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리스어 Λευκάδα / Λευκάς영어 Lefkada / Leukas / Lefkas
그리스 서부 이오니아 제도에서 케팔로니아, 코르푸, 자킨토스 다음으로 큰 섬. 보니차 및 프레베자 방면의 육지와 매우 가깝고, 중심 도시인 레프카다에서 육계사주 및 부교로 연결되어 있다. 산지가 많지만 연륙교가 있는 덕에 인구는 2만 1천 정도로 유지된다. 레프카다와 육지 모두 수십 미터 간격을 두고 세워진 인공섬에는 아기아 마브라 (산타마우라) 성채가 있다.
2. 역사
레프카다 시가지 전경
고대 코린토스 인들이 정착했고, 디아나 신전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브루투스 1세가 브리튼 섬으로 향하며 들렸고, 사포와 아르테미시아 1세 등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곳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3세기에는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가 점령하기도 했고, 기원전 2세기부터는 기나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동로마 제국기에는 주교구였다가 서기 900년경 레온 5세에 이해 대주교구로 승격되었다. 1099년, 후일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되는 피사의 다고베르트가 십자군 함대와 함께 섬을 약탈했다. 1198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레프카다에서의 무역 특권을 얻었고 4차 십자군 이후 그 지배권까지 주장했다. 다만 일대는 에피로스 친왕국 령으로 남았고, 이때 산타 마우라 성채가 세워졌다.
2.1. 중세
1292년 동로마 제국 하의 제노바 함대가 산타 마우라를 습격했고, 1295년 에피로스의 데스포티스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사위인 케팔로니아 & 자킨토스 백작 조반니 1세 오르시니에게 레프카다를 주었다. 조반니 1세는 나폴리 왕국 군주 카를로 2세의 승인 하에 산타 마우라 성채를 강화했다. 그의 아들 조반니 2세는 에피로스의 데스포티스도 겸하게 되었다. 다만 1331년 아테네 공국 수복에 나선 고티에 6세 드 브리엔이 레프카다와 보니차를 점령했고, 1343년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따라서 레프카다는 서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베네치아 령이 되었으나, 1362년 케팔로니아 & 자킨토스 백작 레오나르도 1세 토코가 점령했다. 후자는 정교회 대주교를 축출하며 레프카스 공을 칭했고, 이로써 레프카다 공국이 설치되었다.14세기 중반 알바니아 부족들이 에피로스 내륙을 휩쓸며 1375-95년에 레프카다를 공격했다. 카를로 1세 토코는 백작령인 케팔로니아 대신 공작령인 레프카다를 중심지로 삼았고, 그를 기반으로 에피로스를 노려 결국 1411년에 데스포티스에 오른다. 1413년 아카이아 공국이 알바니아 용병과 함께 레프카다를 공격했으나 에피로스-베네치아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레프카다는 아르타에 이은 토코 가문 제2의 거점으로 중시되며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1449년 아르타에 이어 1460년에 육상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데스포티스 레오나르도 3세는 자킨토스로 피신했고, 오스만 군이 레프카다를 습격하자 베네치아에게 할양할까 고심한다. 현지 주민들도 세금을 과하게 거두는 레오나르도를 싫어했고, 마침내 1479년 오스만 해군 제독 게딕 아흐메드 파샤가 레프카다와 케팔로니아 및 자킨토스 섬을 정복하며 에피로스 친왕국을 완전히 멸망시켰다.
