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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기원은 옛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사람은 선사시대부터 살았던 모양으로, 그 옛날 바다가 창원 분지 한복판까지 들어차 있던 시절의 흔적은 성산구에 있는 성산패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저런 부장품들이 출토되는 걸로 봐서는 단순한 그 시절 조개껍데기 투척장소는 아니었던 듯하다. 여튼 따뜻하고 바다까지 끼고 있어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역사에 등장하는 창원의 첫 모습은 삼국지에 나타난다. 이 시절 창원지역에는 변한의 미오야마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가 가야의 금관국의 압박으로 마산 현동지역으로 옮겨 골포국(骨浦國)으로 바뀌어서 이웃나라들과 제휴해 포상팔국(浦上八國)울 구성해 금관국 및 신라와 항쟁하다가(포상팔국의 난 문서 참조) 패하고 이후 구 창원지역에 탁순국(卓淳國)이 들어섰다. 탁순국은 이후 신라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 항복해 복속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초기 창원시의 옛 지명은 굴자군(屈自郡)인데, <삼국유사>와 <고려사>에는 구사군(仇史郡)이라고 나오며, <일본서기>에는 구사모라(久斯牟羅), 또는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이라고도 나온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하면서 의안군(義安郡)으로 바꾸었고, 의안군 휘하에 3개의 영현을 두었는데 칠제현(漆隄縣, 함안군 칠원읍), 합포현(合浦縣, 마산합포구), 웅신현(熊神縣, 진해구)이었다. 이 때부터 창원, 마산, 진해 지역이 밀접하게 행정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합포현의 경덕왕 이전 이름은 '골포현'이었는데 합포구의 기원이라 전한다. 한때 남북국시대의 유학자 고운(孤雲) 최치원이 기거했으며, 그 흔적과 전설이 돝섬과 월영대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2. 고려 시대
현 어린교 부근을 합포라고 불렀는데 삼호천, 양덕천, 봉암천 등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한편 배극렴이 왜구방어를 목적으로 합포성을 축조했다. 현재의 '합성동'이 바로 합포성에서 유래했다. 합성동 일부 시가지에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려가 몽골이 요구한대로 일본을 칠 때에 출정지가 되었고, 1281년에 의안현을 의창현(현 의창구 명칭 기원)으로, 합포현을 회원현(현 마산회원구 명칭 기원)으로 바꿨다. 동시에 회원현 완포향(莞浦鄕)을 완포현으로 승격시켰다.
13세기 말부터 세종 대에 대마도를 완전히 정벌할 때까지 회원(합포)현이 왜구와 격전지였다. 이 때에 싸우다 죽은 무명 의병 장군[1] 무덤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마산합포구 장군동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최영 장군도 이 일대에서 왜구 토벌로 전공을 세웠고, 4군 6진의 그 최윤덕 장군 또한 현재의 창원 의창구 출신이기도 하다. 소싯적 왜구들을 물리친 경험이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4군을 개척하는 데 많은 도움이되었을 것이다.
