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20:11:27

금강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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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111호 112호 113호
태백 장성이중교 철원 금강산 전기철도 교량 제주 이승만 별장
금강산전기철도 → 경성전기
金剛山線
Kŭmgangsan Line | 금강산선

(폐선)
노선 정보
분류간선
기점철원역
종점내금강역
역 수28
개업일1924년 8월 1일
폐업일1950년 9월
소유자금강산전기철도 → 경성전기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운영자
노선 제원
노선연장116.6km
궤간1,435mm
선로구성단선
사용전류직류 1,500V 가공전차선

金剛山線 / Kŭmgangsan Line

1. 개요2. 역사3. 재개통의 가능성4. 금강산선 연혁 및 역 목록
4.1. 금강산선 연혁4.2. 금강산선 역 목록

[clearfix]
파일:attachment/KGSER001.jpg
<colbgcolor=#000> 상단이 금강산선 전체노선도, 하단 좌측이 당시 운행하던 열차. 하단 우측은 종점인 내금강역

1. 개요

파일:attachment/금강산선.jpg
<colbgcolor=#000> 금강산선

일제강점기 경원선 철원역에서 내금강역잇던 철도 노선.

구글 어스의 위성사진에 금강산선의 선형을 표시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일본 웹에서 일제강점기의 금강산선 일부 구간들의 지도를 찾아서 역을 표시했으며, 수몰 구간의 선형을 파악할 때 구글 어스 프로의 오버레이 기능을 활용하였다.

2. 역사

일본의 철도사업가이자 정치가인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 1861 ~ 1931)가 일본, 대만 등에서 철도로, 필리핀에서 담배제조 등으로 대성공한 이후 사업을 확장하려 나서다 금강산 관광을 목적으로[1] 답사 1년 후인 1919년에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착공 당시는 협궤인 1,067mm 궤간이었으나 철도계의 중진 후루카와 사카지로(古川阪次郎, 1858 ~ 1941)의 제언에 따라 표준궤로 변경된 이 철도는, 갖은 어려움 끝에 1924년 8월 1일에 철원군금화군(현재 김화군) 구간을 먼저 개통, 상업운전을 시작하였다. 1931년 7월 1일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길이는 116.6㎞이다. 그러나 쿠메 타미노스케는 금강산선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5월 24일에 향년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 노선의 특징은 사철, 즉 민자로 지어졌으며 노면전차를 제외한 한반도 최초의 전철노선이다. 그 이유는 강원도 구간의 산악 지대를 넘어야 하는 탓이었고, 때마침 당시 건설된 중대리·향천리·지곡리 등지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의 부대 사업 겸 해당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안전장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2]에는 무식하게 무겁고 구조 한계상 빠르고 섬세한 속도 조절이 어려운 디젤이나 증기로 험준한 노선을 신속하게 넘는 것은 매우 위험해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힘 좋고 응답성이 뛰어나며 가벼운 전기철도가 필요하였다.

또한, 해당 철도를 이용해서 신기술을 시험해보려는 성격도 있었는지 강원도 북부의 험준한 산골짜기에 건설하는 철도에다가 표준궤간에 직류 1,500V로 동작하는 전기기관차, 노선이 통과하는 곳 중 금강산의 관문인 해발 824m의 단발령에는 구배가 50‰에 달하는 스위치백이 동시에 적용되었다. 게다가 스위치백이 2개나 있었다! 스위치백을 한 번 해서 단발령을 넘고 단발령을 내려갈 때에도 다시 한 번 스위치백을 넘은 것이다. 당시 스위치백이 있었던 구간은 오량역-단발령역 간 구간. 일본 웹의 지도[3]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건설 중에 굵직한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철원 ~ 금화 간 노선이 완공단계에 있던 1923년 7월 유례없는 호우로 공사 중이던 철도가 막대한 수해를 입었고,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시바우라에 발주한 전동발전기가 파손되는 등 재해가 겹쳐 개통은 지연되었다. 그 탓에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는 당시 한반도 철도운영을 담당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증기 기관차, 객차, 승무원 등을 차용하여 1924년 8월 1일에 임시영업을 개시하였고, 새로 제작한 전동발전기가 도착하여 11월 26일에 본격적인 전동차 운행을 시작할 정도였다.

