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전기주식회사에서 운영하던 노면전차에 대한 내용은 서울 전차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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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 기관 | 경성궤도주식회사, 서울특별시 |
노선 연장 | 13.5km |
궤간 | 1067mm 협궤 |
통행 방식 | 좌측 통행 |
총 역수 | 14개[1] |
선로 수 | 1 |
전철화 구간 | 전 구간 전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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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병용교량 시절의 성동교를 횡단하는 경성궤도 차량. |
193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흥인지문에서 뚝섬유원지, 광장동까지 이어지던 전차 노선이다. 경성 전차와 다르고, 구분하기 위해 흔히 기동차라 불렀다.[2] 일제강점기에는 경성 전차는 경성전기주식회사가, 경성궤도는 경성궤도주식회사가 운영했지만 1953년 이후에는 모두 서울특별시에서 운영하는 시영 노선이 되었다.
폐선된 지도 50년이 넘게 흘러 지금으로서는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동대문역 7번 출구 앞에 있는 경성궤도주식회사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다. 서울시내 곳곳에 아직 흔적이라고 남은 것은, 노선 인근의 골목길 구획이 이 선로를 따라 나 있는 곳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수동2가 330-2번지나 영동대교 북단의 성수동2가 159-13번지처럼 경성궤도가 있던 자리 중 아직도 지목이 '철'(철도용지)로 되어있는 곳이 드물게 있다.
경성궤도 흔적에 대한 답사기
2. 역사
1937년의 서울(경성) 지도. 철도 및 노면전차 노선이 표기되어 있는데 경성궤도 공용 노선만 그려져있고 경성전차가 운행하는 시내 노선 중 일부(고궁지선 등)는 누락되어 있다.[3] |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1가 16-4 SK테크노빌딩 앞에 있는 '성수동 기동차길'에 대한 설명. 네이버 거리뷰 전체 노선 중 성수동 구간만 표시되어 있다.[4] |
원래는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에서 면허를 받아 부설한 것이 시작이나, 경영난에 직면한 후에 경성궤도주식회사에 넘겨, 1932년부터 1953년까지는 경성궤도주식회사가 운영을 맡았다.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이 적산으로 몰수하여 임시 경영진이 그 운영을 맡았다.
6.25 전쟁 발발로 인해 성동교 교량의 파괴로 동대문, 왕십리 방면과 뚝섬, 광장동 방면이 끊어졌고, 차량과 선로의 파괴가 심각하여 운행이 중단되었다. 광장리 지선은 1957년에 가서야 운행 재개했다.
그렇지만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던 탓에 만성적인 경영난이 해결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폐선이 결정되었다. 그 후 폐선된 일자는 불명이나, 폐지 결정이 된 당년에 폐지됐다는 말도 있고, 그 이후에 운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서는 그 후에도 운행된 걸로도 보인다. 추정으로는 1966년에 운행이 중지된 것으로 보인다.
3. 역할
경성전차가 도심 내부에서 시민들의 발이 되었다면, 이 노선의 역할은 도심에서 외곽까지 이어주는 노선이었다.동대문에서 왕십리까지는 당시 부설되어 있던 경성전차와 선로를 공용했다.[5] 또한 청계천 북단으로 전용 궤도선이 부설되어 있었다, 경성전차를 타고 도심에서 왕십리로 오면 왕십리에서 갈아타서 자양동이나 광장동 방향으로 가는 식.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뚝섬유원지는 이촌동의 한강백사장과 더불어 경성 주민들에게 사랑 받는 휴양지였다. 본선은 성수동에서 구불구불 선형을 그리다가 현재의 영동대교 부근에서 뚝 안쪽으로 들어가 지금의 뚝섬한강공원에서 시종착을 했다.
광장지선은 상후원역이 있던 지금의 뚝섬역사거리 안쪽[6]에서 갈라져 광나루로 남쪽 가변으로 달리며 화양동을 거쳐 광나루로 향했다. 광나루는 천호동, 나아가 광주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나루였고, 한강에서 한강대교를 2번째로 놓인 다리가 천호동과 이어지는 광진교일 정도로 천호동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발전된 곳이었다. 도심에서는 서울전차를 타고 왕십리에서 경성궤도로 갈아탄 다음, 광나루에서 내려 나룻배로 갈아타고 천호동으로 가는 식이었다.
