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0080><colcolor=#fff> 孟龍符 맹용부 | |
작호 | 평창현오등자(平昌縣五等子) → 임원현남(臨沅縣男) |
성 | 맹(孟) |
이름 | 용부(龍符) |
생몰 | 387년 ~ 409년[1] |
본관 | 평창군(平昌郡) 안구현(安丘縣) |
부친 | 맹작(孟綽) |
국적 | 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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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장수로 맹회옥의 동생이다.2. 생애
맹용부의 집안은 평창군(平昌郡) 안구현(安丘縣) 출신이지만 영가의 난 이후에는 대대로 경구(京口)에 살았다. 맹용부는 용맹과감했고 담력이 있었으며, 협객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해서 고향에서 협객들을 많이 사귀었다.유유가 환현의 반란을 평정할 때 맹용부의 용맹함에 대해 듣고 맹용부를 건무부 참군으로 삼았다. 맹용부는 유유의 휘하에서 활약하여 강승(江乘), 나락(羅落), 복주(覆舟)에서 승전하였다. 환현이 평정된 뒤 진군부 참군으로 임명되고 평창현오등자(平昌縣五等子)에 봉해졌으며, 영원장군(寧遠將軍), 회릉태수가 더해졌다. 맹용부는 이후 유번(劉藩), 상정와 함께 환흠(桓歆), 환석강, 환석수를 정벌하여 물리쳤고 건위장군(建威將軍), 동해태수로 제수되었다.
한편 북청주자사 유해(劉骸)가 모반하여 북위를 끌어들이고 청하양평2군 태수 손전(孫全)이 여기에 호응했다. 북위에서 색도진(索度眞)과 곡사란(斛斯蘭)이 출병하여 서주로 침공하고 팽성을 포위하자, 맹용부는 유도린과 함께 북위군에 포위된 양목지(羊穆之)를 구원하고자 출병했다. 유도린이 능책(陵柵)에서 손전을 물리친 뒤 맹용부는 유도린과 함께 팽성으로 진군하여 양목지를 구출했으며, 승승장구하며 북위군을 추격하여 색도진과 곡사란은 상성(相城)으로 달아났고 유해는 광수구(光水溝)에서 참살되었다.
409년, 유유가 남연을 정벌할 때 맹용부도 휘하에서 남연으로 출병하여 참군으로 임명되고 용양장군(龍驤將軍), 광천태수가 더해진 뒤 보병과 기병을 거느려 선봉이 되었다. 임구성(臨朐城) 바깥에 도착한 맹용부는 남연군과 중요한 수원인 거멸수(巨蔑水)를 놓고 공방을 벌이게 되었다. 남연에서 공손오루(公孫五樓)를 파견하자, 맹용부는 재빨리 거멸수로 진군하고 단독으로 나서서 공손오루를 물리쳐 거멸수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맹용부는 승세를 몰아 남연군을 추격했는데, 뒤를 따르는 기병들이 맹용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진군하다가 결국 남연군에게 포위되었다. 맹용부는 단독으로 전투를 벌여 여러 명을 죽였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힘이 다해서 전사했다. 맹용부의 시신은 유종이 수습했으며, 유유는 맹용부의 죽음을 슬퍼하여 맹용부를 청주자사로 추증하였다.
뒤에 유유가 다시 표문을 올려 맹용부는 임원현남(臨沅縣男)으로 추봉되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맹용부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서 맹용부의 아우 맹선객(孟仙客)이 아들인 맹미생(孟微生)을 맹용부의 후사로 삼았다. 맹미생은 유송 원가(元嘉) 연간에 죄를 저질러 작위가 삭탈되고 광주(廣州)로 유배되었으며, 맹미생의 조카이자 맹언조(孟彦祖)의 아들 맹불호(孟佛護)가 작위를 대신 이었다. 소도성의 선양 이후 국이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