 주색에 빠져 밤낮으로 연회를 열었고, 또한 정무를 게을리 했기 때문에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실망했다. 또한 안풍왕, 임회왕들과 더불어 간계를 세우고 지금까지의 양나라로부터 입은 은혜를 배신하면서 빈공(賓貢)의 예도 끊었다. 정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에, 진경지의 힘을 이용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험담을 하고 몰래 의심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진경지가 이끌고 온 남부 지방의 양나라 군대도 낙양에서 포악하게 굴어 북위의 어지러운 정치에 실망하고, 육진의 난으로 시달리며, 이주영의 횡포에 두려워해 내심 양나라의 통치를 기대했던 낙양의 주민들이 실망감을 느꼈다.

진경지는 윈호의 생각을 알아채고는 다음과 같은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원호에게 설명했다.
"지금은 멀리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굴복하지 않는 세력이 아직도 많습니다. 만약 적이 우리군의 병사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윽고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이 알려지기 전에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폐하(양무제 소연)에게 알려서 정예병력을 요청하십시오. 여러 주(州)를 누르기 위해서도 남인(南人; 남조 양나라를 말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 멀리 보내버리셔야 합니다.
원호는 그 말에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원정명이 원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진경지는 병력의 수가 수천 명밖에 되지 않지만 벌써 억제하는것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제와서 그 군사를 늘리게 되면, 이번엔 우리를 위해 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권세는 떠나보내고 위(북위)의 종묘사직(宗廟社職)은 여기서 끝날 것입니다."
원호는 그 때문에 진경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후부터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원호는 진경지가 병력을 늘리는 것을 우려하면서 조용히 양무제에게 상표했다.
"하북과 하남은 한 번만에 수중에 모두 들어왔고, 다만 이주영이 발호할 뿐입니다. 이것은 저와 진경지의 힘으로 무찔러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 주와 군(郡)이 새로 굴복했기에 아직까지도 안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들을 동요시키지 않기 위해 지금은 병력을 증원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때문에 양무제는 조서(詔書)를 보내 양나라군의 병력을 모두 국경에서 멈추게 했다. 낙양성 아래의 남인은 10,000명을 넘어섰으나 이민족은 그 10배에 달했다. 양나라군의 부장인 마불염(馬佛念)이 진경지에게 말했다.
"공적이 높아진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군의 주인이 된 몸으로서 위험이 다가오고,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장군께서는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위험한 땅을 도와 어려운 일을 바로잡은 사람도 무사히 일을 끝내고 환영을 받은 예는 아주 적습니다. 지금 장군의 위세는 중원을 흔들고 명성은 하새(河塞; 변방을 말함)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윈호를 살해하고 낙양을 점령한다면 이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경지는 그 자립의 권유에 따르지 않았다.

이전에 원호가 진경지를 서주자사에 임명했기 때문에 진경지는 임지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부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호는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파견하지 않았다.
"주상(主上; 양무제 소연을 말함)은 낙양 땅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주었소. 이제와서 낙양의 조정(朝廷)을 버리고 팽성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대는 부귀를 얻겠지만, 국가의 대계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오."
이런 말을 했기 때문에 진경지는 다시는 이 말을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

북위의 천주장군(天柱將軍) 이주영, 우복야 이주세륭, 대도독 원천목, 표기장군 이주조, 영(榮)주의 장사(長史) 고환(高歡) 및 선비족, 말갈족 등 100만 명을 호칭하는 대군세가 효장제를 옹립하고 원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호가 낙양에 거주한 지 65일. 그동안 얻었던 성의 대부분이 순식간에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갔다. 진경지는 강을 건너 북중랑성(北中郞城)을 지키며 3일 동안 11번의 전투를 벌이면서 북위군의 병력을 격파했다. 그 때문에 이주영이 후퇴했다.

이때 유영조(劉靈助)라는 천문을 볼 줄 아는 이가 이주영에게 말했다.
"10일에 출발하신다면 하남을 모두 얻으실 수 있습니다."
이주영은 나무를 묶고 다리를 만들어 협석(硤石)을 통해 강을 건넌 후 하교(河橋)에서 원호와 싸웠다. 원호는 대패하여 패주하다가 임영(臨潁)에 이르러 적을 맞나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북위군이 낙양을 탈환했다.

