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9 19:32:25

후백제 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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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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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191970> 후삼국시대의 군주· 후삼국시대의 호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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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백제 도성
국가·위치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1. 개요2. 역사
2.1. 후삼국 시대2.2. 이후2.3. 사서에서
3. 유적
3.1. 물왕멀 일대3.2. 동고산성 일대3.3. 인봉리 기자촌 일대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대한민국 전주시 완산구에 위치한 후백제의 도성이다.

스스로 '백제대왕(百濟大王)'이라 칭한 견훤은 37년간 완산주, 즉 전주에 성을 쌓아 수도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허나 고려가 천하를 손에 넣은 이후 전주도성은 몰락하고 만다.

2. 역사

2.1. 후삼국 시대

신라 말기,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이 와중 견훤은 신라의 장군에서 점점 군벌로 성장하여 스스로를 상주국(上柱國)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이라 칭했으며 점차 한반도 서남부를 자신의 거점지로 확대하였다. 900년, 견훤은 당시 신라 완산주, 현 대한민국 전주시 일대를 수도로 선포하고 백제(百濟)의 부활을 천명한다. 견훤대왕은 수도에 궁궐과 성벽을 쌓았는데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다.

2.2. 이후

고려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제압한 이후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완산주까지 내려와 후백제 도성에 입성, 자신이 이겼음을 천하에 공표했다. 이후 도성은 역사에서 잊혀진다. 현 대한민국은 도성의 유적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https://www.ytn.co.kr/_ln/0115_201311240624157184
후백제 도성의 결말에 대해 (YTN 기사)

한때 고려가 후백제 도성 자리를 저수지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었다.

군사시설인 안남대도호부를 전주 부근에 설치하면서 옛 견씨 왕실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자 그곳을 아예 수몰시켜 버렸다는 것. 물론 후백제 도성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 크기 그리고 성벽 등, 도성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지금 시점에서는 단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후백제보다 훨씬 오래전인 과거 백제의 도성들, 위례, 웅진, 사비성들은 얼추 위치의 윤곽이 다 드러났는데 그보다 현대에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후백제 도성은 2010년대쯤에야 그 위치를 알아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고려가 이들의 자취를 없애는데 매우 신경썼을거라고 추측되기도 했다. 한 때의 적국이었던 태봉의 태봉국 철원성연구불가지역이라서 그렇지 도성의 위치, 대략적 구조는 이미 다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후백제는 가장 최근 시기까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3. 사서에서

고려사에 단 한번 등장한다. 태조 세가 19년(936년) 9월에 고려 태조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의기양양하게 '백제도성(百濟都城)'에 들어간다.[1]
"거괴(渠魁)는 이미 빚을 갚았다. 내 적자(赤子)들을 해치지 말라."

여기서 거괴는 괴물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적자는 자신의 피붙이를 말한다. 신검대왕황산벌에서 체포하고 백제 군대는 해체 됐으니 더 이상의 살상을 피하겠다는 의미이다. 태조는 이 명령을 내린 뒤 철저히 백제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 했다고 한다.[2] 근데 이건 고려사 기록이고 고려사는 고려실록의 기록을 가져 온거라 실제 후백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알기 어렵다.

3. 유적

파일:external/dimg.donga.com/62796653.1.edit.jpg

후백제의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 네 곳 중 하나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현 전주 시청 동쪽인 물왕멀 일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동고산성, 21세기 들어서는 조선 시대 전라 감영이 있던 완산구 중앙동 일대, 이후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후백제 당대에 지어진 목조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일부 석조 건축의 터들이 남아 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416/62796657/1
전주 후백제 왕궁 추정지 (동아일보 2014년 4월 16일 기사)
2014년 중노송동 인봉리의 발굴 조사를 통해 이 일대가 왕궁지로 확실시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참조.

3.1. 물왕멀 일대

1940년, 일제강점기 때 책자 '전주부사(全州府史)'가 발행됐다. 당시 물왕멀 일대에 수 많은 기와 조각, 자기 그릇 조각, 성벽의 일부였던 돌멩이 등이 발견되어 옛 궁성(宮城)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있었다. 많은 성곽 유물이 드러난건 사실이지만 당시 후백제 시대의 성곽은 굳이 궁성이 아니더라도 여기저기에 축조되어 서 있었다. 그러니 여기가 궁성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는 셈이다.

물왕멀 일대는 현 전주시청과 전주고등학교 근처인 노송동 일대다.

3.2. 동고산성 일대

1980년부터 2014년까지 동고산성은 큰 관심을 받았다. 동고산성(東固山城)은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 일대에 걸쳐 있다.

동고산성은 대략 신라 신문왕 대에 1차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차로 9세기 즈음에 대대적으로 개조, 보수 되는데 이 때 견훤이 궁성으로 바꿨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고산성은 총 1,600m의 둘레이며 발해 상경성의 황, 궁성과 비슷하다. 가장 큰 건물터는 가로 22칸, 세로 3칸이며 총 7 군데의 대건물터가 있다.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으며 정문은 서문으로 보인다. '전주성(全州城)'이라 적힌 수막새가 발굴됐고 관(官) 자 기와, 천(天) 자 기와가 계속 발견됐다. 조선 숙종 대에 편찬된 '전주 성황사 중창기(全州 城隍祠 重創記)'엔 이 곳(성황당터)이 견훤의 옛 궁궐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동고산성이 확실한 듯 싶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부정되고 있는데, 일단 너무 접근성이 떨어진다. 만약 진짜 동고산성이 도성이었다면 한때 한반도 서남부를 손에 넣고 동남부를 휩쓸고 북부까지 휘젓고 다닌 나라의 수도치곤 지나치게 깊숙한 곳에 있다. 그리고 산성의 크기가 궁성 정도의 크기이고 궁성 밖의 내성, 외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1980년대에 전영래(全榮來, 1926~2011) 원광대 교수[3]는 동고산성을 궁성으로 보고 주위에 내성(황성), 외성(나성)이 둘러 쌓고 있었을 거란 주장을 펼쳤다. 동고산성은 평범한 산성이라고 하기엔 대형 건물터가 많고 면적도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현재의 학계의 결론은 동고산성, 그러니까 당시 '전주성(全州城)'은 비상용, 전시용 궁성으로 보고 있다. 마치 고구려의 대성산성 - 안학궁, 신라의 경주 주변 산성 - 경주 월성처럼 말이다. '접근성 낮은 산성 궁성'[4]이 하나 있고 '접근성이 높은 평지 궁성'[5]이 있는 것이다.