우여곡절끝에 1931년 7월에 완전히 개통되었으며, 하루 7왕복 열차가 운행되었는데, 가장 빠른 열차가 철원 - 내금강 간 116.6km를 운행하는데 3시간 53분이 소요되어 전기철도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평균 시속 30km에 불과하였다. 백두대간협곡열차 장거리 버전 이는 앞서 말한 단발령의 스위치백 및 험준한 지형 탓에 최소 곡선반경이 140R에 불과했으므로 빠른 속도로 운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140R이 어느 정도냐 하면 30km/h 속도 제한이 걸려 있는 종각 드리프트와 동일한 수치인데, 종각드리프트가 여기저기에 있다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는 28개역으로 인한 가속과 감속 및 기본정차시간, 2개의 스위치백, 단선이기 때문에 교행에 따른 대기와 통표확인 및 교환시간 등을 고려하지 않은 표정속도이다. 서울-부산간 KTX만 보더라도 고속열차로 최고속도가 시속 300km임에도 표정속도는 대략 시속 170km 정도이며 서울지하철의 표정속도는 시속 30km대에 불과하다. 역간 거리가 평균 4km 정도로 서울지하철보다는 길지만 정차시간이 훨씬 길었을 걸로 봐서 실제속도는 비슷했으리라고 추측되며 적어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빨랐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개통한 노선인데다 당시 기술 한계로 인해 느려 터진 노선이었지만, 당시에는 금강산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편안한 교통수단이었다.[4] 주 목적은 금강산 관광 목적으로 지어진 노선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본토의 일본인들도 일부러 경성까지 찾아와서 관광열차를 탔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따라서 봄·가을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경성역(훗날의 서울역)에서 직통 침대차가 운행될 정도였다. 화물수송 역시 창도 인근의 황화철광 광산 덕분에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창도역에서 채굴한 황화철광을 흥남의 닛치츠(日窒)콘체른 공장으로 수송했다.

1925년 186명이 이용한 데 그쳤던 관광객이 1938년에는 무려 24,892명으로 폭증하는 추세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약간 쇠퇴하기 시작한 1942년의 영업실적을 보더라도 여객 90여만 명, 화물 23만여톤의 수송량을 기록하였고 연 125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태평양 전쟁에 돌입하자 전기 사용 통제를 위해 금강산철도주식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5]로 합병된다. 또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철이 부족하게 되었고, 1944년 10월 금화군 창도면(현 창도군)에서 내금강 사이의 궤도를 불요불급선으로 여겨 철거해서 공출로 뜯어가는 바람에 사실상 폐선되었다.

그래도, 백두대간을 넘기 전의 구간인 철원군-창도군 구간은 광산인 유산철광 때문에 살아남아서 그냥저냥 굴러갔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전체 노선이 북한령이 되어 북한 철도성 관할이 되었고, 1950년 상반기까지 열차운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6.25 전쟁 터진 후, 일대에서 치러진 전투(저격능선 전투 등) 과정에서 포격, 폭격, 토치카 재료로 상당부분이 파손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분계선이 구간 상당 부분을 가로질러 완전히 폐선되고 말았다. 반면에 경의선, 경원선, 동해선은 일부 구간만 해당되어 복원 / 유지될 수 있었다. 심지어 시종착역인 철원역도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으로 인해 철도역뿐만 아니라 철원군 시가지 전체가 흔적만 남을 정도로 완전히 사라졌고, 이후에 안보상 이유로 복구하지 않고 방치했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정연리 금강산전기철도 교량을 비롯한 철교 몇 개, 그리고 경원선 폐선 구간처럼 구 노반이 지적편집도에 지목이 철도로 분류되어 있는 것 정도이다. 보전관리지역으로 지정된 철원역터 남동쪽으로 분기하여 옛 금화역까지 가는 구간까지 대부분 지목이 철도로 나와 있다.#

그나마 흔적조차 없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지라 남아 있는 구간은 존재하며, 민간인이 제약 없이 답사 가능한 지역은 동철원역-동송역-양지역 구간 전후 정도다. 금강산선이 철원역에서 서울 방면으로 분기했기 때문에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구간이 있었고, 이 우회구간 일부가 민통선보다 이남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원래 양지역이 있는 양지리 일대는 민통선보다 북쪽에 있었지만 두루미 철새도래지로 유명해지면서 2012년에 민통선이 조정되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단 이들 지역은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인데다가 미확인 지뢰가 있어 사진촬영을 할 때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금강산선의 구간 중 한국령인 곳은 광삼역까지이며, 그 다음 역인 하소역부터는 북한령으로 넘어간다. MBC에서 방영한 통일전망대에서 남측 구간을 답사한 영상이 있다.

