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9:50:09

천과 지

1. 소설2. 1990년도 영화
2.1. 제작2.2. 평가2.3. 흥행과 그 여파
3. TV 드라마
3.1. NHK 판(1969)3.2. 니혼테레비 판(1990)3.3. TV 아사히 판(2008)


天と地と
하늘과 땅과

1.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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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온지 쵸고로(海音寺潮五郞, 1901~1977)가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소설. 우에스기 겐신의 일대기를 그리며 타케다 신겐이 그의 숙적으로 등장한다. 소설적 재미는 상당한 편. 다만 너무 겐신 찬양 일색이라서 가려 읽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대지(大志)> 1-10권(안동민 옮김, 대하출판사, 1982)[1], <天과 地> 1-4권(문일영 옮김, 영웅, 1990)으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하지만 둘 다 오래 전에 절판되었고 지금은 헌책방에서도 찾기 힘들다. 세로쓰기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면 <대지(大志)>가 <天과 地>보다 비교적 구하기 쉽다. 도서관의 기증서고나 보존서고, 헌책방을 뒤지면 찾을 수 있다.[2]

2. 1990년도 영화

하늘과 땅[3] (1990)
天と地と
파일:attachment/H_a_E.jpg
장르
감독
카도카와 하루키
개봉일
파일:일본 국기.svg 1990년 6월 23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국내 미개봉
상영 시간
118분

파일:천1.jpg
파일:천2.jpg

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1990년작 영화. 카도카와 쇼텐의 2대 사장인 카도카와 하루키가 제작, 감독을 맡았고, 에노키 타카아키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음악은 당시 한창 잘나가던 코무로 테츠야가 맡았다.

당시 일본 영화사상 최대인 50억엔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제작비에 걸맞게 흥행수입 92억 엔(배급수입 50억 5천만 엔)의 엄청난 대박을 내면서 개봉한 해 일본에서 영화 흥행 순위 2위를 차지했다(출처).[4] 이는 2024년 현재 역대 일본 자국영화 흥행 순위 25위, 애니메이션을 제외할 경우 6위에 해당한다(출처). 하지만 이러한 수치는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실제 실적은 아래 설명된 것처럼 큰 적자였다고 한다.

2.1. 제작

원래 카도카와 하루키는 25억엔이 들어간 1980년 영화 부활의 날의 흥행이 실패한 이후, 대작 노선을 포기하고 당시 유행을 반영하는 오락성 강한 기획영화들에 집중해서 80년대 내내 좋은 흥행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카도카와 영화 15주년 기념작인 이 영화에서 다시 한 번 대작병이 도지고 만 것이다. 여기에는 같은 전국 시대를 다룬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1980)와 (1985)의 성공이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제작비 35억엔이 투입되고 중국 로케이션으로 화제가 된 사토 준야 감독의 <둔황(敦煌, 1988)>이 먼저 개봉해서 비평면에서 찬사를 받고 흥행수입 82억엔(배급수입 45억엔)을 벌어들인 것도 대작 시대극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카도카와 하루키는 이전부터 우에스기 겐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발언을 자주 할 정도로 겐신에게 깊이 심취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영화 감독으로서도 이 작품 전까지 <더러운 영웅(汚れた英雄, 1982)>, <애정 이야기(愛情物語, 1984)>, <캬바레(キャバレー, 1986)>를 내놓으면서 양호한 흥행 실적을 올린 바 있다. 때문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스스로 <카게무샤>나 <둔황>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천명하면서 유래없는 대작의 제작에 착수하고 직접 감독까지 맡았다.

카도카와 하루키는 이 영화를 위해 48개나 되는 기업을 모아 제작위원회를 만들고 각 회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출자를 받았다. 이렇게 모은 50억 엔은 당시 일본 영화사상 최대 제작비였다. 영화가 만들어진 직후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는 바람에 이 기록은 200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5]

카와나카지마 전투의 촬영을 캐나다에서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든 스탭과 기자재, 소품 일체를 캐나다까지 옮겨가서 찍느라 이 로케이션에만 제작비의 절반이 들어갔다고 한다. 캐나다까지 간 이유는 일본에서는 대규모 전투를 찍을 넓은 들판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중국에서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먼저 중국에서 현지 촬영을 했던 <둔황>의 제작 과정에서 스텝들이 제작비를 횡령당하고 촬영 장비들을 기부 명목으로 뜯기는 등, 현지 횡포에 학을 뗀 사연이 전해지면서 캐나다로 장소를 바꾸게 된다. 전투 장면은 500마리의 말과 3000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서 찍었다.

