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22:28:13

지평리 전투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536349> 1950년 북한군의 남침
<colbgcolor=#777,#222><colcolor=#FFF> 6월 폭풍 작전
· 옹진반도 전투
· 개성-문산 전투
· 고랑포 전투
· 봉일천 전투
· 김포반도 전투
· 옥계 전투
· 강릉 전투
· 춘천-홍천 전투
· 대한해협 해전
· 동두천 전투
· 포천 전투
· 의정부 전투
· 내촌-태릉 전투
· 수원 비행장 전투
· 한강 인도교 폭파 · 한강 방어선 전투
7월 주문진항 해전
· 동락리 전투
· 오산 전투
· 평택 전투
· 진천 전투
· 천안 전투
· 전의-조치원 전투
· 청주 전투
· 금강 방어선 전투(공주-대평리 전투)
· 장항-군산-이리 전투
· 대전 전투
8월 청송 전투
· 낙동강 방어선 전투
(안동·의성전투
· 마산 전투
·다부동 전투
· 창녕·영산전투
· 안강·기계 ~ 영천·신녕 전투
· 포항 전투
· 포항 철수작전
· 통영 상륙작전
)
유엔군의 반격
9월 장사 상륙작전
· 인천 상륙작전
· 9.28 서울 수복
10월 평양 탈환작전
· 초산 전투
중공군 개입
10월 중공군 1차 공세(10/25)
11월 개천-비호산 전투
· 중공군 2차 공세(11/25)
· 청천강 전투
· 장진호 전투
12월 평양 철수
· 흥남 철수작전
· 중공군 3차 공세(12/31)
1951년 1월 1.4 후퇴
· 평양 대공습
· 울프하운드 작전
· 유엔군 1차 반격(1/25)
· 선더볼트 작전
· 원산 포위전
· 금양장리 전투
· 라운드업 작전
2월 중공군 4차 공세(2/11)
· 횡성 전투
· 지평리 전투
· 유엔군 2차 반격(2/20)
· 전략도서 확보 작전
· 원산 포위전
· 킬러 작전
3월 리퍼 작전
· 커리지어스 작전
· 토마호크 작전
4월 러기드 작전
· 중공군 5차 공세(4/22)
· 매봉·한석산 전투
· 사창리 전투
· 설마리 전투
· 파평산 전투
· 가평 전투
5월 설악산 전투
· 중공군 6차 공세(5/16)
· 현리 전투
· 용문산 전투
· 한계 전투
· 유엔군 3차 반격(5/23)
전선 교착
6·7월 도솔산 전투
· 평양 대공습
8월 피의 능선 전투
· 펀치볼 전투
9·10월 가칠봉 전투
· 단장의 능선 전투
· 백석산 전투
· 코만도 작전
11·12월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
1952년 1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3월 장단-사천강 전투
7월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351고지 전투
9월 백마고지 전투
· 1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 저격능선 전투
1953년 3월 폭찹힐 전투
5월 M-1고지 전투
6월 351고지 전투
· 2차 화살머리고지 전투
· 949-973-883고지 전투
7월 중공군 7차 공세(7/13)
· 금성 전투
· 백암산 전투
· 425고지-406고지 전투
첨자 : 공산군의 승리 / 첨자 : 유엔군의 승리
※ 월표기: 전투 개시일 기준, 실제 교전기간은 개별 문서 확인 }}}}}}}}}

지평리 전투
砥平里戰鬪
Battle of Chipyong-ni
6.25 전쟁의 일부
시기
1951년 2월 13일 ~ 2월 15일
장소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교전국 중국 미국, 프랑스
지휘관 덩화 폴 프리먼
병력 25,000명 4,500명
피해 1,000여 명 전사
3,000여 명 부상
79명 포로
51명 전사
250명 부상
42명 실종
결과
UN군의 승리, 중공군의 4차 공세 실패

1. 배경2. 전투 경과
2.1. 2월 13일2.2. 2월 14일2.3. 2월 15일
3. 결과4. 여담5. 영향6. 기타

[clearfix]