3. 조선 시대
창원(昌原)이라는 이름은 1408년(태종 8년)에 처음 등장한다. 1408년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부(昌原府)를 설치하였는데 의'창'과 회'원'에서 한 자씩 따 왔다고 전해진다. 1413년(태종 13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겸 도호부사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 가운데 일본군에게 항복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공적을 치하하여 1601년(선조 34년)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661년(현종 2년) 객사의 전패를 분실했다는 이유로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670년(현종 11년)에 다시 대도호부로 복귀하였다.3.1. 구한말
1906년 대한제국의 월경지 정리 이전까지의 행정구역 상황. 구산면은 원래 칠원군(현 함안군 칠원면, 칠서면, 칠북면 일대를 관할하던 옛 군)의 월경지였으며, 대산면은 김해군에 속해 있었다. 1906년 구산면과 대산면은 창원부로 편입되었으며, 진주군 양전면은 진해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창원부, 진해군, 웅천군은 1908년 창원부로 대통합되었다. |
대한제국 시대에 이르러 1899년 창원부 마산포(당시 창원부 외서면)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2]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부터 현재의 신마산 월영동, 월남동 일대에 일본이 조계지를 건설[3]했고, 현재의 월영마을 아파트촌에는 러시아인 조계지가 있었다.[4] 일본/러시아 조계지와 마산포 사이에는 허허벌판과 백사장만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두고 구마산(원마산)과 신마산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한편 구마산과 마산포 사이 철로변에는 중국인들이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는데, 지금의 창동네거리에서 부림시장, 서성동 일대 블록이다. 그러나 화교들은 1910년대쯤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상권을 빼앗기고 철수한다.[5] 철로 너머에는 관립 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것이 마산성호초등학교의 전신이다.[6]
일본 제국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이 지역의 지리적 이점[7]에 눈독을 들였고 군사적으로 활용했다. 삼랑진으로부터 분기하는 철도를 부설하여 진해선을 부설하였고 창원역으로부터 일본인 조계지인 신마산까지 철도를 연장, 백사장을 매립한 후 부두 항만시설을 만들었다. 이것이 경전선의 전신인 옛 마산선으로, 철로의 흔적은 현재의 합성동-불종거리 사이 3.15대로로 남아 있다.[8] 옛 마산역은 마산중부경찰서 앞에 1977년까지 있었다. 원래는 여객용이 아닌 군용 선로였으나, 마산역에서 진주역까지 이어지는 경남선이 개통된 이후에는 여객영업을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 당시의 기차는 부산역에서 삼랑진으로 갔다가 다시 신마산까지 남하한 후, 철로를 도로 거슬러올라가 진주로 갔던 것이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운용은 1977년 소위 3역통합[9]이 이루어진 후 해소되었다.[10] 현재 마산시내 시가지를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항만인입철도 '임항선(마산항제1부두선)'은 옛 경남선의 흔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마산역 항목 참조.
4.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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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개편된 마산부와 창원군. 당시의 마산부 영역은 현재의 마산합포구 시가지 일대만이 해당되었다. 일본인 조계지였던 월영동, 두월동 권역과 현재의 어시장인 원마산 일대를 포함한다. |
일본어로는 마산(まさん, Masan)[11]이라고 독음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과 함께 창원부는 마산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시가지를 부(府), 외곽지역을 군(郡)으로 분리하는 조선총독부의 도농분리정책에 따라 마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12]로 축소시키고, 마산부의 나머지 영역을 창원군으로 분리시켰다. 원래의 창원읍치 지역인 현 창원역 인근 보다도 훨씬 번성했는지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에 창원군청은 마산에 설치되었다.
마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과 일본을 오고가는 사람들과 물자들로 북적이는 항구로 급부상했다. 일제강점기 후기 마산의 인구는 5만 4천명 정도로 전 경남도청소재지였던 진주와 맞먹는 정도였으며, 경상도에서는 부산과 대구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일제 당국은 국유지로 묶여 있던 중앙동 백사장 일대에 구획정리를 실시하고 도로를 놓았다. 옛 마산시청과 세무서,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등이 모두 이 일대에 몰려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 있다. 중앙동이란 지명 자체가 이 당시에 개발하며 붙은 '중앙마산'이라는 지역구분에서 유래했다. 원마산과 신마산 중앙부에 붙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1918년 부내면이 창원면으로, 웅읍면이 웅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31년 진해지정면이 진해읍으로 승격되었다. 1942년 내서면, 창원면, 구산면의 일부가 마산부로 편입되었다.