원래 주연은 당시 NHK 대하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1987)의 주인공 다테 마사무네를 연기해서 큰 인기를 얻은 와타나베 켄이었다. 그러나 캐나다에서 촬영을 진행하던 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 발병해 귀국하는 돌발사태가 일어난다. 대체역으로 처음 고려된 것은 마츠다 유사쿠였지만, 당시 이미 방광암 말기였기 때문에 영화에 출연할 수 없는 상태였다(1989년 11월 사망). 결국 긴급 오디션을 통해 뽑힌 에노키 다카아키로 주연이 교체된다.[6] 영화가 개봉한 후에도 와타나베 켄이 주인공을 맡았더라면,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고, 본인도 오랫동안 이 때의 아쉬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2.2. 평가

개봉 당시에 일본 내의 평론가들한테 별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제작 규모만 보면 대단한 야심작이지만, 영화 자체가 너무 밋밋해서 평가를 할 여지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에스기 겐신이 1548년에 18세의 나이로 형 나가오 하루카게(長尾晴景)로부터 가독을 상속받는 것을 시작으로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과 결전을 벌이는 1561년까지 대략 10년이 넘는 시간을 따라가지만, 영화만 봐서는 줄거리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보다보면 마치 관객들이 이미 내용을 안다는 듯이 요점만 짚고 넘어가는 식으로 사건들이 주마간산처럼 휙휙 넘어간다. 모르고 보면 마치 드라마 총집편을 보는 기분이 든다.

감독 본인도 이 점을 인지하고는 있어서 한 인물의 일대기를 깊이있게 비추기보다는 "프로모션 비디오 스타일"로 연출했다고 하는데, 확실히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장면들이 많아서 눈이 즐겁다. 영상미에 있어서는 토를 달기 어려운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4계절의 아름다운 풍광은 빼어난 영상미를 뽐낸다. 세트나 특수효과 대신 절기에 맞추어서 1년에 걸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실제 경치들을 빠짐없이 담아냈다.

상영시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하이라이트인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CGI가 보편화된 요즘의 전쟁영화와는 맛이 다른 웅장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이 전투 장면은 특히 영화 <워털루(1970)>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온통 빨간색을 두른 다케다 신겐 군과 검은색의 우에스기 겐신 군이 초록 들판 위에서 격돌하는 선명한 색의 대비가 장관이다. 광활한 평원을 배경으로 다케다 신겐의 어린진(魚鱗の陣)과 우에스기 겐신의 차현진(車懸りの陣)을 실제 인원과 말을 동원해 재연해내서 전국시대 전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찍은 곳이 북미 평원이다보니,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게 너무 뻔히 보여서 이질감이 크다. 이 영화의 전투신은 이후 꽤 많은 시대극 작품에서 재활용되기도 했다. 버블시대가 끝난 후 이런 스케일로 다시 작품을 찍는다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수려하고 웅장한 장면도 많고 의상과 미술에도 큰 공을 들였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하나로 꿰어줄 드라마가 워낙 얄팍하다보니 안타깝게도 감독 말대로 딱 프로모션 영상 정도의 감흥밖에 느낄 수가 없다. 잘 만든 30초짜리 광고들을 2시간 동안 이어서 보는 느낌이랄지.

영화의 결말은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마침내 직접 칼을 맞부딪힌 겐신과 신겐이 승부를 내지 못하고 각자 군대를 이끌고 철수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끝나버린다. 기승전결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갑작스런 엔딩인데다, 그마저도 무승부라서 안 그래도 극적 요소가 없는 이 작품의 허망함을 배가시킨다.

2.3. 흥행과 그 여파

영화의 흥행은 수치 상으로는 초대박이었다. 배급수입 50억 5천만 엔은 흥행수입 92억 엔에서 배급을 맡은 토에이와 영화관의 몫을 뗀 나머지인데, 여기에 2차 매체의 매출과 방송국 방영권 수익까지 합하면 충분히 제작비 50억엔을 매꾸고 손익 분기점을 넘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를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게, 이 흥행수입의 대부분은 소위 "예매권(前売り券)"이라는 당시 일본 영화계의 관행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매권이란 기업들에서 일괄로 대량 구매해서 할인이나 다른 특전들을 달아서 뿌리는 영화표를 말하는데, 실상은 일종의 상품권처럼 유통됐다. 따라서 예매권이 많이 팔릴 수록 실제 관객의 숫자는 팔린 표의 수량를 크게 밑돌게 되며, 실수입도 명목상의 수입보다 부족해진다. 이 영화는 주로 제작에 참여했던 회사들을 통해 밀어내기식으로 예매권을 자그만치 500만 장이나 풀었기 때문에 실제 카도카와의 매출은 발표된 것에 한참 못 미쳤다. 이후 나온 내부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영화의 제작으로 30억 엔 가까운 적자가 났다고 한다.

