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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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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회빈 강씨 | 愍懷嬪 姜氏
파일:민회빈_영회원.jpg
영회원 전경
출생 1611년 4월 18일(음력 3월 6일)
조선 한성부 강석기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사망 1646년 4월 30일(음력 3월 15일)
(향년 35세)
조선 한성부 강씨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능묘 민회묘(愍懷墓) → 영회원(永懷園)[1]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627년 12월 31일 ~ 1645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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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금천 강씨
부모 부친 - 강석기(姜碩期, 1580 ~ 1643)
모친 - 신예옥(申禮玉, ? ~ 1647)
형제자매 5남 3녀 중 차녀
배우자 소현세자
자녀 슬하 4남 5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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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 군주(1629 ~ 1631)
차녀 - 군주(1631 ~ 1640)
장남 - 경선군(慶善君, 1636 ~ 1648)
3녀 -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 ~ 1655)
차남 - 경완군(慶完君, 1640 ~ 1648)
4녀 -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 ~ 1682)
5녀 -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 ~ 1697)
3남 - 경안군(慶安君, 1644 ~ 1665)
4남 - 왕손(1645 ~ 1645)
시호 민회빈(愍懷嬪)
별호 강빈(姜嬪)
}}}}}}}}} ||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소현세자와의 가례2.3. 신혼생활과 병자호란 이전까지2.4. 병자호란 발발2.5. 청나라 볼모로 끌려가다2.6. 심양관 생활2.7. 자녀2.8. 남편의 죽음2.9. 억울한 죽음2.10. 사후
3. 평가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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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소현세자의 부인이다. 묘소는 '영회원(永懷園)'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 광명시 내에 위치해 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611년(광해군 3년) 3월 5일 우의정을 지낸 강석기와 신예옥[2]의 5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조선 시대 여인들이 흔히 그랬듯, 남자 형제들과 달리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본관은 금천(衿川).[3]

아버지 강석기는 서인 출신으로, 인조의 핵심 지지세력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반정 공신은 아니었다. 정치판 한가운데에서 인조에게 큰 목소리를 내기보단 어쩌다 보니 스승도 동료들도 사돈들도 죄다 서인의 핵심에 속해있어, 그들과 함께 무난하게 묻어가는 조용하고 온건한 행보를 보이는 타입이었다.

강석기는 여러 창작물에서 아들들에겐 엄격해도 둘째딸인 강빈에게는 너그럽고 자상해 딸을 굳이 엄격히 훈육해 기죽이지 않으려던 아버지로 일관되게 그려진다. 산림 김장생의 제자로 예학에 밝았으며 1616년(광해군 8년)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618년(광해군 10년) 조정에서 인목왕후(소성대비)의 폐비론이 일어나자, 사직하여 가솔을 이끌고 본관 소재지인 금천에 내려가 칩거해 버렸다. 이때 8살이었던 강빈도 아버지와 가족들을 따라 고향인 금천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러한 강석기의 정치적 행보는 당연히 인조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고, 이에 강석기는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이후 재기용되었다. 이때 13살이던 강빈도 아버지, 가족들과 함께 도로 한양으로 상경해 성장하다, 4년 후 소현세자와 혼인하게 되었다.

인조에게 재기용된 후 강석기는 전적, 수찬 등을 역임하고, 한동안 어린 소현세자를 가르치는 왕세자 경연의 시강원 당직 스승을 맡은 적도 있었다. 강석기가 장래에 사위가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할 왕세자를 가르치며 동궁을 드나들던 것이 동궁일기에도 기록되어 있다.[4] 이 무렵 갓 왕세자로 책봉된 소현세자는 "머리는 좋지만 산만하거나 권태로워 한다"고 시강원 스승들에게 거의 돌림빵 수준으로 꾸사리 먹던 시기였다. 하지만 강석기가 소현세자를 엄청나게 혼내던 스승들 그룹에 속해있진 않았다. 그냥 수많은 스승 중 하나였을 뿐. 게다가 세자의 장인이 될 무렵에는 동부승지로 승진해 더는 시강원의 스승이 아닌 상태였다. 하지만 강석기는 최소한 자신의 딸이 세자빈으로 낙찰되었을 때 "앞으로 남편 될 세자가 이러이러한 소년이었다"고 딸에게 사전 설명해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2.2. 소현세자와의 가례

강빈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건 1627년(인조 5년), 17살 되던 해였다. 그런데 강빈은 본래 소현세자의 짝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인조1625년(인조 3년) 소현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는 시기에 맞춰 파평 윤씨 윤의립의 딸과 가례를 추진했었다. 당시 윤의립의 딸은 소현세자보다 1살 어린 13살이었다. 하지만 중신들의 격한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윤의립의 서조카 윤인발이 이괄의 난에 가담한 역적이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윤의립이 남인이라서 조정의 주류이자 반대파인 서인들의 반대에 부딪친 것이다.