4. 경성-이천간 전기철도 계획
1930년대 후반에 동대문-뚝섬나루간 노선을 활용하여 경성-이천간 장거리 전철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남한산유원지 성동전철서 계획
【광천】 경성궤도주식회사에서는 지난 28일 오후 8시에 동사지배인 등승달랑(藤縄達郎 ・후지나와 타츠로)씨 외 1명이 광주에 와, 광주 읍내 명월관에서 관공서장급 지방유지와 신문사 관계자등을 초빙하고 '이번에 철도가 광주를 통과하는 내용을 설명한 후, 정거장 부지 매수시에 일반의 후원을 해주길 바란다' 며, '회사의 발기인을 (광주군) 지방 유지로 해 달라' 는 간담회가 있었다. 경성궤도회사에서는 용산 공작소장인 전천상치랑(田川常次郎 ・타가와 츠네지로)씨와 공동 경영으로 자본금 1천만원으로 경성~이천간 60km의 전기철도 가설을 계획하고 당국에 허가를 제출했다. 선로는 뚝도 도선장을 건너서 경기도 대본산인 봉은사를 지나 남한산성을 통과하거나 남한산성 성벽을 돌아가 광주 읍내로 곧장 통하게 할 예정이라는데, 남한산성은 2천 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백제고도로서 경기도 내에서 명승지로서 제일 유명한 곳이므로 동 회사에서는 이곳에 대 유원지를 작성하고 전 조선에 유람객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한다.[7] 경성~이천간의 공사비는 820만원이라고 한다. 허가가 나는 대로 곧 기공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착공하면 쇼와 14년 9월경에 준공되며 일반에 개통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7년 8월 1일자 조간지.#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동전철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뚝섬나루-봉은사-남한산성-광주읍내-이천에 이르는 장거리 교외철도를 신설하고자 했다. 남한산성의 성벽을 돌아 신장, 광지원을 경유하는 안과 송파, 남한산성 내부를 직접 경유하는 두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8]【광천】 경성궤도주식회사에서는 지난 28일 오후 8시에 동사지배인 등승달랑(藤縄達郎 ・후지나와 타츠로)씨 외 1명이 광주에 와, 광주 읍내 명월관에서 관공서장급 지방유지와 신문사 관계자등을 초빙하고 '이번에 철도가 광주를 통과하는 내용을 설명한 후, 정거장 부지 매수시에 일반의 후원을 해주길 바란다' 며, '회사의 발기인을 (광주군) 지방 유지로 해 달라' 는 간담회가 있었다. 경성궤도회사에서는 용산 공작소장인 전천상치랑(田川常次郎 ・타가와 츠네지로)씨와 공동 경영으로 자본금 1천만원으로 경성~이천간 60km의 전기철도 가설을 계획하고 당국에 허가를 제출했다. 선로는 뚝도 도선장을 건너서 경기도 대본산인 봉은사를 지나 남한산성을 통과하거나 남한산성 성벽을 돌아가 광주 읍내로 곧장 통하게 할 예정이라는데, 남한산성은 2천 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백제고도로서 경기도 내에서 명승지로서 제일 유명한 곳이므로 동 회사에서는 이곳에 대 유원지를 작성하고 전 조선에 유람객을 유치할 계획이라고 한다.[7] 경성~이천간의 공사비는 820만원이라고 한다. 허가가 나는 대로 곧 기공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착공하면 쇼와 14년 9월경에 준공되며 일반에 개통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7년 8월 1일자 조간지.#
경성이천간에 철도회사 계획
전천상차랑(타가와 츠네지로)씨를 중심으로 자본금 일천만원의 성동철도회사 설립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바, 이는 경성(동대문)~이천간(60km)에 광궤[9] 전차철도를 부설하려는 것으로서, 동대문~왕십리 사이는 일부 고가 복선으로 하고, 왕십리~이천 사이는 단선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 회사는 이천의 온천을 이용하여 보총식(寶塚式)의 유원지계획도 진행하고 있는데 전천(타가와)씨는 이미 철도국의 내인가를 얻었다고 하며, 근시일 내에 정식인가신청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회사를 설립하면, 현재의 경성궤도를 흡수합병하기로 되었다.
