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폭풍 작전 폭풍 224 | ||
<colbgcolor=#536349> 시기 | 1950년 6월 25일 ~ 7월 31일 | |
장소 | 삼팔선 전역, 서울특별시 및 대한해협 | |
교전국 | 대한민국 미국 영국[해군] | 북한 소련[2] |
지휘관 | 신성모 정일권 채병덕† 손원일 | 김일성 최용건 강건 |
결과 | 대한민국 국군의 후퇴와 영토 상실 | |
영향 | 6.25 전쟁 발발 서울 함락 조선인민군의 한반도 대부분 점령 대한민국 국군의 전략적 후퇴 유엔군 및 미국 참전 |
[clearfix]
1. 개요
폭풍 작전은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을 명분으로 조선인민군을 삼팔선 이남으로 진군시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며 벌어진 6.25 전쟁의 첫 번째 전투다.2. 작전 내용
폭풍 작전의 최종적인 목표는 침공으로부터 50일이자 광복절 5주년인 1950년 8월 15일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50년 3월부터 조선인민군은 무장을 강화하고 남침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 군대를 재배치했다.5월 16일, 북한의 사무관과 소련의 사무관이 전쟁에 대한 마지막 토의를 시작했다. 북한의 국방총리는 그날 이후로 고위급 회담을 개최했다. 6월 10일, 북측의 국방 총리는 비밀스레 모든 사단 및 여단 사령관들을 평양으로 모이게 했다.
북한의 장교 총책임자였던 강건은 6월 23일까지 모든 군대에게 방어전인 것처럼 꾸며진 공격 작전에 대한 준비를 마치라고 지시했다.
6월 11일, 조선인민군은 2개의 군단으로 재조직되었고, 북위 38도 이북으로 10에서 15km 떨어진 전선에 사단들이 배치되었다.
6월 18일, 인민국방총리는 정찰명령 제1호를 발령해 각 사단들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위치 및 활동 범위에 대한 정보를 얻어오라고 지시했다. 6월 22일, 재배치 및 재편성이 끝나고 스탈린으로부터 침공을 승인을 받은 다음에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인민국방총리에게 전투 명령 1호를 발령하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될 것이라고 알려주었고, 스탈린은 이에 동의했다.
폭풍작전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개성과 의정부로 서울에 진입, 점령한 다음 춘천에서 내려온 603모터싸이클 연대가 수원으로 재빨리 남하, 후방퇴로를 차단하여 한국군 주력 부대들을 모두 서울에 포위한다음 모조리 격파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강릉을 통해 동해안을 따라 6월 29일까지 포항까지 남하해 부산을 점령, 5일이내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제대로만 실행된다면 한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수도사단과 증원온 2사단, 3사단, 5사단을 모조리 서울에 가둔뒤 퇴로를 차단해 한국군 전체를 한번에 날릴수 있는 작전이었다.
3. 병력 배치 상황
당시 조선인민군은 옹진반도에서 의정부까지가 1군단, 춘천에서 강릉까지가 2군단이였다.
- 옹진반도
- 한국군 17연대
- 조선인민군 3경비여단
- 조선인민군 6사단 14연대
- 개성-문산 전투
- 한국군 1사단
- 조선인민군 1사단
- 조선인민군 6사단
- 조선인민군 13사단
- 조선인민군 105땅크려단 203기갑련대
- 의정부
- 한국군 7사단
- 조선인민군 3사단
- 조선인민군 4사단
- 조선인민군 15사단
- 조선인민군 105땅크려단
- 춘천
- 한국군 6사단
- 조선인민군 2사단
- 조선인민군 12사단
- 조선인민군 603모터찌클련대
- 강릉
- 한국군 8사단
- 조선인민군 5사단
- 조선인민군 3사단 10련대
- 조선인민군 766유격대
- 조선인민군 945륙전대
- 조선인민군 1경비려단
- 조선인민군 12모터찌클련대[검증필요]
- 평양
- 조선인민군 10사단
- 서울
- 한국군 수도경비사단
- 대전
- 한국군 2사단
- 대구
- 한국군 3사단
- 광주
- 한국군 5사단
- 제주
- 해병 연대
4. 작전 이후
폭풍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위 38도 이북 일대에서 선전포고 없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보지도 못한 채 붕괴되었고, 조선인민군은 빠르게 서울을 향해 남하했다.조선인민군은 소련이 지원해준 탱크, 전투기[4] 등의 무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단 3일 만에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춘천-홍천 전투에서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모든 작전이 어그러지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