인조는 "세자의 가례는 부모인 나의 소관이다"라고 반박했으나, 신하들은 "국혼은 반드시 신하들에게 물은 후 정했습니다"라며 맞서 관철시켰다. 파혼당한 파평 윤씨 소녀는 낙담해서 자결했다는 야사가 떠돌지만, 실제로는 동복 오씨 오정원(吳挺垣)과 혼인하여 잘만 살았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훗날 재상을 역임하며, 김수항과 대립하는 오시수.
여러 창작자들이 이 자결한 윤씨 소녀의 거짓 야사를 언급하며 그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결혼 초기엔 소현세자가 꽤 오랫동안 강빈을 냉대했다는 상상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는 승정원일기동궁일기가 번역되기 전 일어난 일종의 고증 오류다. 자세한 건 후술.

강빈이 소현세자와 가례를 치른 1627년(인조 5년)은 정묘호란이 발생한 해다. 1월에 후금이 10만 명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침략하자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파천하고, 16세의 소현세자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갔다.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으며 전란이 마무리되자 세자분조는 3월말에 강화도로 들어가 복명(명령을 받고 일을 처리한 사람이 그 결과를 보고)하고 5월 초 한양에 돌아왔고 이후 세자의 가례가 추진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세자빈 후보들을 가리기 위한 초간택이 실시되었고, 가례의 제반 사항을 준비할 가례도감도 준비되었다. 재간택과 삼간택을 거쳐 9월 29일 강빈이 세자빈으로 공식 확정되었다. 다만, 야사에 따르면 이때도 강빈은 세자빈으로 선택되지 못할 뻔 했다. 정재륜의 공사견문록과 이긍익연려실기술에는 이런 야사가 있다.

본래 세자빈 간택 때 인조인열왕후는 평소 총명하기로 소문난 권씨 규수를 마음 속으로 이미 세자빈으로 내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세자빈 간택 일정이 시작되자 권씨는 식사 때는 숟가락젓가락 대신 으로 게걸스럽게 먹고, 제대로 씻지도 않아 악취를 풍기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대화하는 등 실성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할 수 없이 인열왕후의 반대에도 차선책으로 강빈(민회빈 강씨)를 세자빈으로 간택한다. 그 후 몇년 뒤 인조가 문득 권씨의 소식이 궁금해져 권씨의 행방을 조사해보니 "권씨는 어느 이름없는 선비와 결혼하였으며, 품위있는 행동과 현명한 내조로 남편과 금슬좋게 살아 주변의 부러움을 받으며 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보고에 인조는 무릎을 탁치며 "아~, 내가 그 아이의 꾐에 넘어갔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즉, 권씨는 일부러 실성한 척을 하며 세자빈 간택에 떨어졌다는 것.[5]

간택을 피했던 권씨 처녀가 실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대에 소현세자가 인기 없는 신랑감이었고 많은 양반 가문이 딸을 세자빈으로 내놓길 기피했을 가능성은 높으며 이 야사는 그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소현세자의 매력이나 인성 문제로 보는 건 좀 많이 어렵다.[6] 소현세자 본인보단 인조의 맏아들이 혼인 상대로서 인기가 없었다는 편이 정확했다. 애초에 조선 시대에서 왕족의, 그것도 1순위 계승자인 왕세자국혼은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사대부에게 인기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세자빈을 배출한만큼 명성은 높아지지만 까딱하면 가문이 멸문 테크를 걷기 때문인데(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하물며 당시 인조는 그 자체로 정통성이 취약하고 불안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위기를 겪고 그때마다 각각 창덕궁창경궁을 홀랑 태워먹고, 또 얼마 못 가 정묘호란이 터지면서 인조한양을 냅다 버리고 피난가고 소현세자분조를 만들겠다고 전주로 가는 등 역마살 뻗치는 믿음직하지 못한 왕실에 딸을 시집보냈다가 함께 동반으로 망하고픈 가문은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강빈과 그 가족들은 해당 우려가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비극적인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7]