조선일보, 1937년 7월 25일자 조간지.#
또한 당대에 이름난 명승지인 봉은사, 남한산성을 경유하는 철도 노선을 활용하여, 철도 회사에서 연선 지역에 유원지를 건설하여 경영하려는 시도를 했고, 대전부의 유성온천처럼 이천에 일본식 온천 관광단지를 조성하려는 시도도 했다.[10]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전시 체제 돌입으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었다.전천상차랑(타가와 츠네지로)씨를 중심으로 자본금 일천만원의 성동철도회사 설립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 바, 이는 경성(동대문)~이천간(60km)에 광궤[9] 전차철도를 부설하려는 것으로서, 동대문~왕십리 사이는 일부 고가 복선으로 하고, 왕십리~이천 사이는 단선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 회사는 이천의 온천을 이용하여 보총식(寶塚式)의 유원지계획도 진행하고 있는데 전천(타가와)씨는 이미 철도국의 내인가를 얻었다고 하며, 근시일 내에 정식인가신청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회사를 설립하면, 현재의 경성궤도를 흡수합병하기로 되었다.
조선일보, 1937년 7월 25일자 조간지.#
만약 경성-이천간 철도가 실제로 지어졌다면, 대한민국의 철도 노선도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분당선/신분당선/수도권 광역급행철도 A선 및 경강선을 통해 서울과 이천을 철도로 잇고 있고. 서울과 광주, 이천을 직결하는 수서광주선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목적은 달랐을 지언정 성장 초기 서울 동남부의 미싱링크를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11]
5. 연혁
1927년 3월 31일 | 뚝섬궤도(纛島軌道)에서 왕십리-동독도 간 4.3 km 궤도의 부설을 허가받음 |
1929년 3월 14일 | 사명을 경성뚝섬궤도(京城纛島軌道)로 변경 |
1929년 일자 불명 | 사명을 경성교외궤도(京城郊外軌道)로 변경 |
1930년 11월 1일 | 왕십리-동뚝도 4.0 km 구간 개통 |
1931년 9월 16일 | 경성교외궤도에서 왕십리-동대문 간 2.976 km 궤도의 부설을 허가받음 |
1932년 4월 | 경성궤도(京城軌道)에서 경성교외궤도의 시설 및 운행 권리 일체를 인수함 |
1932년 10월 11일 | 동대문-왕십리 2.9 km 구간 개통 |
1933년 2월 27일 | 왕십리-화양리 2.0 km 구간 궤도의 부설을 허가받음 |
1933년 7월 15일 | 상후원-화양 2.0 km 구간 개통 (화물 영업 개시) |
1933년 10월 17일 | 상후원-화양 1.6 km 구간 화양지선 여객 영업 개시 |
1934년 1월 13일 | 화양-광장 4.3 km 구간 궤도의 부설을 허가받음 |
1934년 3월 3일 | 동뚝도리[12]-자마장리[13] 간 여객·화물 겸용 구간과 자마장리-한강강안 간 화물 전용 구간 총 1.8 km 궤도의 부설을 허가받음 |
1934년 10월 9일 | 동뚝도-유원지 0.6 km 구간의 영업과 동뚝도화물지선 0.2 km의 화물 영업 개시 |
1934년 11월 21일 | 도교-화양 0.9 km 구간 개통 |
1934년 12월 25일 | 화양-광장 3.5 km 구간 개통 |
1935년 12월 | 동대문-서뚝도[14] 구간 전철화 |
1939년 7월 29일 | 서뚝도-광장 5.943km 구간 전철화 |
1951~1953년 | 한국전쟁의 여파로 청계천교량이 파괴되어 광장리선 운행이 중지되고, 동대문-동뚝 간 7.1 km만 운행하게 됨. 1953년 10월 시영체제 전환 당시에는 동대문-유원지 간 단일요금제를 채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에 동뚝역에서 유원지역까지 연장된 것으로 보임. |
1953년 10월 28일 | 서울특별시에서 경성궤도주식회사를 인수하여 시영체제로 전환 |
1954년 4월 1일 | 서울특별시 궤도사업관리청으로 변경 |
1956년 6월 1일 | 궤도사업관리청을 운수사업청으로 개칭 |
1957년 3월 | 광장리선 운행 재개 |
1961년 7월 11일 | 경성궤도 폐지 결정 |
1966년 5월 18일 | 경성궤도 철거 계획 발표 |
1966년 7월 | 운행 중지 |
6. 노선
- 본선
역명 | 환승노선 | 현재 위치 | |
동대문 | 東大門 | 서울전차 | 동대문역[15] |
동묘전[16] | 東廟前 | 청계천 다산교 부근 | |