이런 막대한 적자는 80년대에 승승장구하던 카도카와 하루키 사장 체제의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가 "풍운아"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며 독불장군식 경영과 온갖 기행으로 구설수에 올랐음에도 강한 리더십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실적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실패 이후 그의 판단력에 대한 의구심이 회사 내외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카도카와 미국 법인의 헐리우드 진출작이었던 <루비 카이로(Ruby Cairo, 1992)>가 제작비 33억 엔의 반의 반의 반도 못 건지는 참패를 하면서 카도카와 하루키의 입지는 결정적으로 흔들리게 된다.

결국 카도카와 하루키는 위기감 속에 사내 라이벌이었던 동생 카도카와 츠구히코를 희생양으로 삼아 회사에서 축출하고, 쫓겨난 츠구히코는 자신의 예전 부서 직원들과 함께 미디어 웍스를 설립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같은 해에 익명의 투서에 의해 마약 밀반입과 복용 사실이 경찰에 적발되어 1993년 사장직에서 내려와 징역을 살게 된다. 하루키의 퇴임 직후 츠구히코는 다시 회사로 돌아와 카도카와 쇼텐의 사장 자리를 이어받는다. 츠구히코는 이후 30여 년간 회사를 이끌다가 2020 도쿄 올림픽 뇌물 사건으로 2022년 체포되어, 자신도 형처럼 범죄 연루 사실로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보면, 이 영화는 자신을 다시 태어난 우에스기 겐신이라고 생각하던 카도카와 하루키의 과대한 자의식이 상궤를 넘어서면서 파멸하는 전주곡이 된 셈이다.

3. TV 드라마

3.1. NHK 판(1969)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파일:NHK 로고.svg
大河ドラマ シリーズ
대하드라마 시리즈
1960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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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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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964년
꽃의 생애
花の生
아코 낭인
赤穂浪士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태합기
太閤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源義経
세 자매
三姉妹
료마가 간다
竜馬がゆく
#s-3.1
天と地と
}}}}}}}}} ||

1969년에 방영한 1항목의 첫 번째 영상화. 겸해서 NHK 대하드라마의 첫 번째 컬러 시리즈이기도 하다. 주연은 이시자카 코지.

현재는 50회만 온전히 남아있다.


||<tablealign=center><tablewidth=480px><tablebgcolor=#fff,#191919><bgcolor=#275c9d><tablebordercolor=#275c9d> 파일:MyDramaList_logo.png ||
별점 8.0 / 10

3.2. 니혼테레비 판(1990)

1990년에 방송했고, 여명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카게토라 역에 오오사와 미키오(大沢樹生) , 부친인 나가오 타메카케 역을 미후네 토시로(三船敏郎)가 맡았다.

3.3. TV 아사히 판(2008)

2008년에 방송. 카게토라는 마츠오카 마사히로(松岡昌宏)가 맡았다.


[1] 시바 료타로의 <나라 훔친 이야기>와 합본[2] 책바다 서비스(http://www.nl.go.kr)를 통해 주거지 인근 도서관에 신청하여 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대여에 소요되는 비용은 부담해야 한다.[3] 일본 개봉 당시 국내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4] 1위는 백 투 더 퓨처 2.[5] 단, 일본 영화는 아니지만 일본기업들이 제작비를 댄 영화를 포함시킬 경우, 2000년대 이전까지 최대 제작비가 든 영화는 <천과 지(天と地と)>와 같은 해에 나온 <크라이시스 2050(クライシス2050, Solar Crisis, 1990)>이다. 이 쪽은 NHK의 주도로 약 70억 엔의 제작비를 들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출자만 했을 뿐, 영화 제작은 미국에서 이루어진 사실상 미국 영화다. 일본에서는 1990년, 미국에서는 1992년에 개봉했지만, 양쪽 나라에서 모두 흥행에 참패하고 잊혀졌다.[6] 한국영화 희대의 망작 싸울아비에도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