아무튼 간택 항목에 나오듯 간택은 일종의 요식행위로, 세자빈으로 뽑힐 규수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권씨 처녀가 만약 실존했다면 강빈은 차선책으로 세자빈으로 당천된 것인데, 강빈이 선택받은 배경은 아버지 강석기의 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가례도감을 책임진 도제조이자 좌의정 신흠은 강빈의 첫째 오빠 강문성의 장인이었다, 또한 강빈의 작은오빠의 장인인 김광현은 척화신 청음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의 아들이었다.[8] 강빈의 셋째 오빠 강문두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뒷날 강석기의 신도비문을 써주는 신익성[9]의 딸과 혼인했다. 즉, 강빈의 올케들은 모두 서인의 주류 세력의 가문 딸들이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서인 관료이자 명망높은 집안들과 두루두루 탄탄한 혼맥구조가 이어져 있던 바람에 강빈이 어찌어찌해서 결국 세자빈으로 당첨된 것이다. 다만 대체로 소극적이고 조용한 정치 행보를 보이던 강석기가 정말로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길 원했는진 알 길이 없다. 많은 창작자들은 서인의 영수격인 장동 김대감[10]이 어느 날 강석기를 대뜸 찾아와 차녀를 간택에 내놓으란 명령식 통보를 했고, 이로 인해 강석기와 강빈이 당황하고 혼란을 느꼈다는 상상을 덧붙인다.

아무튼 세자의 가례는 굉장히 복잡한 행사였다. 세자빈으로 간택되고서도 정작 강빈이 소현세자와 직접 만나기까진 3달이 더 걸렸다. 가례를 준비하는 동안 강빈은 인조의 잠저이자 소현세자가 12살 때까지 살았던 생가이기도 한 향교동 본궁을 수리하여 머물렀고 사전 신부수업은 '태평관(太平館)'에서 진행되었다. 강빈은 이때 아버지로부터 소학을 배웠다.

음력 기준으로 간택이 9월 29일에 있었지만 형식상 왕실에서 신부 집에 혼인 허가를 받는 납채(納采)는 10월 28일에 예물을 보내고, 신부 부친과 조상들에게 명예 관직을 수여하는 납징례(納徵禮)는 11월 20일에, 정식 혼인 날짜를 통보하는 고기례(告期禮)는 11월 21일에 이뤄졌다. 그리고 12월 1일 소현세자종묘를 찾아조상들에게 장가든다고 통보 가례를 고하고 12월 4일에 비로소 세자빈 책봉례가 있었다. 이때부터 강석기의 차녀는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고도 친영례(親迎禮), 즉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혼례식은 3~4달이 지나, 12월 27일이나 되어서 비로소 치러졌다. 신랑 소현세자는 세자빈을 데리러 출발하기 전 경덕궁(현 경희궁) 숭전전에서 아버지 인조와 함께 초계례를 행했다. 쉽게 말해 국본이자 새신랑이 된 세자아버지가 친히 덕담과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이다. 그 다음 앞뒤로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강빈이 머무는 태평관으로 향해서, 가마를 탄 신부를 경덕궁까지 데려왔으며 맞술을 나누는 동뢰(同牢)를 행한 뒤 신방에 들었다. 초야를 보낸 이튿날엔 강빈이 시아버지 인조, 시어머니 인열왕후, 시증조모 소성대비 등 왕실 어른들을 찾아뵙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형식과 절차는 꽤 복잡했지만 패물의 경우 전란 직후임을 감안하여 본래보다 검소하게 치렀다. 인조는 가례에 쓸 진주 1,660개를 감하고 은인(銀印)은 으로 대체하고 기명(器皿)[11]도 전부 줄였다가 몇 년 지나서 형편에 따라 장만하여 올리도록 하고 의복·유장(帷帳) 반수 이상 줄였다. 줄이지 않은 건 세자빈이 입을 법복(法服)과 국구 내외에게 보낼 예폐(禮幣) 뿐이었다.[12] 가례가 시행될 시기 전란 외에 비바람, 해일 등 자연재해로 기근도 심했기에, 가례 이후 임금이 문무백관에게 베푸는 연회와 중전이 내명부에서 주관하는 내연(內宴)도 건너뛰었다.[13]