당시 쓰였던 차량은 북한 철도성 혁명사적관에서 보존 중이다. #[6]

3. 재개통의 가능성

이후 현대그룹금강산 관광 개시, 제15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로는 경의선, 경원선, 동해북부선과 함께 부활 이야기가 오가는 노선이 되었다. 다만, 해당 노선의 공사 구간이 험한 산악지대인데다가, 북한 지역에 남아있던 노선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이설되어 같은 노선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정도이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노선의 상당수가 하필 군사분계선 부근에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노선보다 복구 우선순위가 상당히 밀린다.

또한, 과거의 노선에서 창도역 ~ 화계역 구간이 북한이 건설한 금강산댐으로 인해 수몰된 상태이므로 험악한 산골짜기에서 복구시 우회할 곳을 찾아야 하는 문제점도 있다. 따라서, 연결된다고 해도 거의 신설될 노선이라고 봐야 옳겠다.

그러나 수몰 여부에 상관없이 금강산선이 당시 노선 그대로 완전 복원이 가능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아직 남아 있는데, 통일 이후 시설물 정비 과정에서 금강산댐이 부실공사 판정을 받게 될 경우이다, 안전 문제로 저수량 축소 등의 조치를 취하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아예 댐을 터뜨려 버릴 확률이 100%이기 때문.

하지만 과거의 철도부지를 그대로 이용한다면 선형도 옛 선형을 따라 만들어야 하고 그러면 구불구불해서 속도를 낼 수 없는 현대에는 쓸모없는 거북이 철도밖에 못 만든다. 상당히 노반이 남아있는 동해중부선 등도 같은 이유로 전부 새로 만든다. 물론, 해당 지역이 개발이 되지 않은 만큼 토지 보상이 매우 쉽겠지만 그것은 과거 철도부지를 그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유곡~금곡 구간에서 DMZ로 들어갔다 금화역 부근에서 잠시 남쪽으로 나왔다가 그 후 DMZ로 다시 들어간다.) 위의 역사 문단에서 서술한것 처럼 50퍼밀의 구배가 있다면 더더욱 노반을 새로 닦아야 한다. 현재 코레일은 안전운행을 위해 철도 노선의 최급구배를 35퍼밀[7]로 규정하고 있는데, 50퍼밀이 넘게 될 경우 유사시 구원기의 투입이나 운행지장요소의 배제가 불가능하기에 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깝게 된다. 당장 단발령을 넘는 터널도 스위치백으로 운행하지 않기 위해 새 장대터널로 신단발령터널을 뚫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 또한 쉽게 해결이 가능한 것이, 복원 시에 경로만 원 선로대로 지으면서 운행하기 편하게 만들면 된다. 위 문단에 언급되었던 것처럼 일부러 급곡선이나 급경사를 만든 곳이 몇 군데 있기 때문.

그리고, 비무장지대가 50년 이상 사람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고 살아있는 생태계가 되었기 때문에 남북통일 이후에도 비무장지대를 그린벨트로 보존하여 생태계를 유지하자는 주장도 존재한다. 서독과 동독으로 나뉘어 있었던 독일의 경우는 유럽이라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국민들이 옛 '철의 장막' 지역의 땅을 사들이면서 그린벨트처럼 만든 선례가 있다. 물론, 국내에 도입해도 좋은 선례임은 틀림없는데 금강산선을 포함하여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철도/도로의 건설에는 충분히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다만, 비무장지대는 최대한 구불구불한 구간을 펴면서 새로 부설할 경우에는 최대한 자연이 훼손되는 면적을 줄이고 후술할 지뢰지대 또한 최대한 적게가는 식으로 갈수도 있다.

그리고, 경의선 복원 당시에도 지적받은 문제점이지만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철도/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선 비무장지대에 깔린 지뢰 등의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12km 남짓한 경의선 선로를 복원하는데 3년이란 기간이 걸린 것을 생각해보자. 또한 철원군의 옛 중심부는 비무장지대로서 지뢰밭으로 떡칠 되어 있는 상태이고 남은 부분 조차 휴전선이 가까운 탓에 철원군 중심부는 이미 동남쪽의 동송읍이나 갈말읍으로 옮겨진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철원역에서 그나마 수요를 잡아보겠다고 동송이나 갈말을 잇게된다면 동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선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차라리 신철원에 금강산선을 넣으려면 선형을 생각해서 철원역 분기 또는 백마고지역 분기보다는 신탄리역 분기 또는 연천역 분기[8]가 나을 수도 있다. 사실 신철원은 구철원에 비해 위도상으로 꽤나 남쪽이라서 철원군청은 신탄리역보다도 남쪽인 대광리역과 위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한편, 금강산선이 과연 다시 복원을 할 만큼 가치가 있는 노선인지도 검토해 봐야 한다. 본래 금강산선은 금강산 관광객을 빠르게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광철도였다. 덤으로, 이 노선은 경원선 외에는 접속되는 노선이 하나도 없어서 교통망의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밀린다. 물론, 남북통일 이후 금강산은 손꼽히는 관광지가 될 것이겠지만, 이를 위해서 비무장지대 전체를 헤집어 놓아야 하는 금강산선을 다시 복원할 가치가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중부내륙순환열차백두대간협곡열차처럼 금강산선의 복원으로 수려한 경치를 볼 수 있다는 장점과 경원선처럼 과거의 역사를 강조하는 마케팅을 한다면, 여행객들에게 충분히 인기를 끌 수 있는 관광 수요가 되는 상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북통일 이후 경의선, 경원선의 물동량이 늘어나면 금강산선의 운행이 다시 재개될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래서 차라리 금강산과 동해바다를 둘 다 구경을 할 수 있도록 동해안을 지나가는 바다열차로 철도를 놓는 편이 훨씬 낫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바닷가를 구경하려고 기차를 타는 수요는 이미 장항선강릉선 KTX만 봐도 관광 수요가 충분할 가능성이 크다.

