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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민


일제강점기 도시 빈민층의 상징
파일:일제강점기 토막A형.jpg
1. 개요2. 어원 및 정의3. 역사
3.1. 도시화와 토막민의 등장3.2. 생활수준
4. 대표적 토막민 지역5. 조선총독부의 대응
5.1. 부정적 시선과 통제5.2. 차별과 낙인5.3. 통계와 보고
6. 관련 사건7. 문학과 기록8. 토막민 구제 사업9. 이후의 변화10. 관련 문서11. 참고 자료

1. 개요

토막민(土幕民)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시 빈민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서울(당시 경성)과 같은 대도시 외곽에서 '토막(土幕)'이라 불리는 임시 움막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토막'은 흙과 천, 판자, 풀 등으로 만든 비공식·임시 주거 형태로, 현대의 쪽방이나 비닐하우스형 거처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일용노동자, 실직자, 농촌 이주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2. 어원 및 정의

土(흙 토) + 幕(장막 막): 흙과 천막, 잡자재로 만든 가건물
민(民): 거주민, 즉 그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

토막은 법적 주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도시계획에도 포함되지 않은 비공식 빈민 주거지였다. 따라서 수도, 전기, 위생시설이 전무했으며, 화재, 전염병, 범죄의 위험에 자주 노출되었다.
요컨대 토막민은 조선인 빈궁계급이 도시의 일우(一隅)에 군거(群居)하여 비참한 빈민굴을 형성하게 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시영세민에 불과한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토막민이라는 특수한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가. 이처럼 굴욕적인 명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토막민을 조선의 다른 도시영세민과 구별하는 유일한 상이점은 그들 토막민이 토지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내나 교외를 불문하고 제방 · 강바닥(河原) · 다리밑 · 산림 등의 유한지(遊閑地)를, 관유지 · 사유지를 가릴 것 없이 무단으로 점거하여 특유의 극히 초라한 움막을 지어 살고 있으며 날마다 달마다 그 수가 늘어가서 마침내는 비참과 혼잡과 불결을 특색으로 하는 이른바 토막부락에까지 발전하는 것이 상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의 불법점거는 오로지 그들의 절박한 빈곤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당국으로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토막가옥의 그칠 줄 모르는 범람이 도시미관상 및 도시위생상 커다란 문제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시영세민을 토막민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게 되고 이 명칭이 점차 일반에게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 · 사유지를 무단점거하여 거주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토막의 어원은,「막(幕)」은 조선어의「막」에 해당하는 자(字)이며 주막 · 원두막 · 오막살이 등의 막(幕)과 어원이 같으며 「토(土)」는 토벽 또는 황벽(荒壁)이라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요컨대 「토막(土幕)」은 허술한 움막을 가리키는 말이고 「토막민(土幕民)」은 그속에 거주하는 자라는 뜻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토막의 발생은 조선에 근대자본주의가 유입된 한일병합 이후의 일에 속하며 또 그것이 하나의 사회문제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더욱 훗날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정 8년(1919, 기미)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사전에서 아직 토막이라는 낱말이 수록되지 않았음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土幕民の生活. 衛生, 경성제국대학위생조사부

3. 역사

3.1. 도시화와 토막민의 등장

일제는 조선에서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도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며, 조선인보다 일본인 거주민과 식민 관료층을 우선시하는 차별적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1920년대 이후 경성, 평양, 대구, 부산 등 주요 도시 인구 급증과 산업 노동자 수요와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실업자·이농민 급증했다. 실제로 1921년에 경성부가 행한 가옥조사의 결과, 경성에 있는 가옥은 3만9천호이고 한 호에 월세, 전세의 형태로 거주하는 가구를 모두 합해 5만4천호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가구 수에 비할 때 1만5천호 정도의 집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 내 공식 주택은 일본인 및 고위층 위주로 공급이 이뤄졌고, 결과적으로 조선인 빈민층은 도시 외곽의 빈 땅에 비공식 거주지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토막민이 대거 발생했다.

1936년 경성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토막민이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실업자와 세궁민 등이 경성 전체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했다.