2.3. 신혼생활과 병자호란 이전까지

동궁일기는 그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결혼 초 강빈이 소현세자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선 거의 단서를 주지 않는다. 일기라는 용어가 현대에 주는 이미지와 달리 소현세자 본인이 직접 쓴 일기가 아닌데다, 내용도 당대 사가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주제에 한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날씨, 소현세자의 학문 진도, 서연을 했는지 여부, 세자가 참여한 주요 왕실 행사 등이다. 따라서 신혼 초 소현세자와 강빈 간의 부부생활이나 정서적 교류가 어떠했는가는 상상이나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상술했듯이 적잖은 창작자들이 소현세자가 신혼 초에 꽤 오랫동안 강빈을 냉대했다고 상상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두 사람의 첫아들인 원손 이석철이 결혼한지 9년이나 지난 1636년(인조 14년),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창작자들은 소현세자가 2년 전 최종 간택까지 통과했다가 파혼당하고, 13살에 자결한 윤의립의 딸에 대한 죄책감을 못 잊어 강빈을 냉대했다고 상상했다.

하지만 이는 승정원일기동궁일기가 번역되기 전 벌어진 일종의 고증 오류다.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장남 이석철이 태어나기 전 2명의 딸을 두는 무난한 어린 부부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장녀는 결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난 1628년(인조 6년) 12월 태어났다.[14] 따라서 실제 기록만으론 소현세자가 신혼 초 강빈을 냉대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설령 세자가 정말로 창작자들의 상상처럼 윤의립의 딸에게 죄의식을 느꼈다 한들, 길어야 두어 달 만에 하찮은 저항 강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동궁일기에선 신혼 초부터 소현세자와 강빈의 사이가 꽤 좋았음을 암시하는 듯한 좀 웃기는 대목이 있다. 강빈과 가례를 치른 그 해인 1628년(인조 6년) 11월경 17살의 소현세자는 명확히 이유가 쓰여있지 않은 채 이틀에 한번 꼴로 수업을 빼먹는 생활 패턴을 보였는데, 그무렵 열린 조강례에 참여한 정경세라는 스승이 소현세자에게 '부드럽고 깨끗한 기상이 예전만 못하시다. 추위 탓이냐, 아니면 조섭(몸조리)을 못하신 탓이냐'라고 개쪽을 준 것이다. 참고로 조섭을 못했단 말은 현대엔 익숙하지 않은 용어다. 병을 앓다가 회복되는 환자가 기력 회복을 위해 여러모로 조심하는 걸 조섭한다고도 하지만, 당시 소현세자는 의료기록상 잔병 하나 없었다. 그리고 효종이 사용했던 맥락을 참조해 해석하면 '조섭을 못했다'는 성적 코드를 점잖게 숨긴 단어다. 즉, 강빈과 잠자리를 너무 자주 가지는 거 아니냐고 시강원 스승에게 까였단 말이다.

1628년(인조 6년) 말에 태어난 장녀는 기록이 너무도 간략하고 파편적이라 당시 산실청을 세울만한 왕실 여인이 누구였냐는 소거법과 훗날 기록된 군주의 사망기록을 통해 간신히 강빈의 딸임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15] 병자호란의 여파 때문인지 정식으로 봉군[16]되지 못하고 아명도 전해지지 않는 이 딸은 13살이 되던 해인 1640년(인조 18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훗날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왕궁에 홀로 남아 할아버지 인조의 귀여움을 받았던 듯 하다.[17] 반면 2년 후인 1631년(인조 9년) 7월에 태어난 차녀는 승정원일기동궁일기 양쪽으로 강빈의 딸임을 명시하는 기록이 충분히 있다. 원손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상당했고 군주로 태어났지만 상당히 축하를 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때 태어난 차녀는 3달도 안돼 갑자기 세상을 떴다.[18] 그리고 딸의 사망날을 전후로 소현세자도 등과 허리 부상 때문에 치료를 받아가며 꽤 오랫동안 서연을 쉬었다. 이 부상의 원인, 혹은 갓난 딸의 죽음과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동궁일기승정원일기의 건조하고 반복적인 기술로는 전혀 맥락이 파악되지 않는다.[19] 이후 소현세자와 강빈 사이에선 약 4년간 출산 기록이 없다가 1635년(인조 13년) 강빈이 셋째를 임신한다.