덤으로, 남북통일 이후 해당 구간에 전철화를 하려면, 남한(교류)과 북한(직류)이 전류 방식을 다르게 쓰기 때문에 남북한 철도계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매우 낙후된 북한의 철도 환경을 고려하면 남한의 전력방식으로 일괄 통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장에 북한은 전철화된 노선 자체는 많지만 매우 부실한데다가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어차피 새로 노선을 깔아야만 한다.

만약에, 금강산으로 지나가는 철도가 다시 복구되더라도 옛날 금강산선처럼 금강산 서쪽 내금강과 서울을 잇는 경로로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강선이나 춘천속초선을 통하여 동해선(동해북부선, 금강산청년선)으로 접속시키거나 혹은 경원선을 경유해 안변역부터 내려오는 방식으로 금강산의 동해 바다 쪽 방향인 외금강을 잇는 식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경원선과 접속되는 지선인 금강산선보다는 부산에서 포항, 울산, 강릉, 속초, 삼척, 철원, 동송, 금강산(해금강), 원산, 함흥, 나진을 거쳐서 러시아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계통의 철도로 한반도 동해안을 남북으로 쭉 연결하는 루트의 간선 철도로서 훨씬 가치가 클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춘천속초선 양구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지선을 놓자는 떡밥도 있는데, 정말로 이게 실현이 된다면 옛 금강산선의 부활은 더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결국, 금강산선 복원은 창도군의 철광석 수송을 위한 화물노선 + 경원선의 물동량을 분산하는 바이패스 노선 목적으로 금강산청년역까지 연장하여 동해선과 직결해야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도 선형이 양호한 철원-금곡 구간을 제외하고, 중앙선이나 경강선처럼 터널과 교량으로 떡칠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옛 노반은 비무장지대를 지나고 금강산까지 연결되는 자전거길로 활용되는 것이 나을 편이다. 어차피 낡을대로 낡았고 관리가 안 된 노선으로 현대식 철도가 지나가기에는 위험도가 너무 크다.

한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사업의 일환으로 경원선 남측 구간 (철원역, 월정리역) 복원 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경원선금강산선의 분기점인 철원역2017년 11월까지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2016년 6월에 공사가 중지되었다.

상술했듯이, 원래 금강산선이 영업했던 시절에는 철원역 남쪽으로 분기했었지만 다시 부활하게 된다면 서울에서 올라오는 열차도 직통이 가능하도록 삼각선을 설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남북통일이 될 경우, 수도권 전철 1호선 경부선천안역까지 연장되고 천안~신창까지의 장항선 구간도 1호선이 들어가듯이, 철원역을 지나 금화역 짧게는 신철원 동송역까지 금강산선 구간도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편입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4. 금강산선 연혁 및 역 목록

