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의 도안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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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시부사와 에이이치 [ruby(澁澤, ruby=しぶさわ)][ruby(榮一, ruby=えいいち)][1][2] | Shibusawa Eiichi | |||
출생 | 1840년 3월 16일 | ||
무사시국 한자와군 지아라이지마촌 (現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치아라이지마) | |||
사망 | 1931년 11월 11일 (향년 91세) | ||
도쿄부하 기타도시마군 다키노가와촌 (現 도쿄도 기타구 니시가하라) | |||
직업 | 막신, 관료, 사업가, 교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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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시부사와 이치로에몬 어머니 시부사와 에이 | ||
배우자 | 시부사와 지요 (1858~1882) 시부사와 가네코 (1882~1934) | ||
자녀 | 장녀 호즈미 우타코 차녀 사카타니 고토코 장남 시부사와 도쿠지 (1872~1932) 차남 시부사와 다케노스케 삼남 시부사와 마사오 삼녀 아카시 아이코 사남 시부사와 히데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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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 일본의 사업가.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에 정부 대장성 관료이자 제일국립은행 초대 총재를 지냈다.도쿄증권거래소, 히토쓰바시대학, 도쿄경제대학, 제국호텔 등 정말 온갖 다양한 기업, 학교 설립 · 운영에 관여하면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日本資本主義の父)로 불리며 그럴 만한 업적을 세웠다.
2. 생애
1840년 무사시국 한자와군(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유학을 배웠고 삼촌에게서 일본사를 배웠다.1863년, 조슈 번과 연계하여 군마현 다카사키성을 점거하여 무기고를 털고 요코하마를 방화한 뒤 막부를 뒤엎으려는 쿠데타에 가담하려고 했으나 친척의 간곡한 만류로 포기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의절당하고 교토로 올라와 도쿠가와 요시노부 밑으로 들어갔다.
이후 쇼군직에 올라간 요시노부 덕분에 27살이 되던 해에는 프랑스 파리 엑스포 참가 요원으로서 유럽을 방문하고 유럽 금융제도와 산업에 관해 공부하였다.[3]
유럽에서 돌아와 오쿠마 시게노부의 권유로 메이지 정부의 대장성 관료로 출사하여 제도 개혁과 정책을 수립하였다.[4]
하지만 약 4년 만에 의견 충돌로 사임하고 마는데 이 때 이노우에 가오루와 연명으로 건백서를 봉정하여 당시 막 개명한 일본이 구미 제도를 성급히 따라가고 그에 따라 재정 지출이 통제되지 아니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하였다.
2.1. 사업가로서
富者をうらやんでこれを嫉視するのは、自分の努力の足りぬ薄志弱行のやからのやることだ。幸福は自らの力で進んでこれを勝ち取るのみだ。
부자를 부러워하고 이를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의 행동이다. 행복은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 얻어낼 수밖에 없다.
부자를 부러워하고 이를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들의 행동이다. 행복은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 얻어낼 수밖에 없다.
[navertv(59901955)]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9부 - 도쿄 · 파괴와 창조의 150년中[5] |
대장성에서 사직한 후 1873년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을 설립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도쿄가스, 도쿄해상화재보험(현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 오지제지, 전원 도시(현 도큐 전철), 지치부 시멘트(현 태평양시멘트[6]), 지치부 철도, 케이한 전기철도, 도쿄증권거래소, 기린 맥주[7], 삿포로 맥주(현 삿포로 홀딩스), 도요방적(현 도요방적주식회사), 대일본 제당, 메이지 제당, 시부사와창고(현 시부사와 창고주식회사) 대한제국에서는 경인철도합자회사와 경부철도주식회사 등 다양한 기업 설립에 참여했으며 그 수는 500개 이상, 사회사업은 600개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지 시대의 다른 재벌들과 달리 공공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실제로 시부사와 일족은 각 회사 지분을 최소 수 %에서 20% 이하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이 주장하던 도덕경제합일설의 '사리를 쫓지 않고 공익을 도모하는' 것을 평생 관철해냈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주위 재벌가들이 남작에 그칠 때 자작 작위를 받았다.