3.3. 인봉리 기자촌 일대

2020년대 기준, 가장 유력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은 2023년 4월 기자촌재개발조합으로부터 유적발굴조사를 의뢰받은 뒤 2024년 9월까지 주요 유적을 발굴하고, 유물을 수습했다. 연구원은 재개발지역 중앙부에서 건물지 세 군데를 확인했다. 1호 건물지는 동서방향으로 19미터 정도의 기단이 남아 있으며, 원형 적심에 석영계 할석을 채워 넣었다. 적심간 거리는 정면 4미터, 측면 2.2미터, 적심의 직경은 1.5미터 안팎이다. 기단의 바깥 쪽에는 다량의 선문계 기와 조각이 모여 있었다. 2호 건물지는 1호와 동일한 동서방향으로 7미터 정도 남아 있다. 3호 건물지는 1구역의 남동쪽에 자리하며 적심 세 개가 북서-남동방향으로 배치돼 있다. 연구원은 궁성 후원 건물로 보고 있다.

또한 궁성 내 도로시설도 확인되었다. 도로시설은 북에서 남쪽으로 경사면을 따라 북동-남서방향으로 40미터 정도 길게 이어지며 폭은 4미터 정도이다. 도로시설은 동쪽의 경우 'L'자형으로 굴착을 하고, 석재를 바깥으로 면을 맞춰 2단 내외로 쌓았다. 서쪽은 황갈색 점토로 대지를 조성해 석재를 바깥으로 맞추고 2-3단으로 쌓았다. 내부에는 할석과 기와로 채우며 점질토를 쌓아 도로시설을 했다. 부지의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목책, 망루를 세울 때 판 주공군이 확인됐다.

후백제 궁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적과 유물은 이에 앞서 여러 번 확인됐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이 2017년 12월 인봉제 일원에 조성된 문화촌 지역을 시굴 조사한 결과, 뻘층에서 인위적으로 다듬은 가공 석재가 출토됐다. 2018년 12월 후백제 궁성지의 북동벽으로 추정되는 네 군데를 조사한 결과, 주공과 선문계의 후백제 기와가 드러났다. 궁성지의 남 성벽과 서 성벽이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주 정보문화산업진흥원 남쪽 주차장도 2019년 9월 조사 결과 풍화암반토를 다듬어 대지를 조성한 흔적과 점토를 성토한 흔적이 확인됐다.전라일보 기사

후백제 궁성 추정지에서 확인된 유적과 출토된 유물을 보존하는 방안은 세 가지이다. 즉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안, 이전해서 보존하는 방안, 기록을 보존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지만 이 지역이 재개발 지구라는 것인데, 때문에 전주시의 경우엔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기록보존 절차를 밟을 예정(=즉 유적지 자체는 재개발을 위해 묻거나 밀어버릴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전북지역 향토 고고학자들은 단체로 반대 성명을 냈다.#[6]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태조 왕건에서 견훤이 독립해 나라를 세워 무진주(무주)에서 완산주(전주)로 도읍을 정하고 백제의 부활을 선포하는 30화 부근으로 해서 작중 백제의 수도인 완산주 궁궐로 백제 측이 나올 때 자주 비춰졌다. 궁궐을 세울 때에는 오다련 등 서남해 지역의 지방 세력가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묘사되고 이것이 나주 일대가 나중에 태봉에 넘어간 대표적인 원인이 되는 것으로 묘사되나, 공사가 끝난 뒤에는 고생하거나 백성들이 유리걸식을 한다거나 하는 장면은 없어 태봉국 철원성과 비교하기는 어렵다.[7]

실제 태조 왕건 촬영장에서는 고려의 송악 황궁 바로 맞은편에 완산주궁이 있었으며, 시대 배경상 바로 이어지고 대본을 집필한 작가도 똑같은 제국의 아침에서는 완산주궁으로 쓰이던 건물이 고려 황궁의 일부로 쓰이기도 했다.
[1] 고려사에선 후백제의 본궐을 백제 도성이라 칭했다.[2] 그래서 그런지 견훤의 후손인 황간 견씨가 아직 남아있다.[3] 전주성 수막새를 찾아낸 교수.[4] 전시 궁궐.[5] 평상시 궁궐.[6] 사실 한국에서 이런식으로 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도 경제논리에 의해서 싹 다 밀어버리거나 그대로 묻어버리고 공구리 치는 일은 한둘이 아니긴 하다. 다만 이 유적은 워낙 대규모기도 하니 반발이 꽤나 있는 것.[7] 오다련, 종례 등에게 중과세를 거두는 묘사는 있었으나 철원성과는 달리 백성들을 무리하게 사민시켰다는 언급은 없었고, 타락한 이후에는 태봉의 실상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북벌을 외쳐댔던 궁예와 달리 견훤은 나름대로 백성을 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사를 가끔씩 하기도 했으며 석총처럼 이것이 위선이라고 비판하는 인물은 딱히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