용두 | 龍頭 | 용두동 대성스카이렉스 부근 | |
마장 | 馬場 | 한전 광진성동지사 남쪽 부근 | |
왕십리 | 往十里 | 경원선, 서울전차 | 왕십리광장 |
살곶이[17] | 箭串 | 성동교 북단 한양대역 3번 출구 | |
상후원 | 上後原 | 광장리선 | 왕십리로14길과 아차산로1길의 교차점[18] |
후원 | 後原 | 성수동1가 656-1823 부근 | |
서뚝도 | 西纛島 | 성원중학교 뒤 성수동2가 333-21 부근 | |
동뚝도 | 東纛島 | 영동대교 북서단 부근, 둘레19길과 둘레21길의 교차점 | |
유원지 | 遊園地 | 뚝섬한강공원 벽천나들목 앞[19] |
- 광장리선
역명 | 환승노선 | 현재 위치 | |
상후원 | 上後原 | 본선 | 왕십리로14길과 아차산로1길의 교차점[20] |
도교 | 稻橋 | 송정빗물펌프장(송정길 1) 앞 오거리 | |
화양 | 華陽 | 화양삼거리 남쪽 군자로, 동일로30길, 능동로19길의 교차점 | |
모진 | 毛陳 | 어린이대공원역 사거리 부근[21] | |
구의 | 九宜 | 위치불명 | |
광장 | 廣壯 | 광진교 북단 |
대부분 현재 서울 2호선 동측, 서울 7호선과 비슷한 경로를 지나고 있었다.
[1] 폐지 직전 기준.[2] 경성 전차를 그냥 전차라고 불렀기 때문이다.[3] 그런데 이 지도에는 20년대에 완공되었어야 할 조선총독부 청사가 없고 아직 남산 밑의 왜성대에 총독부가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4] 그리고 경성궤도는 근처의 상원1길을 따라 궤도가 부설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당 안내문은 상원길에 있다.[5] 당시 경성전차는 왕십리역앞이 종점이었다.[6] 성수동1가 656-802번지가 당시 상후원역이 있던 곳으로 본선과 광장지선이 여기서 분리됐다. 현재도 건물 양쪽으로 당시 선로대로 비스듬히 갈라지는 골목길이 있다. 그리고 인근 성수동1가 656-810번지의 지목은 아직도 '철'(철도용지)로 되어있다.[7] 참고로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에도 백제의 수도 중 하나라고 추정되기도 했으며, 실제로 한성백제의 수도 중 하나였던 한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의 위치는 풍납토성-몽촌토성 이원 체제가 유력하다.[8] 이 중 신장, 광지원을 경유하는 안에서 뚝섬나루-신장 구간은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서울숲-수서, 수도권 전철 3호선 수서-오금, 수도권 전철 5호선 오금-강동-하남시청 구간과, 광주읍내-이천 구간은 수도권 전철 경강선 경기광주-이천 구간과 유사하다.[9] 여기서 광궤는 기존의 경성궤도가 사용하던 협궤(1067mm)에 비해 넓은 궤간인 1435mm, 즉 표준궤를 뜻한다.[10] 이와 같은 경영 방식을 일본에서는 '마치즈쿠리(街づくり)'라고 부르며, 한큐 전철을 시작으로 오다큐 전철, 도부 철도 등 거의 모든 대형 사철 회사가 실행했고, 금강산선도 같은 방식으로 경영했다.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와서, 일본에서는 철도 회사가 백화점, 호텔, 유원지 등 다방면의 사업을 겸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11] 강남, 강동 방면의 지상철도망이 없는 이유는 기술적 문제도 있었지만 인구 부족과 험준한 지형 등 다양한 난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1930년대 경성궤도의 광역철도화 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12] 지금의 성동구 성수동2가[13] 지금의 성동구 송정동[14] 지금의 성수동1가[15] 동대문역 7번 출구로 나오면 경성궤도주식회사 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16] 해방 이후 동묘역으로 개칭되었다.[17] 한자로 전관, 전곶역으로도 불렸는데, 해방 이후에는 성동역(城東驛)으로 개칭되었다. 옛 경춘선 상의 성동역과는 다르다.[18] 성수동1가 656-810 번지는 지목이 '철(철도용지)'로 되어있다.[19] 자양동 105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0] 성수동1가 656-810번지는 지목이 '철(철도용지)'로 되어있다.[21] 이 근처 화양동 209, 215, 224 번지는 지목이 '철(철도용지)'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