진경지는 기병, 보병을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을 정비하여 동쪽으로 이동했으나 이주영의 추격을 받다가 숭고산(嵩高山)에서 홍수를 만나 양나라의 북벌군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15] 진경지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승려를 가장하여 지름길을 통해 예주(豫州)에 이르러 예주 사람 정도옹(程道雍)에게 도움을 받아 여음(汝陰)까지 갈 수 있었다.

수도 건강에 간신히 귀환한 진경지는 북벌의 공을 인정받아 우위장군(右衛將軍)에 임명되었고, 영흥현후(永興縣侯)에 봉해졌으며, 식읍 1,500호를 하사받았다.[16]

2.5. 말년

진경지는 다시 전선에 나갔고, 지절(持節)-도독연회제군사(都督緣淮諸軍事)-분무장군(奮武將軍)-북연주자사(北兗州刺史)를 겸임했다. 그때 승려 강(强)이란 인물이 황제를 자칭하고, 또한 토호(土豪) 채백용(蔡伯龍; 혹은 채백총이라 불리기도 한다.)이란 사람이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승려 강은 환술에 밝아 민중을 선동하길 잘하여 민중 30,000명을 모아서 북서주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제음태수(濟陰太守) 양기문(楊起文)이 성을 버리고 패주했으며, 종리태수(鐘離太守) 단희보(單希寶)가 살해당하기에 이르자, 양무제는 진경지에게 이 반란군을 토벌할 것을 명령했다.

무제는 스스로 거마에 오를 때 진경지에게 말했다.
"강회(江淮)의 병사는 강(强)해서 그 예봉(銳鋒)은 맞서기가 어렵다. 경(卿;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은 책략을 이용해 그들을 제압해야 하므로 당연히 쓸데없이 결전해서는 안 된다."
진경지는 황명을 받들고 전장에 나섰다. 12일이 지나기도 전에 채백용과 승려 강을 죽이고는 그 머리를 갖고 돌아왔다.

중대통 2년(530) 진경지는 도독 남북 사서예예 사주제군사(都督 南北 司西豫豫 四州諸軍事)-남북사이주자사(南北司二州刺史)에 임명되어 임지에 이르러 현성을 지켰다. 북위의 영주자사(潁州刺史) 누기(누起)를 공격해 양주자사(揚州刺史) 시전보(是傳寶)를 진수(溱水)에서 격파하고, 행태(行台) 손승(孫勝), 대도독 후진(後進), 예주자사 요웅(堯雄),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공(司馬恭) 등을 초성(楚城)에서 무찔렀다.

또한 의양진(義陽眞)의 병사를 격파하고, 수•륙의 교통을 끊음으로써, 강호(江湖)의 여러 주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17] 새로이 밭 6,000경(頃)을 개간했기에 2년 후에 창고가 가득해졌다. 양무제는 여러 번 이 공로를 치하했다. 또한 남사주(南司州)에 안육군(安陸郡)을 부활시키고, 상명군(上明郡)을 설치했다.

대동 2년(536) 동위(東魏)는 선비화한 갈족 장수 후경(侯景)이 이끄는 병사 70,000명을 파견하여 양나라의 초주(楚州)를 공격하고 자사인 환화(桓和)를 사로잡았다. 그후 후경은 회상(淮上)으로 진격하여 진경지에게 서찰을 보내 항복을 촉구했다. 진경지는 무제의 칙명에 따라 상담후(湘潭侯)로 퇴각한 후 우위(右衛) 하후기(夏侯虁) 등의 원군과 가세하여, 군이 여장에 이르자 후경을 격파했다. 이 시기 큰 추위의 눈 속에서 후경은 수송대(치중)를 버린채 패주했고, 진경지는 동위군이 남긴 물자를 거두어 귀환했다.