이렇듯 동궁일기라 해도 왕실 가족들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있어도 너무도 단편적이라 제대로 된 맥락은 읽기 어렵다. 하지만 크게보면 신혼기를 거쳐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10년간, 강빈은 소현세자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으며 차기 국모로서 상대적으로 무난한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강빈은 1636년(인조 14년) 3월 25일에 셋째이자 장남인 이석철출산하였다. 원손의 탄생은 나라에 큰 경사였지만 신하들이 하례드리는 행사는 생략하고, 왕위 계승에 근심이 없어지고 종묘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교서만 내렸다. 하필 이때가 인열왕후의 국상 중이라[20] 세자는 상주로서 의례 절차와 제사 준비로 한창 바빴고, 강빈은 시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내명부를 총괄해야 하는지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인조는 별시를 열었다.[21][22]

아무튼 1636년(인조 14년)에 시어머니 인열왕후가 사망한 후, 강빈은 얼떨결에 조선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여인이 되었다. 물론 시아버지 인조국모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는 입장이었고 인열왕후의 상이 끝나는 1-2년 내지 길어야 3년 내에 새 중전을 맞이할 것으로 여겨졌다.[23] 하지만 당시 26살인 강빈은 새로 들어올 시어머니보다 11살 연상인데다 막 차기 국본인 원손을 생산한 몸이었다. 따라서 만약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었다면 강빈의 입지는 탄탄대로를 걸었으리라 예상된다.

소현세자와의 금슬도 여전히 좋았던 것이, 이 무렵 모친상 중임에도 세자가 또 강빈을 임신시켰기 때문이다. 이듬해 3녀가 태어난다. 이 아이는 출생시기가 불분명하지만 병자호란 직전에 잉태한 게 거의 확실시 되는데, 1637년(인조 15년)생이기 때문이다. 1636년(인조 14년) 말 병자호란이 터지고 이후 소현세자와 강빈이 청나라 군대에 볼모로 끌려가 심양에 도착하고, 둘 다 멘탈이 나가서 한차례 앓아눕고 정신을 차린 게 1637년(인조 15년) 4월이기 때문에 달수로 추정하면 무조건 심양 도착 이전이다.

참고로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적자 숙종도 두 사람이 효종 상례 기간에 관계해 태어났다. 사람 사는 세상인만큼 유교 예법이 점점 강화되어 가는 시기에도 요리조리 틈을 노리는 이들이 있었고 소현세자나 현종 모두 그런 부류였지 이거 가지고 성리학적 틀에 얽매이려 않는 사고 운운하는 건 전형적인 끼워맞추기다.

조선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 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이 터지는 바람에 강빈은 청나라군을 피해 원손을 보호하고 왕실 가족을 통솔할 막중한 책임을 져야 했다. 또한 이후 적장 용골대가 "포로로 잡힌 왕실 식구 중 가장 희귀 아이템 신분 높은 세자빈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등의 희롱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때 강빈은 얼굴을 적장에게 보여주고 절개를 지켜 자결 태그를 걷는 대신, 나름대로 꾀를 부려 위기를 모면했다. 자세한 건 후술.

2.4. 병자호란 발발

1636년(인조 14년) 12월 강빈과 소현세자의 운명을 바꿔버린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12월 14일 청군이 한양에서 걸어서 이틀 거리인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다급해진 조정은 강화도 파천(왕실 피난)을 결정했다. 인조소현세자는 옆에 둔 채 일단 강빈과 종묘사직의 신주부터 선발대로 피난 보냈다. 이때 죽은 인열왕후의 뒤를 이어 내명부의 수장이 되었던 강빈을 중심으로 인조후궁들을 비롯한 왕실 내명부 여인들 전체, 태어난지 9개월된 원손과 9살 된 강빈의 딸[24]이 함께 움직였으며, 10대 초반에 결혼해 출가해 있던 두 대군인 17살 봉림대군과 15살 인평대군과 두 왕자의 가솔들도 동행했다. 뿐만 아니라 왕실을 따라 움직이면 안전할 거라 믿었던 문무백관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함께 강화도로 향했다. 피난 책임자는 예방승지 한흥일(韓興一)[25]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그리고 부검찰사 이민구(李敏求)가 선발대로 떠난 왕실가족의 전체 호위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인조소현세자의 후발대 피난은 간발의 차이로 막혀 버렸는데, 당시 조선의 군정보 시스템이 얼마나 참혹할 정도로 형편없고 허술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분명 아침에 적이 경기도 개성을 통과해 이틀 거리에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 황급히 강빈과 왕실 식구들부터 선발대로 보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먹은 것인지 바로 그날 저녁 "적병이 양철평 부근까지 이르렀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양철평은 지금의 은평구 불광동 구파발/연신내 부근이다. 즉, 현대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청나라군이 아직 휴전선을 안 넘은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경기도 고양시를 지나 3호선 지하철라인으로 경복궁역과 불과 다섯 정거장 차이인 서울특별시 서북쪽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적병이 한양도성에 도달하는 건 그들이 말에서 내려 산책하듯 걷는다 해도 1시간 이내로 일어날 일이었고, 더욱이 행군속도로 보건대 인조에게 보고가 들어간 20분 내로 청나라 군대의 말발굽이 한양을 무자비하게 짓밟을 터였다. 한양은 피난길로 이미 아수라장이었고 서로 가족을 찾으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했다.[26]