5. 광복 이후~현재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마산부와 창원군의 행정구역 상황. 일제 말기인 1942년 내서면과 구산면의 각 일부, 창원면의 봉암리 등이 마산부에 편입되어 마산 시가지가 좀 더 넓어졌다. |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며 마산 시가지는 피난민들과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 그리고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경남대학교 앞의 '해방촌'이 생겨난 것도 이 즈음이다. 1949년 8월 15일 마산부가 마산시로 개칭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따른 3.15 의거(마산시위)는 당시 마산의 한국 내 도시규모를 보여주는 예 중 하나이다. 동아일보에서는 이만섭(전직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자 국회의장도 역임했던 그 이만섭 맞다.) 기자를 특파원으로 보내놓고 있었을 정도였다. 마산발 항쟁은 전국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 즈음의 마산은 그야말로 대처(大處)였다. 이때가 마산의 최전성기였고, "전국 7대 도시" 소리 듣던 시기다. 한편, 창원군 진해읍도 1955년 진해시로 승격되었다.
1973년 마산시의 행정구역 확장 당시 상황. 창원군 내서면 일부, 구산면 일부를 흡수하여 현 마산 동 지역 경계가 이 때 완성된다. 또한 박정희 정부의 남동임해공업단지 계획이 탄력을 받으면서 옛 창원시 시가지에 해당되는 창원군 창원면, 상남면, 웅남면 일대가 마산시에 편입되었는데, 이후 1976년에 이들 지역을 별도로 관할하는 경상남도 직할 창원지구출장소가 설치되었다.[13][14] 같은 해 진해시 역시 창원군 웅천면을 편입하여 관할 구역을 넓혔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때부터 창원군은 군역이 3개로 쪼개지게 된다.[15] |
19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국토개발 10년 계획 등의 일환으로 남동임해공업벨트가 들어서게 된다.
1970년대 이전에도 경상남도 동부지역은 마산시가 이미 큰 도시로써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마산에는 한일합섬이 건설되었고, 동쪽의 창원분지 일대에는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 더불어 정부에서는 창원분지에 계획도시를 입안하게 되는데, 즉 창원은 광복 이후 무질서하게 성장한 마산과는 달리 시작부터 계획된 도시였던 것이다.
한국기계산업단지 조성을 주목적으로 창원 도시계획개발이 진행 되었는데, 전체적인 계획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의 계획을 참고하여 수립되었다.[16] 당시로서는 창원시 주요도로들이 파격적인 10차로, 12차로 대로 등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1970~80년대 도시개발 초기는 공업시설에 중심으로 차량의 원활한 움직임이 목적이므로 보행자 사람 중심의 교통정책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가장 긴 직선대로가 창원대로로써 이는 유사시 군수공장을 보호하는 소개공지 및 비상활주로를 겸할 목적였으며[17], 다른 큰 대로 역시 도시 미관상 이유 및 기계산업단지 및 군사물품제조업의 시설 및 생산품 입출하의 쉽게하기 목적이으로 이를 위해서 당시 보행자 통행은 횡단보도 대신해서 육교 아닌 수 많은 지하도가 설치되었다.
한편 창원대로 축의 기준으로 창원의 주거상업지역과 공업지역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주거지역과 대로 사이로는 완충녹지를 계획 배치되었다.
창원대로 축으로 남쪽지역이 공업지역이며, 창원대로의 북쪽 지역은 상업 및 주거지역이다. 중심상업지역은 창원시내 중심을 남북으로 도로 중신으로 길게 배치되었으며, 특히 태양의 빛이 뻗는 모양을 형상화 한 창원광장은 전국에서 가장 큰 잔디 광장으로써 이 광장을 중심으로 광장의 북쪽은 경상남도 도청이 자리 잡았고 관련 관공서가 배치되었으며, 광장 남쪽지역은 상업시설 미롯해서 호텔과 여러 기업회사 사옥들이 배치되었다. 중심상업지역을 축으로 두고 동서지역이 주거지역들이 계획했다.