3.2. 생활수준

① 당시 서울토막민의 약 3분의 2는 빈농으로서 이촌향도한 사람들이며 나머지는 원주민 중의 빈곤생활자들이다.
② 그들 토막민을 인구론적으로 관찰하면 20∼30대의 청장년층의 수는 적고 혼인은 제약되어 출생률은 낮으며 자녀 사망률이 매우 높아 극빈자 특유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③ 토막민과 다를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는 조선의 농촌 · 도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앞으로 토막민은 이들을 원천으로 하여 계속 강하게 늘어갈 것이며 특히 농촌으로부터의 유입이 성해질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④ 토막민들의 직업은 날품팔이(일용노무자) · 인부 · 직공 · 행상 등 육체노동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특수기능보유자는 대단히 적다. 근년(近年)의 물가와 노임(勞賃)의 앙등(仰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루 평균수입은 남자 1원 20전, 여자 56전에 불과하다. 여자의 취업률은 대단히 낮다.
⑤ 총지출중에서 음식비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총수입액의 71%에 달한다.
⑥ 부채(負債)는 1호당 평균 34원8전이며 빈곤의 도가 지나쳐서 빚(차금(借金))을 낼 수 없는 자도 적지 않다.
⑦ 주거생활의 비참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고 집이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임시가설물 같은 것이 많다. 한 가구가 한방만 쓰는 집이 총호수의 80% 이상에 달하고 1인당 평균거주평수는 0.45평(1.485㎡)에 불과하다.
⑧ 1인당 의류수는 하동복(夏冬服)을 합쳐 3.5벌밖에 안되며 한벌 옷으로 지내는 자가 과반수이다. 1호당 평균 침구수는 이불 1.6매, 요 1.4매에 불과하다.
⑨ 토막민 성인남자가 하루에 섭취하는 총열량은 약 2,770칼로리이다. 부식물은 일반적으로 단백질이나 지방질이 적고 된장과 같은 가장 값싼 단백원마저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⑩ 토막민의 80% 이상이 한글도 읽지 못한다.
⑪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토막민은 아무런 적극적 희망을 가지지 않고 극빈생활에 깊이 빠져 오로지 그날 그날의 생활에만 급급하고 있다.
⑫ 토막민의 생활상태는 의식주 기타 모든 측면에서 고찰하여 가장 비참하며 일본영토내의 제영세민중 최하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⑬ 이들 토막민에 대하여 관할관청(경성부청 기타)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고 그 장래는 참으로 우려할 상태에 있다
土幕民の生活. 衛生, 경성제국대학위생조사부

4. 대표적 토막민 지역

  • 경성부 성북동, 청량리, 동대문, 창신동, 신설동 일대
  • 한강변 하류, 청계천 하류, 마포 일대 등 수변지역
  • 철도 주변: 철도노동자 및 실직자 중심의 토막촌 형성
"경성부 외곽에는 천막을 두르고 구덩이를 판 집들이 산비탈을 따라 줄지어 있다"
— 당시 일본 경찰의 보고서

5. 조선총독부의 대응

5.1. 부정적 시선과 통제

조선총독부는 토막민을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다. 언론과 관공서는 토막촌을 "풍기문란, 범죄 발생지, 전염병의 온상"으로 묘사했다.

1930년대 이후, 도시 미화 및 위생 정책 명목으로 토막촌 강제 철거가 자주 이뤄졌다. 일부 구호 정책은 있었지만, 근본적 대책은 거의 없었다.

5.2. 차별과 낙인

조선 상류층과 일본인 사회에서는 토막민을 불결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간주됐다. 이들은 취직, 교육, 보건 등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받았으며,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밀려나 있었다.

5.3. 통계와 보고

조선총독부 통계(1930년대 중반 기준)에서는 경성 외곽의 토막 거주 인구를 약 3만~5만 명 수준으로 파악했으며, 전체 경성 인구의 5% 안팎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비공식 거주지였던 만큼 실제 인구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

6. 관련 사건

이와후치(岩淵幸三郞)의 토막촌 철거사건(1933)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부동산 업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망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토막촌 철거가 진행되었다. 일제는 토막민을 부동산 거래와 도시 개발의 장애물로 간주했으며, 미관, 위생, 교육상으로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대도시 일대 토막민을 한 곳에 수용하고 기존 토막을 철거하는 '토막정리사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주택 건설을 명분으로 진행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7. 문학과 기록

1930년대 신경향파 문학에서는 토막민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염상섭, 현진건 등의 작품에서 가난, 실업, 주거 문제를 중심으로 한 토막민의 삶이 종종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8. 토막민 구제 사업

1930년대 후반 일부 민간 자선단체 및 종교단체 중심으로 토막민 구호 활동 진행됐다. 그러나 규모가 작고 단기적인 전시행정에 가까웠고, 식민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큰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토막집을 정리해 나갔다.
“조선총독부와 경성부는 토막민들을 구슬려 속이거나 강제로 징집해 일본 홋카이도나 사할린 탄광으로 징용해갔다”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1996년),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9. 이후의 변화

광복 후에도 토막민은 계속 존재했으며, 해방 직후~한국전쟁 시기에는 전쟁 난민과 합쳐져 더욱 확산됐다. 이후 1960~70년대 도시정비사업을 거치며 상당수가 달동네쪽방촌으로 흡수된다.

10. 관련 문서

11. 참고 자료

  • 조선총독부 관보 및 통계연보
  • <토막민의 생활과 위생>, 경성제국대학위생조사부
  • 《경성부의 빈민정책과 도시 계획》(서울역사편찬원)
  • 채만식,《레디메이드 인생
  • 서울대학교 도시사회연구소 논문집
  • 조선일보(1930~1937년) 아카이브 기사
  •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강만길
  • 유치진, <토막>

[1] 통계상으론 부랑민, 걸인(거지), 행려병자 등등이 포함되지 않았거나, 혹은 중첩된 부분도 있었기에 실제보다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