이 공으로 인해 진경지는 인위장군(仁威將軍)이란 직함으로 승진했다. 그해 예주에서 기아가 발생했으나, 진경지가 관창(官倉)을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어 많은 백성들을 구했다. 주민 이승(李昇) 등 800명이 표(表)를 올려 수비(樹碑)에 그 공덕을 새겨 기념하기를 요청했기에 무제가 이것을 승낙했다.

대동 5년(539) 10월에 진경지가 죽었는데 향년 56세였다. 조정으로부터 산기상시(散騎常侍), 좌위장군(左衛將軍)의 관직을 추증받았으며, 시호는 무(武)였다. 칙명으로 인해 진경지의 고향인 요흥군에서 상(喪)을 발표했다.

진경지는 성격이 신중하고, 매번 명령을 받을 때마다 먼저 목욕재계한 후 받았다. 생활은 검소했고, 사치스런 의복은 입지 않았으며, 그저 흰 옷을 입었을 뿐이었다. 또한 관현음악 등을 좋아하지 않았다.[18] 무장이면서 활쏘기에 뛰어나지 않았고, 말타는 것도 익숙치 않았다.[19] 그러나 그는 군사를 잘 돌보아 병사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였다. 장자 소(昭)가 진경지의 뒤를 계승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진경지의 출신이 매우 미천했다는 것이다. 문벌을 중시하는 남조 양나라에서 그같은 출신으로 고관에 오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양나라 역사상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그와 (관직이 운기장군-안주자사에 이른) 유약 둘 뿐이었다.
진경지는 장략(將略)이 있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얻었다. 생각건대 춘추시대 염파(廉頗), 이목(李牧), 전한시대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진경지는 깨달음이 빠르고 젊을 적부터 무제를 시종했다. 원한다면 옛 은혜에 따라 관직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공손하고 태도를 삼가, 매미의 관(冠)을 쓰고, 실에 꼬아만든 옥(玉)을 내려(말하자면 현직 고관에 올라), 일세의 영광을 얻었다.
양서》(梁書)
진경지는 처음 제비와 공작의 무리에서 놀았으나, 마침내 홍곡(鴻鵠; 큰기러기와 고니. 즉 군주의 의중)의 뜻을 알아, 혼자서 대임을 맡게 되어, 길고 긴 원정을 통해 이수(伊水; 하남성 서부의 강), 낙양에 이르렀다. 전진하며 적의 저항을 없애고, 공격한 적의 견고한 성은 모두 빼앗았다. 남풍이 다투지 않았다고는 해도(남쪽 나라의 세력이 약하다고 하지만) 마침내 뒤집을 수 있었다. 진경지의 전승(戰勝)은 그 칭송함에 있어 충분한 것이다.
남사》(南史)

3. 기타

그의 군대가 벌인 활약상은 고사성어 천군만마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천병만마(千兵萬馬)라고도 하는데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는 썩 많은 군사와 말(馬)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사용례와 달리 이 말은 이런 군사가 있어도 진경지에겐 안 된다는 의미로 나왔던 말이었다. 그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북위에서는
"이름난 대장(名師大將)들아, 천군만마가 있어도 백포(白袍)하곤 맞짱뜨는 거 아니다"
라는 동요가 돌았다고 하는데, '백포'란 진경지와 그의 군대를 뜻하는 말로 그와 그의 부대가 출전할 때마다 흰 두루마기 천을 둘렀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4. 대중문화

다나카 요시키소설은하영웅전설》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양 웬리의 모델이 진경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지만,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양 웬리의 모델은 특별히 없다고 말했고 본인은 진경지의 존재를 몰라 알고 난 뒤 놀랐다고 한다. 다나카 요시키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분류》라는 소설을 내기도 했다.

파일:external/farm5.static.flickr.com/4801624242_1cdf27ccfc_z.jpg

삼국지 시리즈》에서 등장. 통솔력과 지력이 90대인 총사령관이다. 그러나 두예처럼 승마와 궁술에 능한 편이 아니라서 무력이 엄청나게 낮다. 운전 못 한다고 싸움도 못 한다고 보는 건...[20] 사실 일본에서도 그다지 잘 알려진 장수는 아니었지만 《은하영웅전설》의 양 웬리의 모델이 아니냐는 썰이 돌면서 인지도가 높아졌다.

