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09 18:07:56

경선군

파일:전주 이씨 종문.svg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역대 종주
1대 소현세자 이왕 2대 경선군 이백 3대 임성군 이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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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손자
경선군 | 慶善君
출생 1636년 4월 30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망 1648년 11월 2일 (향년 12세)
조선 제주도 유배지
(現 제주특별자치도)
묘소 경기도 고양시 원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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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석철(石鐵) → 백(栢)
부모 부친 소현세자
모친 민회빈 강씨
형제자매 3남 5녀 중 장남
자녀 양자 1남
군호 경선군(慶善君)
시호 효헌공(孝憲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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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극적 죽음3. 묘소4. 가계도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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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조의 장남 내외인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장남.[1]

조선의 왕이 되어야 했었으나 끝내 정치싸움과 할아버지아버지의 갈등에 휘말려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쫓겨나고 거기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인물이다.

2. 비극적 죽음

소현세자청나라 심양에서 8년만에 조선으로 귀국한 후, 인조후궁조소용와의 권력 속에서 갈등하다가 의문사한다. 조소용은 그때를 기회로 삼아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죽이고 왕(인조)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했다. 그 결과 어머니 강빈이 사사되고(강빈옥사), 1647년에는 할아버지 인조의 명으로 인조 25년 5월에 두 동생들과 함께 제주도 유배형을 받아 7월에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에 대해서 사관은 "지금 석철 등이 비록 국법에 있어서는 마땅히 연좌되어야 하나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무슨 아는 것이 있겠는가. 그를 독한 안개와 뜨거운 장기(瘴氣)가 나는 큰바다 외로운 섬 가운데 버려 두었다가 만약 하루아침에 병에 걸려 죽기라도 한다면 성인의 자애로운 덕에 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죽은 자가 지각이 있다면 소현 세자의 영혼이 또한 깜깜한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매우 정확한 예측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매우 중대한 변수가 터진다. 인조 25년 10월부터 청나라에서 소현의 세 아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꾸 묻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강빈을 사사했다는 것만 알리고 그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리지 않았는데, 이에 순치제가 직접 아들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오라고 정명수에게 명하면서 정명수가 영접도감 조경을 만나 질의하였다. 이에 조경은 "소현이 병으로 서거한 뒤 갑자기 역적 강씨가 저주한 변이 일어났는데, 법으로는 의당 주륙해야 하나 주상께서는 지친인 까닭에 단지 죽음만을 내렸다. 그리고 역적을 다스리는 율(律)로는 자손에게까지 연좌해야 하지만 주상께서는 차마 법대로 다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뚝 떨어진 섬으로 내쳐 두어 생명을 보존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국에서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다시 인조 26년 3월 4일, 청나라 사신으로 온 정명수가 "소현의 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속담에 아버지는 뼈이고 어머니는 공석(空石)[2]이라고 했는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어머니의 죄 때문에 연좌되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김자점과 이행원이 "강적(姜賊)은 그 어미·형제들과 함께 모역한 일이 발각되어 복주되었습니다. 세 아이의 유모 등도 모의에 참여했다고 자복했기 때문에 조정에서 세 아이에게 죄를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섬으로 방축(放逐)시켰는데, 두 아이는 마마를 앓다가 죽었습니다."라고 급히 거짓말을 하였다. 이에 정명수가 왜 청나라에 묻지도 않고 일을 처리했냐고 묻자 김자점은 엉겁결에 "그의 어미가 역모한 정상에 대해 이미 주문했는데, 이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주문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인조가 급히 까먹고 못한 것이라고 수습하였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정명수와 별개로 용골대가 살아있는 큰 아이는 청나라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놀란 정명수가 옆에서 "우리는 그의 생사 여부를 알아내면 그만인데, 어떻게 감히 데리고 가겠습니까"라고 만류하더니 김자점에게 "큰아이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함께 죽었다고 말했으면 아주 좋았을 텐데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이 한스럽습니다"라고 언질을 주었다. 3월 7일, 인조는 김자점을 불러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인조는 이를 강빈의 세력이 꾸민 일로 의심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인조: 죽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구실을 삼을 것이고, 죽지 않았다고 하면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큰아이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자점: 저들이 기필코 데려가려 한다면, 차라리 편의(遍議)에 의해 처리할지언정 데리고 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청나라 사신이 다녀간 지 6개월 만인 26년 9월, 마침내 이석철이 풍토병으로 숨졌으며, 인조는 경선군을 소현세자 묘 곁에 장사지내도록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대해서 사관은 "이에 앞서 용골대[3]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이라고 뼈 있는 논평을 남겼다. 같은 해 12월에 둘째인 이석린도 끝내 숨졌다. 막내동생 이석견은 그나마 형들과 달리 17년 더 살았지만 이 쪽도 17년 후 22살로 요절했다.

3. 묘소

아버지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과 함께 서삼릉 구역 내에 있으나, 경완군 묘와 함께 비공개 구역이다. 군부대가 그 곳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가계도


이 외에도 어렸을 때 요절한 두 누나가 있다.

5. 창작물에서

2022년 영화 올빼미에서 이주원이 아역으로 경선군을 연기하였다.


[1] 경선군 손위로 두 누이가 있어 출생순서론 셋째이다.[2] 쌀이나 좁쌀을 담는 볏짚으로 만든 그릇을 말한다.[3] 칙사로 용골대가 왔다는 것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엔 없고, 나중에 따로 언급된다.[4] 여담으로 경선군은 인열왕후가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얼마 안지나서 태어났다. 이때 당시 친할머니 인열왕후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어머니인 강씨, 경선군과 그 동생들에게 훗날의 비극이 닥친걸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5] 군주(郡主)는 세자의 적녀, 즉 세자빈에게서 얻은 딸이다. 세자의 서녀는 현주(縣主). 아버지가 즉위하여 왕이 되면, 신분이 저절로 공주/옹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