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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효종의 왕녀 숙녕옹주 | 淑寧翁主 | |
출생 | 1649년(인조 27년) |
사망 | 1668년(현종 9년) 6월 28일[1] (향년 20세) |
부왕 | 효종 |
생모 | 안빈 이씨 |
부군 | 금평위 박필성(錦平尉 朴弼成) |
자녀 | 슬하 1녀 1녀 - 박희경(朴喜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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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의 서녀. 어머니는 후궁 안빈 이씨로, 효종이 후궁에게서 본 유일한 자녀다.2. 생애
효종이 등극하는 1649년(인조 27) 태어났다.효종은 자녀들에게 자상한 아버지였고, 왕비 인선왕후도 적서의 구별을 하지 않고 숙녕옹주에게 너그럽게 대했다. 다만, 이미 정비 소생의 세자와 여러 공주[2]가 있었기에 비교적 떨어지는 대우를 받은 듯. 그만큼 다른 공주들이 시가(媤家)는 물론이고, 효종과 현종, 숙종의 비호 아래서 누리는 권세도 보통이 아니었기에 비교되는 탓이다.
무엇보다 옹주의 어머니 안빈 이씨는 사대부 집안에서 간택한 후궁이 아니었고, 종4품 숙원의 품계에 오르기까지 7년이 걸린 사람이었다. 만약 옹주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안빈 이씨가 받는 대우도 달랐을 수는 있다.[3] 이를 반영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효종은 어느 날 세자와 공주들을 불러서 선물을 주었는데, 숙녕옹주도 자신의 딸이므로 선물을 주고 싶었으나 인선왕후의 눈치가 보여서 선뜻 주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를 알아차린 인선왕후가 따로 숙녕옹주를 불러서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왕실의 예법에 의하면 국왕의 자녀들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녀라고 해도 적모인 왕비의 자녀들로 취급되었다. 고로 후궁들은 법적으로는 친자식들보다 신분이 낮았고, 이에 따라 왕자녀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안빈 이씨는 자신의 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반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를 본 효종이 노발대발하며 안빈을 처벌하려고 하자, 인선왕후가 여러 번 간청해서 무마시켰다.[4]
1668년(현종 9) 옹주는 당시 궁중에 유행 중이던 천연두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5]
3. 가족관계
숙녕옹주는 반남 박씨 가문의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과 결혼했다. 박필성은 숙녕옹주보다 3살 연하인 1652년생으로, 아내 숙녕옹주가 17세(또는 19세)에 요절한 후로도 재혼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살다가 영조 23년인 1747년에 사망했다(향년 95세). 박필성과 숙녕옹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 박희경은 이수철(李秀喆)이라는 남자에게 시집갔다.- 시부 : 박태장(朴泰長)
- 남편 : 금평위 박필성(錦平尉 朴弼成, 1652 ~ 1747)
- 딸 : 박희경(朴喜慶)
- 사위 : 이수철(李秀喆)
4. 여담
- 여담으로 숙녕옹주의 사위인 이수철은 과거시험장에서 남의 과거 답안을 도둑질하여 원래 주인의 이름을 지우고 제 이름을 써넣는 죄를 범하는 바람에, 노비가 되어 제주도로 끌려갔다. 그러나 박희경이 "남편을 노비에서 면천시켜 달라"고 청원하자, 숙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청원을 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