활용도는 해당 작품의 전투 시스템에 따라 다르다.

<삼국지 10>처럼 전법 같은 거 없고 통솔이 부대공방을 좌우하는 시스템이 전투에 한정하면 가장 좋고, 삼국지 9처럼 부대공방은 통솔을 따르되 병법의 위력이 무력에 따라 좌우되는 시스템이 그 다음,[21] <삼국지 11>처럼 부대 공방이 무력을 따라가는 시스템이 최악이다. 보기궁 중에 기마 적성이 제일 높게 책정되는데 무력이 낮아서 11같은 시스템에선 쓸 길이 없다. [22]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96/무력 25/지력 91/정치력 70. 병법으로 돌격, 주사, 연사, 조영,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다. 제갈량, 두예처럼 통솔과 지력이 높고 무력이 낮은 사령관으로 가진 병법들이 비교적으로 좋지만 보다시피 무력 때문에 계륵이다. 통솔을 살려 주장을 맡되 배치는 뒷렬로 해서 혼란을 쓰거나 아니면 다른 무장들에게 돌격, 주사, 연사를 가르치는 게 이득이다. 사실 완전체가 아닐 뿐이지 충분히 좋은 무장이다. <삼국지 9>는 부족한 무장 여럿이 합쳐 서로의 단점을 메워주는 시스템인데 통솔과 지력이 모두 높은 진경지는 허저나 전위처럼 무력은 최상급이지만 통솔이 낮은 무장들과의 시너지가 정말 좋다. 무력이 낮다는 것도 큰 문제라고 볼 수 없는 게, 어차피 제대로 된 싸움을 할려면 순수하게 공격계 병법으로 도배하기보다는 부대 중에 브레인 한 명 쯤은 넣어줘야 하기 때문에 지력과 통솔이 높은 진경지는 부대장과 브레인의 역할을 겸할 수 있으며, 대신에 어태커 한 명을 더 넣는 것으로 해결이 된다. 게다가 혼란도 쓸 수 있는데 이게 성공하면 다른 무장들이 병법을 발동하는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삼국지 10>에서는 등봉된 스페셜 시디의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96/무력 7/지력 90/정치력 74/매력 80, 특기가 16개이다. <삼국지 10>에서 무력은 일기토, 성벽 보수, 부대 행동력에만 영향을 미치고 부대 공방은 통솔을 따라가기에 진경지가 전투에서 활약하기 가장 좋은 시스템이다. 다만 무력이 전작인 <삼국지 9>때보다 더욱 낮아져 7밖에 안 되는데 하필 명사 특기가 없어 설전을 못하기 때문에 반론, 반박이 있음에도 도적에게 돈을 갈취당한다. 퀘스트 수행과 전투로 최대한 빨리 명성을 쌓아서 명사 특기를 획득해야 한다.

<삼국지 11>에도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91/무력 6/지력 90/정치력 71/매력 80. 병과 적성은 기병만 S에 노병과 수군이 A. 특기는 백마이고 무력은 딸랑 6. 문제는 이놈의 <삼국지 11>이 전작들과 달리 부대 공격력이 무력으로 결정된다. 특기인 백마는 무력에 따라 효율이 좌우되는 특기라 진경지의 주장으로서의 활용도가 너무도 낮기 때문에 사실상 진경지는 문관이라 봐야 한다. 통솔력이랑 지력은 90대로 좋으니 무력 센 무장이랑 의형제로 엮어 쓰면 괜찮다. 의형제가 아니더라도 진경지의 지력이 높아 기병의 지력보조용 무장 겸 백마 특기 활용으로 쓸 만하다.

