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 冬壽 | |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묘주의 초상화.[1] | |
국적 | 서진 → 전연 → 고구려 |
작위 | 도향후(都鄕侯)[2] |
직위 | 사마(司馬)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昌黎玄菟帶方太守) |
출생 | 289년 |
서진 평주[3] 요동군 평곽현 도향[4] 경상리 (現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 | |
사망 | 357년 11월 25일[5] (향년 68세) |
고구려 양악성[6] (現 황해남도 안악군) | |
성 | 동(佟) / 동(冬)[7] |
이름 | 수(壽) |
자 | ▨안(▨安)[8] |
묘소 | 안악 3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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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인물. 본래 중국 사람이었으나 정쟁에 휘말려 고구려로 망명했다.2. 생애
평주 요동군 평곽현[9] 도향 경상리(敬上里) 출신으로, 333년 모용황이 건국한 전연에서 사마의 벼슬을 지냈다. 그 해 모용황의 동생 모용인이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러 파견됐으나, 문성(汶城) 전투에서 반란군에게 격파당했다. 마침 동수는 과거 모용인을 섬겼던 인연이 있었기에 그에게 투항하여 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결국 336년 모용황이 모용인의 반란 세력을 기습하여 궤멸시키자, 위협을 느낀 동수는 곽충(郭充)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고국원왕은 그를 중용해 낙랑·대방 지역의 태수로 임명했다. 아무래도 동수가 중국 출신이다 보니 중국식 문화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던 옛 한군현 지역을 다스리기 적합한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후 68세라는 고령의 나이까지 고구려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가 357년 11월 25일 사망했고, 안악 3호분에 그의 생애를 담은 묵서명이 적히게 되었다.
3. 여담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행렬도의 일부. |
공교롭게도 고구려는 동수가 귀화해온 지 6년 만인 342년 11월부터 전연의 지속된 침공에 시달리게 되었다. 동수가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에 임명되었다는 묵서명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때 고구려군의 지휘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가 아니라 왕릉이라는 소수설도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면 묵서명 아래 그려진 장하독이 곧 동수의 초상화에 해당할 것이다.[2] 고구려식 관등을 받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데, 같은 중국계 고구려인인 유주자사 진이 고구려에서 국소대형(國小大兄)이라는 토착 관등을 수여받은 것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3] 안악 3호분 묵서명에는 유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동수가 태어난 당시 요동군은 평주 소속이었다.[4]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치소가 있는 향(鄕)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평곽현의 치소를 가리킨다.[5] 음력 10월 26일[6] 동수의 정확한 사망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무덤이라면 동수가 생전 거주했던 지역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악군의 고구려 시절 지명은 삼국사기에 양악(楊岳), 고려사에 양악군(楊岳郡)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의 행정구역 체계는 광개토대왕릉비, 모두루 묘지명 등의 금석문 자료에서 알 수 있듯 중국식 군현제와 달리 성(城)·곡(谷)·촌(村)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특히 성(城) 단위의 지명이 가장 많이 문증되므로 양악군의 당대 명칭은 양악성에 가까웠을 것이다.[7] 전자는 진서와 자치통감의 표기, 후자는 안악 3호분 묵서명의 표기이다. 한자 동(佟)은 현대 한국 한자음 기준 '퉁' 또는 '통'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자치통감 주석에 "동(佟)은 도(徒)와 동(冬)의 반절이며 성이다.(佟, 徒冬翻, 姓也.)"라고 적혀 있으므로 '동'으로 읽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8] 현존하는 안악 3호분의 묵서명에는 첫째 글자가 박락되어 판독할 수 없다.[9] 훗날 요동을 장악한 고구려가 건안성을 축조한 곳이며, 문서 상단의 표에도 나와있듯 현재의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 일대로 비정된다.[10] 안악 3호분이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의 왕릉이며, 동수는 무덤 축조에 참여한 공로로 기록되었을 뿐이라는 소수설도 북한 학계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