창원의 도시계획개발에는 거주인원 약 30만명의 인구 수용을 염두에 두는 동시에 도시개발 목적으로 한국 최대 기계산업단지 조성, 경상남도 도청소재지로써의 배후지 조성, 광복이 후 도시개발이 무질서하게 급속하게 성장된 마산시의 인구 분배를 위한 신도시 조성 등의 이유로 추진되었다. 1977년 창원 출장소가 설치 후에 창원 국가산업단지와 배후 주거지를 위한 도시계획 및 경상남도 도청소재지 이전이 확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도시계획개발이 시작하게 되었다.
1980년 당시의 행정구역 상황. 마산시에서 창원출장소 지역이 독립하여 창원시가 설치되었으며, 창원군은 의창군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의창군 웅동면이 진해시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에는 의창군 천가면(가덕도)이 부산직할시 강서구에 편입되었다. 1990년 마산시에 합포구와 회원구가 설치되었으며, 1991년 의창군은 창원군으로 다시 명칭을 환원하였다. |
1980년, 창원출장소가 마산시에서 분리되어 창원시로 승격되고 창원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983년 부산에 있던 경상남도청은 창원으로 이전했고, KBS도 마산여고 밑에 있던 KBS마산방송총국이 KBS창원방송총국으로 변경되어 용지못 인근으로 옮겨갔다. 마산지방법원은 비교적 늦게 이전한 축에 속했는데, 1992년 창원으로 이전했다. MBC의 경우 옛 마산시의 노력으로 창원 이전 계획을 취소하고 현재의 양덕동 부지에 신사옥을 마련했으며, 통합 이후에는 창원MBC로 바뀌었다. 그러나 1년 뒤인 2011년에 진주MBC와 통합하여 MBC경남 창원본부가 되었으며[18], 3.15 아트센터가 개소하기 전까지는 마산MBC홀이 이 지역의 문화공연 허브 역할을 했다. 그리고 법원과 검찰청은 마창진 통합 이후에는 원래 자리인 옛 마산시청 인근에 마산지원이 새로 들어섰다.[19]
창원시의 본격적인 신도시 확립 후에 계속 성장했으며, 특히 창원공단은 수도권 반월공단이 조성 직전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기계공작의 최대 약 80%까지도 담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정기관의 대규모 이전 이후에도 마산은 한동안 상업지로서의 활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터 벌어진 옛 마산시의 유통업체 전쟁[20]의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지속되는 인구 감소로 일반구 폐지라는 굴욕을 당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21] 이후 창원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게 된다.위키백과 참조 # 배꼽이 더 커져서 배꼽이 배를 먹어버린 셈. 마산부가 창원군에서 분리된 것을 생각하면 배꼽이 아니라 그냥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는데, 결국 기억도 안나는 옛날로 돌아간 셈이 된다. 분명히 고을로서의 역사는 '창원'이 길긴 하지만, 근대 도시로서의 역사는 '마산'이 긴데다가, 심지어 창원신도시 지역을 명목상 마산시에 편입시켜놓은 적도 있고 마산의 자본 또한 창원신도시 지역의 성장에 영향을 줬을 터니 지역민 입장에선 그야말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공론일 듯.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도농통합) 당시 마산시, 창원시, 진해시의 개편된 행정구역 상황. 창원군은 폐지되어 각 읍면들은 인접 도시가 어디냐(마산시/창원시)에 따라 분할 편입되었다.[22] 이 상태는 2010년 현재의 창원시로 대통합될 때까지 유지된다.(단, 마산시의 합포구와 회원구는 2000년에 폐지되었다.) |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사용한 창원시 로고 |
5.1. 통합 이후
마산시 | 창원시 | 진해시 |
2010년 통합 | ||
통합창원시 임시 로고 |
2010년 3월 2일, 창원, 마산, 진해시의 통합 설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23] 이로써 2010년 7월 1일자로 통합 창원시가 정식 출범했다. 인구는 통합 당시 108만으로, 기초자치단체 중 1위였으나 얼마 안 가 수원시에게 추월됐다. 2012년 3월 1,091,827명으로 늘어났고 시 자체적으로는 2025년까지 150만명(!)을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구는 109만명으로 정점을 찍고 쭉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2012년에서 2018년까지 6년 사이에 인구가 4만명이나 빠져나갔고 이렇게 가다가는 100만명이 깨질 수 있다. 마산 권역은 통합시가 되면서 2000년에 폐지되었던 일반구(합포구, 회원구)가 앞에 '마산'을 붙이고 재설치되었다(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게다가 통합 과정도 청주시-청원군처럼 투표가 아닌 반강제식으로 이루었으므로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시민들이 있다.
