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13:00:41

모안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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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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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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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毛安之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중조(仲祖)이다.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출신. 정로장군 모보의 아들이자, 중군장군 모목지의 동생.

2. 생애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처럼 무인의 기질이 있어, 여러 번 승진해 무군대장군 회계왕 사마욱 아래에서 참군을 지내다가 위군태수로 옮겨졌다. 이후 대사마 환온의 농간으로 사마혁이 해서공으로 유폐되고 회계왕 사마욱이 황제에 즉위하자, 모안지는 간문제 사마욱의 심복으로서 그의 어가를 호위하며 궁중에서 숙직했다. 간문제는 그를 유격장군으로 삼았다.

함안 2년(372년) 6월, 환온에 의해 면직당한 전 서연2주자사 유희(庾希)가 앙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야밤에 경구(京口)를 침입했다. 진릉태수 변탐(卞眈)이 성벽을 넘어서 곡아(曲阿)로 달아나니, 유희는 해서공 사마혁의 밀명을 사칭하여 무리를 선동했다. 이에 환온은 동해내사 주소손(周少孫)을 보내 유희를 토벌하게 하는 한편, 모안지에게 수도 건강(建康)의 수비병을 감독해 수비를 강화할 것을 명했다.

함안 2년(372년) 11월, 요사스러운 도사 노송(盧悚)과 그 추종자 300여 명이 건강성 북문과 황궁 정문을 뚫어버리고, 무기고에서 갑옷과 병기를 탈취했다. 황궁 병사와 신하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이때 보고를 받고 온 모안지가 군대를 이끌고 노송의 무리를 쳤다. 좌위장군 은강(殷康), 중령군 환비도 뒤늦게 합류하여 모안지를 도왔고, 노송을 포함한 무리 대부분은 이내 몰살당했다.

영강 원년(373년) 2월, 고숙(姑孰)에 머물고 있던 환온이 입조해 노송의 황궁 침입 사건을 처리하였다. 환온 제일 먼저 도착한 모안지만 우위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은강, 환비를 포함한 나머지 관련 인물들은 모두 징계를 내렸다.

태원 4년(379년) 5월, 전진의 후장군 구난(句難), 우장군 모당 등이 동진을 침공해오자, 모안지는 군사 40,000명을 거느리고 당읍(堂邑)에 주둔했다. 그러나 모당이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기습을 가하니, 모안지의 군대는 크게 놀라 패주하였다.

태원 4년(379년) 9월, 효무정왕후 왕법혜가 붕어하자, 모안지는 영장작대장(領將作大匠)에 임명되어 융평릉(隆平陵) 건축 임무를 맡았다.

재직 중 세상을 떠나고 장남 모담(毛潭)이 후사를 이었다. 사후 광록훈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