게다가 청나라 군대가 점령한 양철평은 강화도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강빈과 종묘사직이 간 선발대는 단지 청나라 군과 아슬아슬 엇갈렸을 뿐이었다. 때문에 결국 인조소현세자도 백성들처럼 이산가족이 되었다.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한 것이다. 이튿날 새벽 그들은 다시 청군을 우회해 강빈이 있을 강화도로 재차 피난을 시도했지만 하필 눈보라가 몰아쳤다. 인조도 몇발짝 나가 걸어보다가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음을 알고 결국 돌아와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택했다. 이날 "소현세자만이라도 강화도로 피신시키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자가 울음을 터뜨려, 인조가 달래고 모든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소현세자의 심경은 상당히 복잡해 보이는데 일단 국본(왕세자 신분)인 몸으로 아버지만 두고 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라도 빠져나가면 강빈과 아이들을 만날 수는 있었다. 당시 소현세자는 강빈을 선발대로 보낼 때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아내와 헤어질 줄은 몰랐고, 또한 청나라 군대가 이만큼이나 추격한 마당에 강빈과 아이들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정말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안위고 예법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처자식들 안전을 먼저 확인해 보고 싶고도 남을 일.[27] 아무튼 정예 병사들이 모두 남한산성에 있는 마당에 국본이 자신들만 쏙 빠져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추위와 눈발과 굶주림 속에서 그들의 47일 항전은 처음부터 패색이 짙었다. 항전이 얼마나 힘겨웠는지에 대해서 자세한 건 병자호란과 관련 문서 참조.

처음 청나라는 왕의 동생을 인질로 보내라 요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가짜 동생을 보내는 꼼수를 부렸고, 이게 들켜서 빡친 청나라는 관련 사신의 목을 냅다 날려버리곤 아예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후에 소현세자는 패색이 짙어지는 걸 보다못해 차라리 청나라의 요구대로 자신이 인질이 되기를 자청했다. 인조 15년(1636년) 1월 22일 임술 6번째 기사에 따르면 세자가 다음과 같은 공문서를 작성했다.
태산이 이미 새알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경돌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宗社)[28]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城)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이후 소현세자가 실제로 인마를 갖추고 독자적으로 성밖으로 나가려 한 기록이 보인다. 소현세자의 이런 초탈하고 단호한 모습은 이로부터 약 보름 전과는 대조적이다. 소현세자는 처음에 청나라가 자신을 인질로 원한단 말을 듣고 쇼크 먹고, 인조가 울면서도 이를 고려하는 걸 보고 2차 쇼크를 받은 나머지, 그만 문 밖으로 뛰쳐나가 사관들이 옆에 있건 말건 오열했다. 이후 항전하는 동안 소현세자의 심경 변화가 유추된다. 기록을 보면 한번 결심을 굳힌 소현세자는 이후 인조만큼 갈팡질팡 하지는 않았고, 일관되게 청나라의 인질로 가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조는 망설이며 고민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아슬아슬하게 청나라 군대와 엇갈린 강빈과 왕실 식구들도 강화도로 무사히 들어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긍익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왕실가족 호위를 맡았던 강화도 검찰사 김경징이 자신의 식구들과 친구들만 쏙 강화나루를 건너게 한 뒤, 나몰라라 짱박혀 건너갈 배편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연려실기술은 이 일이 있고 약 100년도 더 지나 집대성된 다양한 성격의 야사 모음집이기 때문에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강빈이 했던 말이 병자록에 크로스로 기록되어 있는 바람에 일단 사실로 가정하고 이하의 설명은 두 사료를 따른다.

