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3:44:06

여노자

이름 여노(如孥)
여노자(如奴子)
생년 미상
몰년 미상
국가 고구려
1. 개요2. 생애3. 기록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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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무장. 미천왕 시기에 활동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여노(如孥), 자치통감에서는 여노자(如奴子)로 기록되어 있다. 봉상왕 대에 활동한 고노자가 같은 이름을 가진 점으로 보아 여노(如孥)는 여노자가 축약된 표기일 가능성이 있다.

2. 생애

319년 12월 모용선비는 극성 전투에서 고구려, 단부, 우문부 연합군을 분열시키고 우문부를 격파한 후 최비가 점유하고 있던 요동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모용외장통을 보내 하성(河城)[1]에 주둔하던 여노자를 공격했고, 그를 포함한 1천여 가(家)를 포로로 잡고 극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3. 기록

20년(319) 겨울 12월에 진(晉)의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처음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와 단씨(段氏), 우문씨(宇文氏)에게 말하여 함께 모용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세 나라가 나아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였다. 두 나라[고구려와 단부]는 우문씨가 모용외와 모의가 있다고 의심하고 각기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말하기를,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지만 나는 홀로 이를 빼앗겠다.”라고 하였다. 모용외는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에게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그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자신만 겨우 도망하였다.
최비가 이를 듣고 그 형의 아들 최도(崔燾)로 하여금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서 자복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라 하고, 병력을 이끌고 그를 따라갔다.
최비는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쳐오고, 그 무리는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아들 모용인(慕容仁)을 요동에 진수(鎭戍)하게 하니註 017 관부(官府)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평온해졌다.
우리의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1천여 가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이 자주 병력을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慕容仁)을 보내 이를 쳤다. 왕이 화해[盟]를 청하니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美川王)
高句麗將如奴子據于河城, 廆遣將軍張統掩擊, 擒之, 俘其衆千餘家, 以崔燾·高瞻·韓恆·石琮歸于棘城, 待以客禮.
고구려 장수 여노자(如奴子)가 우하성(于河城)에 웅거했는데, 모용외[廆]가 장군 장통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1천여 가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이에 최도·고첨·한항·석종은 극성으로 돌아가 예의를 갖추었다.
자치통감 資治通鑑 卷九十一 晉紀十三 中宗元皇帝中

4. 기타

여노자의 패배 이후에도 미천왕은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했지만 모용외가 파견한 모용한, 모용인에게 막혀서 요동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1] 자치통감은 우하성(于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