파일:The Legend of Cao Cao Chen Qingzhi.png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무목악왕의 패라는 계보의 미등장 데이터로 남았다. 병과는 도독. 능력치는 무력 25, 지력 87, 통솔 94, 민첩 67, 행운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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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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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에서는 이 그림이 몽골군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 갑옷과 투구 양식이 북방의 몽골군의 것과는 다르다.[2] 지금의 난징[3]남사》(南史)에서는 병사 100,000명의 대군이었다고 했다.[4] 사마광은 《남사》의 병력수가 과장되었다고 여겨 《자치통감》에서는 《양서》의 기록을 따랐다.[5] 《양서》 <진경지전>에는 150,000명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양서》 <위방전>, 《남사》 <위방전>에서는 50,000명이라 기술하고 있고, 《남사》 <진경지전>에서는 병력수를 기록하지 않았다. 《자치통감》도 50,000명이라고 하고 있다.[6] 以佚待勞, 아군의 피로를 줄이고, 적의 피로를 기다린다.[7] 朱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집의 문을 붉은색으로 칠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8] 즉 고관에 올라 명성이 울려 퍼진다.[9] 梁; 하남성의 지명으로 왕조명이 아니다.[10] 宋; 이것도 왕조명이 아니다.[11] 爾朱兆, 권신 이주영의 조카였다.[12] 爾朱世隆, 권신 이주영의 사촌동생이었다.[13] 당시 북위는 내부 반란인 육진의 난에 시달려 혼란스러웠기에 300,000명이나 되는 군세를 모을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나, 진경지 휘하의 양나라군의 수가 10,000명을 넘지 않았음은 《양서》, 《남사》 뿐만이 아니라 《위서》, 《북사》의 <헌문육왕전>에도 보이는 것이다. 어쨌거나 진경지의 양나라 군대가 소수였음은 분명해 보인다.[14] 이 동요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천군만마였다.[15] 그러나 진경지의 북벌군이 홍수를 만나 격파되었다는 기록은 의심스럽다. 《낙양가람기》에 따르면 원호가 거느리던 강회의 자제 5,000명이 모두 사로잡혀 양나라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위서》 <도이소연전>에 따르면 진경지만 홀로 도주하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잡혔다고 되어 있다.[16] 여담으로 이때 진경지의 북벌로 인해 북위가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과장된 주장이다. 북위는 내부의 반란과 권력다툼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와중에 진경지의 공세를 받은 것이었다. (진경지의 북벌도 한 원인이겠지만) 북위는 호태후와 제9대 숙종 효명제 간의 암투 및 육진의 난을 시작으로, 이주영이 제10대 경종 효장제를 세우고 고환과 우문태가 자기들끼리 황제를 옹립해서 동•서위로 찢어지고 아들들이 양위받아서 멸망했으니 실제 북위의 멸망은 육진의 난과 동•서위의 분열 탓이 더 컸다.[17] 이는 북위의 남조 침략을 위한 교두보가 파괴당했기에 북위가 한동안 침략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18] 당시 음악을 즐길 때 꽤 비용이 들었던 것 같다[19] 무장의 기본 소양인 활쏘기와 말타기가 안 된다는 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20] 빈한(貧寒)한 집안 출신이라, 돈이 많이 드는 승마술을 익힐 여건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이런 핸디캡이 있는데도, 정권 주류 인사이자 황족인 소연(蕭衍)의 근위무사가 될 정도면, 뭔가 만회할만한 특기 및 실력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21] 다만 장수제인 <삼국지 10>인 퀘스트나 수련, 임무수행 등으로 대륙을 돌아다니며 개인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명사특기가 없고 무력이 낮아 여기서 애를 먹는다. 그리고 <삼국지 10>은 통솔이 부대공방을 좌우한다는 그 특징 때문에 전위, 허저처럼 무력은 최상위권인데 통솔이 낮은 장수들은 설길이 없다. 진경지 개인이 아닌 전체적인 활용도만 따진다면 진경지가 부대통솔, 무력 높은 장수들이 전방에서 뎀딜을 넣는 <삼국지 9> 시스템이 가장 이상적이다.[22] 그나마 11편은 의형제 버프로 해결할 수가 있기에 사마가, 호거아, 주창, 왕쌍 등의 무력돼지 타입인 장수를 의형제로 붙여 놓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