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3:10:18

부황미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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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전진의 반역자
苻黃眉 | 부황미
시호 없음
작위 광평왕(廣平王)
(苻)
황미(黃眉)
불명
생몰 ? ~ 357년 5월
출신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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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황족. 태조 혜무황제 부홍의 손자. 고조 경명제 부건의 조카(형의 아들). 기량이 비범하여 재주가 많았고, 대단히 용맹한데다 기묘한 책략이 많았다고 한다.

2. 생애

황시 원년(351년) 정월, 부건이 스스로 천왕, 대선우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정하면서 전진을 건국하였다. 부황미는 보국장군에 임명되어 낙양(洛陽)을 진수하였다.

황시 3년(353년) 7월, 경명제 부건은 사공 장우(張遇)의 계모를 취해 후궁으로 들이고, 종종 장우를 가리켜 자신의 양자라 칭하였다. 장우가 이를 수치로 여겨 내심 불만을 품고 관중(關中)의 호족들과 몰래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자, 부황미는 낙양에서 서쪽으로 도망쳤다. 이후 경명제 부건에 의해 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수광 원년(355년) 8월, 경명제 부건이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황제 부생은 그가 태자로 책봉되기 이전 회남왕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부황미를 광평왕(廣平王)으로 봉하고, 전장군 부비(苻飛)를 신흥왕(新興王)에 봉하였다.

수광 2년(356년) 5월, 황태후의 동생인 좌광록대부 강평이 황제 부생에게 백성을 보살피고 형벌을 느슨하게 할 것을 간했다가 정수리가 뚫려 살해당했다. 부황미는 신흥왕 부비, 건절장군 등강과 함께 황제 부생에게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제 부생은 그들의 용맹을 아꼈으므로 강평처럼 죽이지 않고, 부황미를 좌빙익(左馮翊), 부비를 우부풍(右扶風), 등강을 행 함양(咸陽)태수로 내보냈다.

수광 3년(357년) 4월, 강족 수령 요양이 관중을 도모하고자 무리를 이끌고 북굴(北屈)을 통해 황하를 건너고 행성(杏城)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사촌형인 보국장군 요난(姚蘭)을 파견해 부성(敷城)을 빼앗았고, 요무장군 요익생(姚益生)과 좌장군 왕흠로(王欽盧)에게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진군해 관중의 강족들을 모으게 하였다. 이때 요양에게 귀순한 전진의 강족 백성이 50,000여 호나 되었고, 모인 병력 27,000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황제 부생은 장수 부비룡(苻飛龍)을 보내 부성을 탈환하고 요난을 생포하였다.

수광 3년(357년) 4월, 요양이 군대를 이끌고 황락(黃落)을 점거하자, 황제 부생은 부황미로 하여금 평북장군 부도(苻道), 용양장군 부견, 건절장군 등강과 15,0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요양을 막게 하였다. 그러자 요양은 보루를 높이 쌓아 방어에만 집중하였고, 응전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등강이 부황미에게 유세하였다.
"한 번 화살에 맞은 새는 구부러진 나뭇가지만 보아도 놀라 땅바닥에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요양은 환온장평에게 빈번히 패하여 예기가 꺾여있어, 지금 방어만 고수하는 것도 그 곤궁함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요양의 사람됨은 강단있고 사나우나 그만큼 쉽게 움직이니, 만약 그의 루문(壘門)까지 나아가 북을 울리고 깃발을 휘날린다면 요양은 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뛰쳐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황미는 등강의 계책을 채택하였다.

수광 3년(357년) 5월, 부황미가 먼저 등강을 보내 기병 3,000기로 요양의 보루까지 나아가 북을 크게 울리고, 깃발을 휘날리게 하였다. 등강이 이렇게 요양의 루문을 압박하면서 그 앞에 진을 치자, 과연 등강의 예상대로 요양은 노하여 모든 병력을 휘몰아 보루를 뛰쳐나왔다. 등강은 요양과 맞서 싸우다가 못 이기는 척 달아났고, 요양은 그 뒤를 추격해 삼원(三原)에 이르렀다. 그때 등강은 말머리를 돌려 기병들과 함께 요양을 향해 돌격했고, 인근에 매복해있던 부황미와 부견도 복병을 일으켜 요양을 덮쳤다. 결국 전진군에게 대패한 요양은 전장을 빠져나오려다 그의 준마인 여미과(黧眉騧)가 넘어지는 바람에 전진군에게 사로잡혀 곧바로 참수당했고, 그의 동생 요장은 잔당을 인솔해 전진에 투항하였다.

요양 토벌에 성공한 부황미는 군사를 거두어 도성 장안으로 개선하였나, 황제 부생은 부황미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포상을 전혀 내리지 않고, 자주 사람들 앞에서 부황미를 업신여겼다. 화를 참다 못해 격분한 부황미는 황제 부생을 죽이고 스스로 황위에 오를 음모를 꾸몄다가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어 주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전진의 왕공들이 연루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