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蕭勃(? ~ 557년)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종실로 소병의 아들.
2. 생애
소발은 처음 정주(定州) 자사로 벼슬을 시작했고 곡강향후(曲江鄕侯)에 봉해졌다. 소발은 양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분을 토벌할 때 종군한 적이 있었다.양나라는 548년부터 후경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549년, 광주(廣州) 자사 원경중이 장차 후경에게 호응하려고 하자 서강독호(西江督護) 진패선은 원경중을 토벌하고 소발을 자사로 맞아들였다. 뒤에 난유(蘭裕)와 난경례(蘭京禮)가 시흥군(始興郡)을 비롯한 10개의 군에 반란을 선동하여 임하내사(臨賀內史) 구양위를 공격하자, 구양위는 소발에게 구원을 청했고 소발은 진패선에게 구양위의 구원을 명했다.
진패선은 다시 근왕병으로 출정하고자 두승명과 호영을 영상(嶺上)에 주둔시키고 시흥군의 호걸들에게 후한 선물을 줘서 그들과 결탁했다. 소발은 진패선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종휴열(鍾休悅)을 진패선에게 보냈다. 이때 종휴열은 진패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후경은 용맹하고 위력과 무력이 있는데다 천하무적이오. 이전에는 원군이 10만이나 되었고 군대가 매우 강했지만 후경의 기세를 감히 당해내지 못해서 결국 오랑캐가 뜻을 이루게 하고 말았소. 그대는 이렇게 적은 부대로 장차 어떻게 하려는 것이오? 듣기로는 영북(嶺北)의 왕후들도 모두 서로 다투고 있고, 하동왕(河東王)과 계양왕(桂陽王)이 잇달아 학살을 자행하고 있고, 소릉왕(邵陵王)과 개건후(開建侯)는 직접 창을 겨누고 있고, 이천사(李遷仕)는 당양(當陽)에 의탁하여 곧바로 말과 무기를 빼앗았소. 그대는 황제와 성이 다른데 어떻게 암암리에 투신할 수 있겠소? 차라리 시흥군에 머물면서 멀리서 성세를 펼치고 태산을 지키며 스스로 더 큰 행복을 찾는 것이 낫소.
그러자 진패선은 눈물을 흘리며 종휴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본래 평범하고 허약하지만 나라로부터 길러졌소. 이전에 후경이 장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구원하려고 했지만 원경중과 난유 형제 등이 나를 중간에 막았소. 지금은 수도가 함락되고 주상께서 몽진하시어 임금이 치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었는데, 누가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겠소! 군후의 신분은 바로 황족으로 책임이 산처럼 막중하지만, 만리를 나아가 적의 기세를 꺾어서 원한을 갚지 못하고 군대를 보내는 것을 보더라도 오히려 현명하다고 칭찬해야지 그런 뜻을 전하다니 개탄스럽소. 나는 떠날 뜻을 정했으니 군후에게 대신 전해주시오!
진패선은 종휴열을 돌려보낸 뒤 강릉에 있는 상동왕 소역에게 사신을 보내 그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채노양(蔡路養)이 거병해서 남강(南康)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소발은 심복인 담세원(譚世遠)을 채노양에게 보내 그를 곡강현령(曲江縣令)으로 삼고 채노양과 결탁하여 진패선의 길을 막으려고 했다.
550년, 소발은 상동왕(湘東王) 소역에 의해 광주 자사로 임명되고 영남(嶺南)에 진수하였다. 552년, 반란을 일으킨 형주(衡州) 자사 왕회명(王懷明)을 토벌하였다.
554년, 왕림이 소발을 대신하여 광주로 부임하면서 소발은 진주(晉州) 자사로 부임하였다. 서위가 강릉을 함락한 뒤 소발은 다시 광주를 점령하였다.
555년, 진안왕 소방지가 양왕에 오른 뒤 소발은 사도(司徒)가 더해졌다. 같은 해, 소방지가 제위에 오른 뒤 태위(太尉)로 임명되었다.
556년, 태보(太保),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되었다.
557년, 소발은 광주에서 거병하여 구양위, 부태(傅泰), 조카 소자(蕭孜)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남강주(南江州) 자사 여효경(余孝頃)이 군대를 이끌고 소발의 거병에 호응하였다. 진패선은 후안도와 주문육에게 군사들을 주어서 소발을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소발은 소자에게 여효경과 합류하도록 명했고, 구양위에게는 고죽난(苦竹灘)을 수비하도록 명했으며, 부태에게는 척구성(蹠口城)의 점령을 명했다. 그러나 주문육은 주철호와 육산재를 파견하여 구양위를 습격해 사로잡았고 뒤에 부태와 소자도 주문육에게 사로잡혔다. 소발은 남강에서 소식을 접하면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고 결국 덕주(德州) 자사 진법무(陳法武)와 담세원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소발이 죽은 뒤 담세원은 항복하려고 했지만 소발의 부하였던 난애(蘭敱)가 담세원을 살해했고, 난애는 다시 담세원의 부하였던 하후명철(夏侯明徹)에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