왕실 가족과 왕실만 따라오면 안전하겠거니 믿고 온 수많은 문무백관과 그 가족들은 무려 이틀 넘도록 강화도 건너편 나루에서 영문도 모른 채 기다려야 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나마 인조소현세자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청나라 병사들도 그쪽으로 유인된 바람에 강빈과 원손, 대군들은 나루터에서 맥없이 기다리는 시간 동안 포로가 되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는 건 그저 시간문제였고, 나루터에 모인 피난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때 강빈이 울다가 가마에서 내려 강화 해협 저편으로 김경징을 향해 왕실을 대표하여 몸소 쌍욕을 퍼부으신 것 같은데, 병자록엔 빈궁마마께서 '경징아, 경징아, 네 어찌 이럴수 있느냐' 라고 말씀하셨단 식으로 상당히 우아하고 부드럽게 회고되어 있다. 이 상황이 사실이라면 강빈이 이 대사 그대로보다는, 상황상 좀더 원색적인 말을 내뱉었을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사내들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바깥, 그것도 전장에서 여인이 직접 낸 목소리가 기록되는 게 매우 드문 일이다. 설령 당시 정말로 강빈이 기록된 것보다 더 험한 수준의 말을 했다 해도, 사관들 (혹은 병자록의 필자인 나만갑) 역시 강빈과 한 마음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실드치는 차원에서 순화시켜줬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강빈이 악에 받치듯 그렇게 직접 한마디 한 뒤 비로소 김경징은 배편을 보내어 왕실 식구들을 건네주고, 사대부 식구들을 차례로 건네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뒤늦은 배편이었고 피난민들이 다 건너기도 전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수많은 사대부들이 황급히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혔다.

강빈과 종묘신위를 피난시킬 책임이 있던 김경징이 정말로 강화나루에서 배편을 끊어먹었는지 그 진위 여부는 야사, 혹은 개인기록인 병자록을 토대로 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선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 또 상술했듯 워낙 청나라 군대와 강빈의 피난 행렬이 아슬아슬 엇갈려 지나갔던 바람에, 굳이 김경징이 배편을 안 끊어먹었다 해도 모든 피난 행렬이 바다를 건너는 건 역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실제로 김경징이 무책임한 피난 책임자였던 건 논란의 여지가 없다. 나중에 실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된 무수한 고발을 보면 그저 분풀이라 단정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반정공신이라는 특권과 "상황이 너무 나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인조의 쉴드에도 불구하고 사사당했다. 사실 상황이 나쁘긴 했다. 인조소현세자남한산성으로 가며 본래 강화도에 들어갔어야할 조선 최정예 훈련도감 병력도 남한산성에 갇혀버리는 바람에 강화도에 배치된 지상군은 훈련도 부족한 오합지졸 수백명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김경징은 이때 어떤 대비책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강화해협을 유목민인 청나라군이 건널 수 없을 거라는 근자감에 술만 처마시고 있었다. 내부에 아무 방비책이 없던 것은 강화도가 순식간에 함락된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청군은 1월 22일 40여척의 나룻배를 급조해 삿대로 땅을 질질 끌면서 얼음이 둥둥 떠다녀 큰 배는 운항이 여의치 못한 강화 앞바다를 도하했다. 이 상황에서 김경징은 제 노모까지 내버려 둔 채 가장 먼저 배를 타고 도망가 버렸다. 사실 김경징 혼자 이런 게 아니라 장신(張紳), 이민구(李敏求) 등 반정공신의 아들들이 화살 한번 쏴 보지 않고 자신 혼자만, 혹은 가족들만 챙겨 가장 먼저 냅다 도망가 버렸다. 남은 대신들도 싸울 능력은 없었던지라 그들 중 많은 수가 자폭이나 자결을 택했고, 강빈과 원손, 대군들은 전쟁터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다. 그나마 봉림대군이 병사들을 모아 싸워보려 했지만 다들 죽거나 다치는 등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강빈은 이 와중에 '들과 나는 이곳에서 마땅히 죽을 것이나 원손은 종묘사직을 위해 보존해야 한다'며 원손을 내관들에게 안겨서 도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원손이 떠나간 직후 강빈은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주위에서 뜯어말려서 하지 못했단 기록이 연려실기술에 있다. 실제로 강빈이 자결을 시도했는지 여부는 야사라 알 수 없으나, 9개월 된 원손이 홀로 적시에 배를 타고 도망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강빈의 결단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친 강석기도 자결하고자 했으나 강빈이 "아버지, 저를 위해 살아주십시오"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자, 뜻을 물렸다 한다.