2.2. 오스만 제국기 (1479-1684)
산타 마우라 성채. 왼쪽이 육지 방향이고, 위쪽이 레프카다 시가지이다
성채의 성벽과 해자
오스만 시기에 섬은 레브카다 (لفكادة)라 불렸고, 산타 마우라 성채는 그리스어 발음을 빌린 아야 마브라로 불리며 레프카다의 전 주민이 거주하는 주도가 되었다. 주민들은 점차 성채 주변에 집을 짓고 시가지를 형성해 나갔다. 레프카다는 제자이르 바흐르 세피트 (지중해 군도) 에얄레트 산하 칼를리-엘리 산작의 카자 (읍)이었고, 1502-03년간 베네치아 군이 장악했으나 휴전 후 반환했다. 1530년대 기준 인구 1천의 레프카다는 산작 내의 최대 도시이자 주요 군사 기지로써 111명의 보병과 9명의 포병이 주둔했다. 1564년 섬 내부에서 산타 마우라까지 3km의 수도교가 건설되었고, 당시 기준 8백여 주택들과 수비대에 물을 공급했다. 동시에 수도교는 육로를 통해 성채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1571년 레판토 해전 후 신성동맹 군대가 산타 마우라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후 1572-74년간 카푸단 파샤 (대제독) 클르츠 알리 파샤는 성채를 전면 중수하고 확장하여 현재와 같이 포대와 성탑들을 지닌 육각 형태로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들어 레프카다는 점차 이슬람화되었고, 가까운 모레아 산작에 속했다. 1671년 일대를 방문한 여행가 에블리야 첼레비는 성내에 성당을 개조한 왕실 소유의 휘카르 자미를 포함한 5개의 모스크와 마드라사 (대학), 2개의 마크탑 (일반 학교), 함맘 (목욕탕)이 있었고 무슬림 가구만 2백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동시에 동부 (50여 가구)와 서부 (3백여 가구)의 2개 구역 (바로쉬)은 목재 건물들이었고 기독교도들이 혼재했으며 모스크, 테케 (수피 회관), 학교, 카라반사라이 2개, 7개의 성당, 주민들과 수비대 모두에게 인기가 있던 와인 상점이 있다고 첨언했다. 또한 이때에는 성채 일대를 벗어나 섬 자체에도 7백여 가구가 살았고, 전부 기독교도였으며 20개의 성당이 있었다 한다. 이는 정세가 많이 안정되었고, 일부 성채 내의 주민들이 개종했음을 시사한다. 총 인구는 6천여명이었다.
2.3. 베네치아 공화국령 (1684-1797)
레프카다 시내의 테오토코스 성당
레프카다 시내의 파나크라토르 성당
2세기 간의 오스만 지배 후 레프카다는 대튀르크 전쟁기인 1684년에 프란체스코 모르시니가 이끄는 베네치아 군에게 16일의 포위 끝에 점령되었다. 이후 베네치아 군은 모레아 전역을 개시한다. 모로시니는 성채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비운 후, 성채 주변의 시가지도 파괴해 성채의 방어용 경사지로 활용했다. 동시에 이슬람과 관련된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로써 레프카다의 유일한 시가지는 섬 북부만 남겨졌고, 19세기까지 '아마히키'라 불리다가 현 레프카다 시가 되었다.
1710년대 베네치아 당국은 중세 성벽 잔여부를 철거해 성채를 근대식으로 바꿨고, 육지 쪽에 외성을 쌓았다. 1715년 오스만 제국이 모레아를 수복하고 코르푸를 겅격하자 베네치아 당국은 레프카다 주둔군을 코르푸 방어에 투입하고 성채를 일부 허물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다만 코르푸 공방전의 승리 후 베네치아는 레프카다를 재점령했다. 그후 베네치아의 지배는 1769년 현지 그리스 인들의 반란 외에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2.4. 근대
1797년 베네치아의 멸망 후 레프카다는 다른 이오니아 제도들처럼 프랑스 령이 되었다가, 1799년 표도르 우샤코프 휘하의 러시아 해군이 점령했다. 1800년 이오니아 제도는 오스만 종주권 하 러시아 속령인 셉틴술라르 공화국으로 개편되었고, 러시아 당국은 본토에서 밀려난 클레프트 (산적단)와 아르마톨로이 (민병대)를 고용했다. 그 지휘관 중에는 아나스타시오스 첼리오스와 아포톨로스 레벤다키스 등이 있었는데 후자는 1802년에 60여 그리스인 부대를 편성했다. 1807년, 에피로스와 테살리아 등지를 차지한 이오아니나의 알리 파샤가 레프카다를 노렸다. 그는 해안에 테케 요새와 성 요리료스 요새를 세워 산타 마우라 성채를 포위했지만, 러시아-그리스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같은해 틸제트 조약으로 프랑스의 이오니아 제도 지배가 복원되었다가, 1810년 영국이 점령했다. 1815년 영국은 속령인 이오니아 합중국을 설립했다. 그러던 1825년 대지진으로 수도교 등, 성채를 제외한 섬의 거의 모든 석조 건축물이 파괴되었다. 이후 시가지는 목조 건물들로 재건되었다. 1864년 레프카다는 그리스 령이 되었고, 당시 인구는 약 2만 4천명이었다.3. 관광지
* 산타 마우라 성채 (Κάστρο της Αγίας Μαύρας)
13세기에 처음 세워져 16-18세기에 강화된 레프카다와 육지 사이의 성채. 1571년, 1684년, 1807년 등에 포위가 있었고 그중 2번쨰에만 함락되었다. 그리스 령이 된 후로도 1922년까지 그리스 군이 주둔했으나,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 당시 난민들을 수용한 후 버려져 내부 건물들도 파괴되었다. 현재도 정비가 별로 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