통합시의 명칭을 정하는 데 갈등이 있었다. 결국 자율적으로 통합한 시에 지원되는 예산을 마산과 진해가 40%씩 나눠 가지는 대신 통합시의 이름을 창원으로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창원시는 상당히 큰 공단이 자리한 기업도시이기에 예산에 꽤 여유가 있어[24] 돈보다는 명예를 추구했고, 그렇지 못한 진해와 마산은 실리를 얻은 셈.
한편, 창원시의 구심점으로 삼을 요령으로 창원 연고의 야구단을 창설했다. 자세한 것은 NC 다이노스 항목 참고.
통합 이후에는 높으신 분들끼리 알력이 많은 듯, 창원시청을 이전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경상남도청이 마산으로 와야 한다 말아야 한다 등등 말이 많다. 창원시의회에서는 마산지역 분리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하고, 이에 질세라 마산 쪽에서는 재분리 후 함안과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키도 하는 등
2021년 7월 1일 의창구의 일부지역을 성산구로 편입하였다. 퇴촌동 일부는 의창구 봉림동에서 성산구 반송동 관할로 변경하였다. 두대동, 삼동동, 덕정동, 대원동은 의창구 팔룡동에서 성산구 중앙동 관할로 변경하였다. 의창구 용지동을 성산구 용지동으로 변경하였다.
2022년 1월 13일 특례시로 지정된다.
인구는 (2010년 7월 1일 기준 108만명) (2024년 1월 2일 기준에서는 106만명으로 내려갔다.)
[1] 성씨는 '장'씨였다고 전해진다.[2] '마산(馬山)'이라는 이름 자체는 조창과 관련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 석두창이 마산에 설치되었다가 이후 두척(쌀을 재는 말인 ‘斗’와 자를 뜻하는 ‘尺’의 합성어로 '쌀을 재는 자'(말통)을 뜻한다. )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뜻은 다르지만 소리가 같은 '말 마(馬)'로 옮긴 것이 마산으로 표기되었다는 것으로, 두척산(무학산의 원래 이름), 두척마을, 마재고개 등의 지명이 유력한 근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즈음에는 마산포에 어시장이 생겨나 합포성터를 대신하여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의 마산 어시장이다. 마산포는 한성으로 조세를 실어나르는 배의 출항지이기도 했고, 현 남성동파출소 네거리에 크고 아름다운 조창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조창 건물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있었고 사진기록도 남아 있는데 이후 도시계획으로 완전히 헐려 사라졌다.[3] 이 당시 일본 제국이 건설한 도시구획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구 의창군청 자리가 바로 일본 공사관이었기 때문에 이 위치를 중심으로 길이 방사형으로 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 제일여고 부지에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으며, 현재 제일여고 정문부터 함흥집까지 벚꽃길이 가꾸어져 있는 것은 그 흔적이다.[4] 경술국치 후 일제는 이 터를 국유지화했다.[5] 재미있는 점은, 1905년까지 폭증하던 일본인 상권에 대해 1920년대까지는 다시 원마산의 조선인+일본인 상권 연합이 신마산으로부터 도로 상권을 탈환해오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6] 구버전 문서에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심상 소학교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반면 신마산 쪽 월영초등학교의 경우 교장부터 교사, 학생까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고 한다.[7] 배산임수 지형, 맑은 수질, 잔잔한 내항 포구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식민지를 세우기에 알맞다. 