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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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 ||<colbgcolor=#483D8B><colcolor=#fff> 삭방환후(朔方桓侯) 梁平老 | 양평로 | |
시호 | 환(桓) |
작위 | 삭방후(朔方矦) |
성 | 양(梁) |
휘 | 평로(平老) |
자 | 불명 |
생몰 | ? ~ 372년 11월 |
출신 |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아들 | 양성(梁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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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인물. 약양(略陽)의 저족.2. 생애
재능과 식견이 있고, 명민하여 법령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웅호걸과 교류하길 좋아하던 동해왕 부견과 친분이 있었고, 부견은 양평로에게 왕을 보좌할만한 재주가 있다며 몸을 기울여 예를 다해 벗으로 대하였다.수광 원년(355년) 6월, 경명제 부건이 붕어하고 부생이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하자, 양평로는 특진(特進), 영 어사중승(領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수광 3년(357년) 6월, 황제 부생은 대단한 폭군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술에 취해 대신들을 죽이는 일이 많았기에, 많은 대신들은 하루가 10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긴장하면서 살았다. 보다못한 양평로는 부견에게 나아가 말했다.
"주상께서 위로는 덕을 잃으셨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각자 다른 뜻을 품고 있으며, 연나라와 진나라는 서로 기회만을 엿보고 있으니, 재앙이 닥치면 집과 나라가 모두 무너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는 전하의 집안일이므로 의당 조속히 황위를 도모해야만 합니다."
부견은 마음 속으로는 양평로의 권유가 타당하다 여겼으나, 당장은 명분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견은 황제 부생이 부견의 서형인 청하왕 부법을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이를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양평로는 부견의 명을 받아 청하왕 부법, 광록대부 강왕(强汪)과 함께 정예병 수백 명을 대동하여 운룡문(雲龍門)을 통해 황궁으로 들이닥쳤고, 부견이 그 뒤를 이어 진입하였다. 궁중의 숙위병들이 모두 병장기를 버린 채 부견에게 앞다투어 투항하니, 부견 등은 큰 저항없이 부생의 침실로 들어가 그때까지도 술에 취해있던 부생을 폐위시켰다. 이윽고 황위를 찬탈해 대진천왕으로 즉위한 부견은 양평로를 상서우복야로 삼았다.[1]감로 원년(359년) 12월, 사지절, 도독북수제군사(都督北藩諸軍事), 진북대장군에 임명되어 삭방군(朔方郡) 서부 지역을 진수하여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개부의동삼사가 더해지고, 삭방후(朔方矦)에 봉해졌다. 양평로는 10년 넘도록 삭방을 지키면서 서북부 지역을 크게 안정시켰고, 선비나 흉노는 두려워 감히 침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원 8년(372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환(桓)'. 아들로는 비수대전 직전에 유뢰지의 공격을 받고 전사한 양성(梁成)이 있다.
[1] 《십육국춘추》의 경우 상서좌복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