2.2. 이후
1889년부터 15년간 도쿄부 후카가와구(현 도쿄도 고토구)[8] 구회의장을 역임했다.제1회 중의원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구인 도쿄5선거구에서 아흔 넷 유효표가 나와 2위를 기록했다.
1890년 제국의회 귀족원(상원의원)에 당선되었지만 본회의에 1회 참석한 후 1년 뒤 사임하였다.
관동대지진 당시 천견론을 주장했다. 천견론이란 세상의 이기적인 풍조를 본 자연이 천벌을 내려 개혁을 촉구했다는 주장이다.
이후 사회에서 부패한 부르주아와 현대 산업 문명을 비판하고 평등과 자연 회귀를 찬양하는 유행어로 사용되는 일이 늘어나자 이 주장의 부자연스러움을 나타내면서 "지금 천견을 말하는 자들이 정말 천견을 아는지 모르겠다."면서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1926년과 1927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31년에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 정2위[9]의 위계가 추서되었다.
3. 도덕경제합일설과 합본주의
어떻게 하면 이치에 맞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러나 그 이치에 맞게 하면 국가사회의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여 더욱 나아가면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해 봤을 때 만일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국가사회에 이익하는 것이라면, 단연 자기를 버리고 도리 있는 곳에 따를 것이다.
- <논어와 주판>
- <논어와 주판>
1916년 출판한 저서 <논어와 주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배운 논어를 근거로 윤리와 이익의 양립을 내걸고 기업은 경제를 발전시키고 그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부는 전체에서 공유하는 것으로써 사회에 환원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도덕적이지 않은 사기와 부도덕, 그리고 권모술수적인 비즈니스 통찰력 등은 진정한 상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4. 대한제국과의 관계
한반도에서는 경인철도합자회사와 경부철도주식회사 사장을 지냈으며 경인선과 경부선 부설권을 인수하여 부설했다. 경부선 부설에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협궤(1,067mm)를 주장하는 육군 참모본부와 일본 정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대륙 철도 직통이 가져올 편익을 고려해 소신껏 표준궤(1,435mm)를 선택했고 이로 인한 기공 지연과 추가 예산 투입으로 속을 박박 긁어 놨다. 결국 경부선은 러일전쟁 이후에나 완공되었으나 궤간이 2번이나 바뀌었던 남만주철도와 호환이 쉬웠으니 편익을 추구한 그의 소신이 옳았던 셈이다.한편으로 경성전기(한국전력공사의 전신) 사장을 맡았다. 특히 대한제국이 외국 돈 유통을 금지한 방침을 스스로 뒤집고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일본 제일은행 지폐 1원·5원·10원권을 유통시킨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당시 제일은행은 대한제국을 압박해 이를 관철하면서 세 종류 지폐에 모두 당시 제일은행 소유주였던 시부사와 초상을 그려넣었다.[10]
훗날 일본 엔에 그의 얼굴이 들어갔지만 대한제국 원에 더 먼저 들어갔던 셈이다.
5. 기타
* 현 일본 10000엔권 지폐의 인물이지만 과거 이력 때문에 한국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다만 실제 사상적으로 한반도 침략을 역설한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다른 유력 후보 인물에 비하면 그런 평가는 좀 애매하다. 일본에서 경제적인 업적이 지대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화폐 도안에 사용될 인물로 꼽혔으나, 과거 일본에서는 위폐 방지 목적으로 수염을 중시했는데 이 사람은 수염이 없어서 한동안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 첩을 여러 명 둬 숨겨진 아이가 많았고 자택 하녀에게도 손을 댔으며 심지어 85세가 되던 해에 18세 여성이 그의 아들을 낳기도 했다. 공식적인 자식 수는 13명이라고 되어 있지만 호적에 넣지 않은 자식 수는 훨씬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11] 그러나 이러한 논란이 최근 여성계를 중심으로 재점화되어, 결혼식 축의금을 낼 때도 여성편력을 연상케 하는 시부사와가 들어간 신권이 아닌 후쿠자와 유키치가 들어간 구권을 주는 것이 예의가 되었다.