1. 배경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UN군은 청천강 전투, 장진호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퇴해야 했고, 그 뒤에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내주게 된다. 그 뒤 UN군은 서부전선에 새롭게 부임한 매튜 B.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지시하에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썬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틀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공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UN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도 2월 11일에 2월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여기서 미군 23연대 전투단은 지평리를 목표로 한 위력정찰중 지평리와 일신리를 잇는 구 중앙선 철도구간의 쌍굴 터널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 125사단과 마주쳤고, 125사단에 섬멸적 피해를 안겼다. 서부전선의 상황을 본 리지웨이는 쌍굴 전투에서의 성과를 보고 받고, 23연대 전투단으로 사주방어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1주일의 시간동안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지평리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반대로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의 동부전선군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신경한 전진으로 돌출되어버린 국군 8사단이 후방 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을만큼 이격된 틈을 파악한 중공군에게 먼저 공격을 받았다. 이 횡성 전투에서 방비가 허술했던 국군 8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큰 피해를 받고 후퇴했다. 결국 2월 초 미 9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군 23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진지(肩部陣地)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횡성에서 밀려나면서 지평리에 남게 된 23연대 전투단(23RCT)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이자 중공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어쩌다보니 하게됐고, 지평리를 뚫어야 서부전선 UN군의 허리를 끊을 수 있는 만큼 중공군도 역시나 지평리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지평리를 점령해 4차 공세의 쐐기를 서둘러 박으려던 중공군은 그 미끼를 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군 2 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랄프 몽클라르 중령을 대대장으로 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군 37포병대대, 82방공포대대 B포대, 503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여기서 중공군 13병단 사령원 덩화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지르는데, 여기 진출한 23연대가 2사단 산하 보병연대인줄 알고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한 것이다. 문제는, 이 23연대 전투단은 상술한 82방공포대대, 5034포병대대, 즉 미트쵸퍼로 악명높은 M16 하프트랙 장갑차와 M1 155mm 곡사포 6문을 보유하고, 근접항공지원까지 받는 여단급 포병화력을 가진 막강한 화력을 가진 보병연대였던 것이다 이는 중공군의 군급 편제의 포병화력보다도 강했다. 중공군도 박격포대대가 보강되긴 했지만 이미 쌍굴 전투에서 1개 사단으로 2개 대대조차 막지 못한 화력열세였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 전투단의 철수를 미 10군단 알몬드 군단장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튜 B.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쌍굴 전투의 성과를 근거로, 지평리를 지켜야 서부전선의 후방을 지킬 수 있다며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그 지시를 받은 23연대 전투단 폴 프리먼 대령은 주변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5km 길이의 원형진지를 설치하는 방안도 고려하였으나 지나치게 길이가 길어 병력의 밀도가 낮아지고, 화력이 빈약한 중공군 특성상 병력의 밀도가 높은 편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고지방어대신 1.6km 길이의 원형 진지를 구축하였다. 북쪽에 1대대, 동쪽에 3대대, 남쪽에 2대대, 서쪽에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2. 전투 경과

2.1. 2월 13일

이날 저녁, 중공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가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 날 전투 중에 폴 프리먼 23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군력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했다. 이날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직접 헬기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2. 2월 14일

저녁 7시, 중공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해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과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공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지평리 전투를 상징하는 프랑스군의 총검 돌격이 이 날 전투에서 이뤄졌다.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에 맞불로 승부한 것. 일시적으로 진지가 빼앗기는 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미군과 프랑스군은 진지를 지켜내며 최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 1기병사단 5기병연대(연대장 마셀 G. 크롬베즈 대령, Marcel G. Crombez)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임대(Task Force Crombez)가 편성되고 있었다.

이를 위해 5기병연대는 기존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로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전차대는 6전차대대 D중대와 70 전차대대 A중대로 편성되었는데, 6전차대대 D중대는 본래 1기병사단 소속이 아니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중대여서 5기병연대에 임시배속되었다. 6대대는 M46 패튼[1]을 장비했으며, 70전차대대는 M4A3E8 셔먼을 장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 5기병연대는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 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복구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진형을 갖추었다.

2.3. 2월 15일

이날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는 도로 우측 산지, 2대대는 도로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해 두 대대는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2개 포병대대가 공격작전을 지원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한편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공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지금 간다면 기갑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해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무렵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고 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로 기동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뷸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동행하는 것이었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위에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공격하고, 구급차와 보급트럭은 도로사정이 괜찮아지면 그때 불러들이기로 했다. 일단 M46 패튼으로 구성된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 M4A3으로 이루어진 70전차대대 A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오후 3시가 되자 공격대는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랐으며, 160명의 L중대원들도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15시 45분, 차간거리 13m(15야드)를 유지한 채 전차들이 기동을 시작하자 좁은 2차선 도로 양측면에서 중공군의 사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크롬베즈 특임대는 전차의 장갑과 항공지원을 믿고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지평리 정남측 망미산 자락과 248고지 사이의 애로지형 입구에 들어섰을 때였다. 선두 전차가 대전차화기에 양측면을 피격당했고, 뒤이어 대열 네 번째 위치의 D중대장 전차도 3.5인치 슈퍼 바주카에 피격당해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중대장 히어스 대위를 포함한 포탑 승무원들이 모두 전사했음에도 살아남은 조종수가 협로를 따라 전진을 계속한 덕분에 도로가 막히는 최악의 결과는 피할 수 있었다.

