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0년 8월, 대한민국 육군 제3사단이 포항 독석동에서 벌인 철수작전. 위의 작전도에서 포항 이북 해안에 아군 방어선으로 나타난 곳이 해당 지역이다.
2. 상세
조선인민군 육군은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를 점령한 뒤 유엔군의 해, 공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동해안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자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2~8Km 떨어진 야산지대를 따라 침투하기 시작했다.8월 13일 아침 국군 제3사단은 하송동에서 부대정비를 끝마친 제22연대 2개 대대를 제23연대 방어지역 좌측방에 있는 462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1개 대대를 사단 예비로서 하송동에 대기시켰다. 한편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모든 보급을 선박 수송에 의존하고 있는 어려움과 북한군이 사단 방어지역을 남북 양편에서 협공하려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해상철수의 시기가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를 위해 사단 참모진을 동원해 해안선을 답사한 뒤 독석동-조사동 간의 1km 해안이 선박 접안에 적합하고 승선을 위한 해안 교두보 확보에도 용이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아울러 지역 내의 이용 가능한 어선을 은밀하게 파악하면서 우발사태에 대비하였다. 한편 462고지, 봉황산, 구계동 방어선 일대에선 쉴 새 없는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15일 새벽에는 포항 흥해 북쪽에서도 북한군이 출현함으로써 육군 제3사단은 머지않아 그들의 협공이 가해질 것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 한편 이 와중에 서쪽에서 병행중인 안강-기계지구의 전황이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뿐더러 3사단이 구계동, 월포동에 고립되자 대한민국 육군본부는 미8군과 협조 후 3사단에 해상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3사단도 이날 저녁 23연대를 지경동, 화진동에 재배치하고 그 엄호 하에 22연대를 철수시켜 화진동, 독석동에 배치하였다.
16일 오후 9시 3사단은 UN군이 고용한 일본 민간 해운사의 LST 4척이 독석동 해안에 접안할 것이라는 육군본부의 전문을 받았다. 김석원 장군은 북한군과 접전 중인 상황 속에서 해상철수를 해야 하는 이 어려운 작전의 성패는 오직 기도비닉에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해상철수를 극비에 부치는 한편 특히 피난민의 동태를 살피도록 강조하였다. 이는 이 당시 피난민 속에 협조자 및 반공 인사 외에도 친북 성향의 편의대와 첩자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으로, 이들에게 누출된다면 수적으로 유리한 북한군이 철수 전 피해를 최대한 주려고 전면 공세를 펼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책이 강구된 뒤 김석원 장군은 각 연대장과 참모들을 소집해 해상철수작전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해안지대까지의 철수계획을 하달하였다.
* 각 연대는 각 대대별로 1개 중대 규모의 잔류접촉분견대를 편성한 후 8월 16일 오전 9시에 일제히 공격을 가하여 대치 중인 북한군을 격퇴한 직후 지정된 해안지대로 철수한다.
* 잔류접촉분견대는 17일 오전 4시 약정된 신호탄이 발사되면 지체 없이 철수한다. 기타 병력과 장비는 일선 연대가 승선하기 이전에 병력 승선과 장비 탑재를 마친다. 기만대책으로는 트럭 6대를 동원하여 17일 자정부터 1시간 30분 동안 독석동 방화동 간 2Km 구간을 왕복운행하면서 국군 증원병력이 상륙한 것처럼 가장한다.
* 제11야전포병부대의 1개 중대는 잔류접촉분견대가 철수할 때까지 독석동 해안에서 요란사격을 계속한다.
* 잔류접촉분견대는 17일 오전 4시 약정된 신호탄이 발사되면 지체 없이 철수한다. 기타 병력과 장비는 일선 연대가 승선하기 이전에 병력 승선과 장비 탑재를 마친다. 기만대책으로는 트럭 6대를 동원하여 17일 자정부터 1시간 30분 동안 독석동 방화동 간 2Km 구간을 왕복운행하면서 국군 증원병력이 상륙한 것처럼 가장한다.
* 제11야전포병부대의 1개 중대는 잔류접촉분견대가 철수할 때까지 독석동 해안에서 요란사격을 계속한다.
그리고 김 장군의 의도대로 각 병력들은 야음을 틈타 승선과 장비 탑재를 진행할 수 있었다.
17일 오전 6시 부상자 125명을 포함한 3사단 병력 9,000명과 경찰 1,200명 그리고 지방공무원 및 노무자와 반공투사 피난민 등 10,000여 명이 승선을 완료하고 모든 장비와 송아지까지 여유롭게 실었다.[1] 사실 병력 승선계획을 수립할 당시 김석원 장군은 경찰과 지방공무원 및 반공인사들을 필히 탑승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자기 병력과 장비 챙기기에도 급급한데도 이렇게 한 이유는 국군이 작전을 할 때마다 민간인들이 제보나 편의 제공, 물자 운송 등 소박하면서도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으로, 자기들끼리 멋대로 철수한다면 향후 이들의 협력을 얻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 와중에 북한군은 제3사단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오전 6시 정각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독석동 뒷산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을 사격하며 들이닥쳤고, 앞서 출항준비를 끝마친 3척의 LST는 먼저 해안을 떠났다. 그리고 홀로 남아 3사단 참모진들과 철수중인 잔류 분견대를 기다리던 한 척은 포탄이 바로 앞까지 떨어지자 멋대로 철수를 감행하려 했으나, 이미 승선중인 사단 헌병 몇 사람이 일본인 선장을 설득해 다시 접안하게 하였다. 그리고 오전 7시 경 마지막 철수병력들과 김석원 장군과 참모진들까지 다 탑승함으로서 마지막 철수가 시작되었다. 또한 직후 미 공군 전투기 편대가 상륙지점에 나타나 몰려온 북한군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한편 LST 4척은 미 해군 순양함 USS 헬레나 함과 구축함 4척의 호위 속에서 오전 10시 30분쯤 후방 구룡포에 도착함으로써 제3사단의 해상철수작전은 종결되었다.
3. 영화 고지전에서의 왜곡
2011년에 개봉된 대한민국의 전쟁영화 고지전에서는 단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민간인에 송아지까지 태우고 유유히 빠져나간 이 작전을 철수하는 육군 장병들 중 일부가 탑승한 해군 상륙정이 승선인원을 초과하자 같은 중대원들을 쏴 갈기고 내뺀 추악한 철수작전으로 왜곡하여 많은 사람들한테 욕을 먹었다. 또한 실제 철수는 일본 상선단의 LST로 이뤄졌음에도, 현장에 동원되지 않은 대한민국 해군 상륙정이 등장한 것도 고증오류다.전쟁의 잔혹한 면을 보여주는데 적합한 실패한 작전이나 패배한 전투가 많았음에도, 누가봐도 성공한 철수작전을 왜곡했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 실제로 이 영화처럼 개봉 당시 군 관계자들을 거북하게 만든 미국의 전쟁영화 플래툰의 경우, 영화상으로 나온 베트남전의 처참한 군상들은 감독 올리버 스톤이 각색한게 아니라 실제 베트남전에서 있었던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반면에 고지전에서 나온 포항 철수작전은 완전히 왜곡된 것이다. 정치성향을 떠나 거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아예 역사고증물이 아닌, 그냥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반전주의(라기보단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표현) 위주의 대체역사물 임을 명확히 표명했으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애록'처럼 가상의 지명을 사용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1] 피난민들이 송아지를 끌고 배에 오르려는 걸 미군이 막자 송아지가 없으면 농사를 못짓는다며 결국 태워갔다고. 일본군 출신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