택지로서 나쁘지 않고 식수 걱정이 없으며 여차하면 병력증강의 교두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8] 단, 회원1동 근처에선 크게 반원형으로 휘어졌는데 이 흔적도 산호초등학교 근처에 그대로 남아 있다.[9] 현재의 상남광장(육호광장) 자리는 마산선 중마산역, 그리고 북마산 가구거리 위쪽 교방동 들어가는 어귀에는 경남선 '북마산역'이 있었다. 이 역의 흔적은 지금도 플랫폼 부지가 덩그마니 남아 있다.[10] 그와 동시에 구마산은 천천히 쇠락하게 된다.[11] 일제 때는 일본 본토가 아닌 외지의 지명을 읽을 때는 음독하였다.[12] 현 마산합포구 일대[13] 박정희 정부 당시에는 효율적 행정을 우선으로 하는 정부조직개편이 의외로 잦았는데, 이를테면 구 창원시 권역을 도 직할로 놓아서 공단조성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산림녹화 사업을 위해 산림청이 1970년대 당시에 농림부에서 내무부 직할로 이관되기도 했다.[14] 어차피 도 직할 출장소를 설치할 거면 왜 창원군 상태에서 출장소를 설치하지 않고 마산시로 편입시킨 후 출장소를 설치하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3개 면의 마산시 편입과 창원지구출장소 설치 사이에 시간차가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따르면, 당초에는 창원신도시 건설에 대한 행정 지원 역할을 마산시에서 맡는 것으로 정했으나 이후 효율적인 행정 지원을 위해 창원지구출장소가 신설된 것으로 나온다.[15] 쪼개진 영역 중 마산시와 붙어있는 내서면은 다른 면인 진북면과 진동면의 경계 부분이 산으로 막혀있어서 실질월경지였다.[16]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창원에 캔버라호텔이 있다.[17] 해당 지역에서는 농담 삼아 유사시에 용지못의 물이 몽땅 빠지고 그 안에서 대공발칸이 나타난단 우스개소리가 정말로 돌아다녔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차도에 화단까지 있는지라 써먹을 일은 영영 없을 듯하다.[18] 이 합병 과정에서 마찰이 많았다. 이는 지역 MBC 간의 첫 통합 사례이며, 이후에도 강릉MBC와 삼척MBC가 MBC강원영동, 청주MBC와 충주MBC가 MBC충북으로 통합된다.[19] 새로 들어서기 전에는 각각 마산시법원/등기소와 마산시의회로 쓰였던 건물이다. 이러다보니 일반적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다른 법원/검찰청과는 다르게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20] 인구 35만의 도시에 국내외 7개 업체가 잇달아 대형마트를 건설했던 사건이다.[21] 이후 2016년에 경기도 부천시가 잠시 일반구를 폐지하였다가 도로 부활했던 적이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인구가 충분히 많음에도 책임읍면동제를 실시해서 자의적으로 폐지한 것이다.[22]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폐지 직전 창원군은 마산시/창원시와 함안군과의 경계를 기준으로 둘로 나뉘어진 월경지 상태였다.[23] 함안군을 배후지로 통합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행정안전부에서 기각했다. 함안을 통합하게 되면 국회의원 선거구 책정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24] 비수도권 도시중 재정자립도 1위였다. 물론 지금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지역을 편입한지라 내려간 상태.[25] 마산 야구장 및 NC 다이노스 홈구장 부지 선정 논란 항목 참조. 이제는 구장 부지가 확정된데다, 대체부지 논란이 일었던 진해 육군대학 부지를 재료연구소에서 얼른 집어갔기 때문에 일단락되었다.[26] 이는 예전부터 마창진의 버스체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고, 생활권역이 겹치는 탓도 크다. 1970~80년대에는 창원공단 노동자들이 마산의 산호동, 오동동에서 놀았고 90년대에선 창원에서 마산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평준화 이후 연합고사는 2000년대까지 마산-창원 학군 분리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