4.1. 금강산선 연혁

  • 역사
    • 1919년: 쿠메 타미노스케(久米民之助)에 의해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설립. 동 년에 건설 인가 획득.
    • 1924년 8월 1일: 철원~금화 간 28.8km 개통
    • 1924년 10월 27일: 전기운전 개시
    • 1924년 12월 20일: 금화~금성 간 16.6km 개통
    • 1926년 9월 15일: 금성~탄감 간 8.6km 개통
    • 1927년 9월 1일: 탄감~창도 간 8.2km 개통
    • 1929년 4월 15일: 창도~현리 간 15.1km 개통
    • 1929년 9월 25일: 현리~화계 간 12.0km 개통
    • 1930년 5월 15일: 화계~말휘리 간 13.3km 개통
    • 1931년 7월 11일: 말휘리~내금강 간 8.6km 개통. 전 구간 개통.
    • 1942년 1월 1일: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합병.
    • 1944년 10월 1일: 전시공출 명령에 의해 창도~내금강 간 49.0km 선로 철거, 폐지.
    • 1950년 - 한국전쟁으로 전 구간 폐지.
    • 2017년: 철원역(금강산선, 경원선) 복원 예정 (경원선 복원 사업정 (근데 백지화)
  • 노선 정보
    • 노선 거리: 116.6km
    • 운영 기관: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개업~1942), 경성전기주식회사(1942~1945)
    • 궤간: 1435mm(표준궤)
    • 통행 방식: 좌측통행
    • 역 수: 28
    • 복선 구간: 철원역 내 인입선 등을 제외하면 없음
    • 전철화 구간: 전 구간, 직류 1500V
    • 보안 장치: 없음

4.2. 금강산선 역 목록

<rowcolor=#1f2023> ㎞ 역명 분기노선 해방전 행정구역 비고
0.0철 원 鐵 原 경원선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1.6사 요 四 要
3.2동철원 東鐵原
6.0동 송 東 松 동송면
10.3양 지 陽 地 어운면
14.2이 길 二 吉
17.5정 연 亭 淵 평강군 남면
21.5유 곡 楡 谷 금화군 근북면
24.5금 곡 金 谷
28.8금 화 金 化 금화읍
33.0광 삼 光 三 근동면 휴전선 남측 GP 최북단. 참고로 여기서부터 제5군단 제3보병사단 18여단에서 제2군단 15사단 39여단 관할.
36.3하 소 下 所 옛 금화권 지역. 휴전선 북측GP 최남단
40.1행 정 杏 亭 옛 금화권 지역 마지막 구간
45.8백 양 白 楊 원남면
51.0금 성 金 城 금성면
54.0경 파 慶 坡
59.6탄 감 炭 甘 원북면
65.6남창도 南昌道 창도
67.6창 도 昌 道 노선단축 이후 종착역
75.3기 성 岐 城 금강산댐 수몰구간
82.7현 리 縣 里 통구면 금강산댐 수몰구간. 주변에는 현재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연대가 있다.
90.0도 파 桃 坡 금강산댐 수몰구간
94.7화 계 花 溪
99.3오 량 五 兩 스위치백 서측
104.8단발령 斷髮嶺 회양군 내금강면 스위치백 동측
108.0말휘리 末輝里
112.4병 무 竝 武
116.6내금강 內金剛 종착역. 현재 이곳에는 북한의 내강소학교가 있다고 한다.

[1] 지금도 금강산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한민족을 대표하는 명산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금강산을 '한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관광지' 중의 하나로 높게 평가하며, 신라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수많은 문학과 예술의 배경이자 인기가 많은 관광지였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동해안으로 놀러간다고 하면 으레 경원선을 타고 원산이나 금강산으로 놀러간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명성이 높았다.[2] 그 일본에서도 ATS가 각 선구에 보급된 건 패전 이후이다.[3] 파나마 운하로 배가 산을 넘기 위해서 올라갈 때에는 도크에 물을 담고, 내려갈 때 도크의 물을 빼는 것과 비슷하다. 배는 물을 넣고 빼서 수직으로 오르내릴 수 있지만, 기차는 그럴 수 없으니 스위치백으로 오르내리는 것이다.[4] 유홍준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금강산편에 따르면, 금강산선 개통 이전에는 원산까지 경원선을 타고 간 다음 동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 금강산으로 갔다.[5] 일제강점기 서울전차를 운행했다. 1961년에 이 경성전기와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한국전력공사가 탄생했다.[6]원산역 건물에 보존된 파시형 증기기관차도 상태가 우수하다. 사실 금강산선 전동차, 파시형 증기기관차 모두 김일성이 탑승한 열차라서 보존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잠시 앉은 의자도 플라스틱 덮개를 씌워서 보존할 정도로 김씨 일가 우상화에 목숨을 거는 것이 북한이다.[7] 비교를 위해 현재의 철도로 설명하면, 도시철도법상의 경전철에서는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의 아시아드경기장역~검바위역 구간이 55퍼밀로 가장 급한 경사를 갖고 있다. 경전철을 제외한 도시철도법 적용 구간으로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영등포구청역~당산역 구간이 35퍼밀, 국유 간선철도 구간에서는 경의선의 효창공원앞역~용산역 구간이 34.5퍼밀이다.[8] 또는 동두천, 덕정, 양주, 의정부 분기를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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