- 그를 다룬 한국 도서 중 2018년 출판된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책이 있다.
- 사이타마현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전한 기업 활동과 사회 공헌을 하는 기업 경영자에게 '시부사와 에이이치 상'을 수여하고 있다.
- 고향인 후카야시에서는 사망월인 매 11월을 <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의 달>로 정해 기념하며 각 초등학교마다 그가 좋아했던 고향 음식 '니보토'(煮ぼうとう)[12]를 급식으로 배식한다.
- 2021년에 방송한 NHK 대하드라마 <청천을 찔러라>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일본 자본주의 아버지'로서 다뤄졌으며 배우는 요시자와 료. 하지만 당시 일본에게 경제침탈을 당한 한국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 적손[13] 시부사와 게이조(1896 ~ 1963)[14]는 젊은 시절 민속학에 심취했으며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겪은 일에 충격을 받고[15] 조선인의 생활을 향상하고자 하는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는데 조선인 학생을 지원해 경성제국대학에 진학시키기도 했다. 그가 지원하여 경성제국대학 위생조사부에서 조사한 경성의 토막민(<토막민의 생활과 위생>)이나 조선 농촌 현실은 조선총독부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식민 지배로 인한 조선인 생활 향상과는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어 최대한 억눌러서 서술하고 있지만 통계나 서술로서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이 명백히 드러나는 책이다. 그가 설립한 고미다락방 박물관은 조선 민속을 상당히 심도있게 연구했으며 그 기록이 현재 국립민족학박물관에 있다.
- 그의 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자리에 내려온 후에도 평생 인연을 이어갔으며 시부사와가 직접 주도해서 만들어진 요시노부의 전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전>이 편찬되기도 했다. 이 전기는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자료로도 쓰였다.
6. 같이 보기
[1] 신자체 표기는 渋沢栄一[2] 일본어 구자체, 대한민국 언론사에서 쓰이는 한자 표기 기준.[3] 그 와중에 일본 국내에서는 보신 전쟁이 일어나 에이이치의 친척 헤이쿠로는 막부군에 가담해 에도 근교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4] 당시 대장경은 막말 4현후인 다테 무네나리였으며 오쿠마 시게노부가 대장대보의, 이토 히로부미가 대장소보의 각 직에 있었다.[5]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대략 1890년대부터 연합군 점령하의 1952년까지 관동 대지진과 도쿄 대공습이라고 하는 두 번의 괴멸을 극복하고 되살아난 도쿄의 파괴와 창조의 150년을 다룬 2021년 3월 29일 방송 다큐멘터리.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행적과 발언을 중심으로 그의 사후까지 시간순으로 다루고 있다.[6] 일본 최대 시멘트기업[7] 외국인이 경영 중이던 양조장을 미쓰비시가 인수할 때 주주로 참여하거 이사로 활동했다. 이후 미쓰비시가 완전 인수하여 기린맥주주식회사를 설립해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8] 도쿄대공습으로 황폐화된 후 1947년 고토구에 통합되었다.[9] 현대 일본에선 1년 이상 재임한 역대 총리 사망 시 추서된다.[10] 이후 메가타 다네타로에 의한 화폐정리사업에 따라 시부사와가 소유한 일본제일은행의 은행권이 대한제국의 공식 법화 지위를 얻게 된다.[11] 시부사와와 아울러 도덕적이라고 평가받던 이토 히로부미 역시 여성편력이 대단했는데 이는 그 시대 일본인은 여성편력을 부도덕하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 모두 뇌물로서 여성을 자주 상납받았다. 시대가 다르다고 봐야 한다.[12] 닭고기 국물을 베이스로 당근과 곤약, 파 등을 곁들인 칼국수 비슷한 음식이다.[13] 장남인 도쿠지(1872 ~ 1932)가 상속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손자로서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14] 후일인 시데하라 내각에서 대장대신까지 올랐다.[15] <조선의 농촌위생> 서문 참조. 정확히 무엇에 충격을 받았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