오후 5시, 결국 크롬베즈 특임대는 공격 개시 단 1시간 15분만에 6마일의 거리를 뚫고 지평리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전차 세 대가 파손되고 히어스 대위의 전차가 완파된 것 빼면 손실은 양호했다. 그러나 전차 위에 올랐던 L중대원들의 희생은 컸다. 격렬한 화망사격에 직면할 때마다 전차는 멈춰서서 대응했고 적탄에 고스란히 노출된 보병들은 뛰어내려 엄폐물을 찾았다. 문제는 보전협동이 원활하지 않아 L중대원들이 다시 차 위에 올라타기도 전에 전차만 저 멀리 가버리는 등의 사태가 빈발한 것이다. 결국 L중대는 절반에 가까운 70명의 병력을 상실했으며, 그 외에도 몇몇은 이건 미친 짓이야라며 남쪽 본대로 되돌아가거나 낙오돼 포로로 잡히는 등 최종적으로 전차와 함께 지평리에 도달한 L중대원은 23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크롬베즈 특임대는 기갑부대 특유의 강력한 화력과 신속한 공격으로 500명이 넘는 추정 사살 전과를 올리며 중공군의 측후방까지 북진해 이들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덕분에 중공군들이 물러난 틈을 타 지평리 방어선을 인접 전선들과 연결시켰다.

3. 결과

횡성 전투에서 한국군 5사단과 8사단을 붕괴시킨 중공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미군 23연대전투단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공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공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공군의 주요 패배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화력의 열세
    상술한대로 중공군 사령관 덩화가 쌍굴 전투 이후 지평리에 자리잡은 23연대전투단의 전투력을 잘못 평가했다. 보병연대가 아닌 여단급 화력을 가진 23연대 전투단을 상대로 공세종말점 직전까지 지쳐있고 울프하운드 작전으로 인해 피해가 쌓인 중공군 6개 연대로 포위 공격하다가 UN군의 화력에 큰 피해를 입었다.
  2.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할 지휘 체계 부재. 또한 각 연대는 연대 자체 계획에 따라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했다.
  3. 병력의 열세를 고려해 고지방어가 아닌 원형진 사주방어를 선택하고, 대신 침입로에 각종 트랩과 장애물을[2] 설치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막아낸 폴 프리먼 대령의 병력집중과 원형진의 붕괴를 막은 프랑스대대의 총검 돌격으로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우주방어 성공
  4. 중국어에 능통한 폴 프리먼 대령이 직접 포로를 심문해 중공군의 중요 정보를 얻어내고 이에 대비한 것. 이전까지 알몬드가 중공군 포로의 정보나 현지인들의 제보를 무시했던 것과 다른 철저한 준비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4. 여담


* 국방홍보원이 운영하는 국방TV 유튜브 채널이 구르카 용병 주제의 콘텐츠를 다룰 때 유용원 군사기자가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한 구르카 부대가 지평리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역사왜곡 발언을 하였다. (15분 20초부터)

그러나 6.25 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에 배속된 구르카 부대 자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왜곡을 할려고 해도 영국군이 참가했던 전투를 언급해야 그럴듯한 것인데 보다시피 지평리 전투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라 설사 영국군에 배속된 구르카 부대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지평리 전투는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5. 영향

울프하운드 작전의 경우처럼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다시 고무되었으며,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과 견고한 방어진지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가 되었다. 이후 중공군의 공세종말점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6. 기타

  • 지평역에 가면 기념비가 한켠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열차가 지나갈 때 역 옆을 보면 프랑스, 한국, 미국, UN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있다. 또 바로 앞에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이 있는데, 시설이 잘 되어 있고 무료 해설사가 해설도 해 주신다.


[1] 전면에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전차들이 크롬베즈 특임대에 임시배속되었다.[2] 여기서 처음 등장한 것이 후일 클레이모어 지향지뢰의 모티브가 되는 급조한 원격 화염방사지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