강화도 피난길에서 강빈이 보였던 언행들은 기본적으로 야사와 개인저서를 토대로 했지만, 최소한 민중들의 입담으로 남은 당시 강빈은 매우 긍정적인 존재다. 책임감있게 규방 여성으로서 규정지어진 한계를 아슬아슬 넘나들면서까지 제 할 말을 하며, 조선 내명부 우두머리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는 실록 기록과도 모순되지 않는다.[29]

아무튼 청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자마자 강화성은 당일로 함락되었고, 그곳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결을 택하거나[30] 전쟁터에서 죽었다. 하지만 강빈과 봉림대군, 인평대군 부부는 청나라 입장에선 초레어템 가장 가치 있던 인질이었던지라, 포로로 잡아만 놓고 험하게 다루진 않았다. 다만 그들 기준에서 험하게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강빈은 두 시동생들과 백관의 가솔들과 붙잡혀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이때 청나라 적장 용골대가 강빈과 봉림대군의 부인(훗날 인선왕후 장씨)은 나와서 자신에게 절을 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청나라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 이미지와 달리 그냥 유목민 만주족이었고 여성들도 말을 타고 사냥에 참여하는 등, 딱히 내외를 하지 않는 문화였다. 때문에 용골대는 어쩌면 자신의 요구가 딱히 모욕이 아니고 승리의 여흥에서 나온 단순한 호기심 충족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사대부들 입장에선 이건 명백한 희롱이고 모욕이었다. 만약 강빈이 정말로 적장 앞에서 얼굴을 보인다면, 강빈은 이후 자살태그를 타는 게 미덕으로 강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한 창작물에선 어떤 신하가 강빈에게 불타는 나뭇가지를 주며 스스로 가마에 불을 질러 자결하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강빈은 자신의 의복을 나인에게 주어 대신하는 꾀로 난감한 상황을 타파했다.[31] 아무튼 이때 청나라 딴에는 인질로 잡힌 조선 왕실 인사들을 나름대로 후대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삼전도비를 건립할 때 비문에 "우리가 조선 왕실을 후대하여 보존해준 미담을 꼭 적어 넣으라"고 강요하였다.

식량이 떨어져가던 차에 "왕실과 백관의 가솔들이 청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전갈을 받은 인조는 결국 1월 30일 출성하여 삼전도[32]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예로 항복하였다. 청 군영에 포로로 있던 강빈은 이날 인조소현세자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아내와 동생들과 함께 청군 진영에 남았고 인조만 홀로 창경궁으로 환궁해 돌아갔다.

2.5. 청나라 볼모로 끌려가다

강빈과 소현세자, 그리고 봉림대군 내외는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나마 소현세자는 2월 5일 잠깐 도성으로 들어가 인조에게 하직 인사할 기회를 얻었으나, 강빈은 그대로 군영에 있다가 2월 8일 철수하는 예친왕의 군대를 따라 심양으로 향했다.

항복조건에는 세자봉림대군 내외 외에 "삼공육경도 인질을 보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강빈의 남동생 강문명이 세자 수행을 자처하자 강석기에게 예조판서 삼아 구색을 맞추고, 강문명은 세자익위사 세마(세자 익위사에 속한 정9품 벼슬)로 삼아 딸려보냈다.

강빈이 소현세자와 청나라로 끌려가는 길은 상당히 비참했다. 물론 그들은 청나라가 얻은 가장 큰 전리품이었기 때문에 그들 몸에 무슨 직접적인 위해가 가해진 건 아니었다. 다만, 두 사람 주변으로 펼쳐진 광경들이 참상이었다. 실록에도 명시되어 있듯 전란 중 책임감 있는 국본과 차기 국모의 모습을 보이던 둘에겐, 백성들이 당하는 고초를 생생히 목격하는 게 멘탈 고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청은 사로잡은 피로인들을 대거 끌고갔다. '피로인(被虜人)'이란 청나라 병사들이 돈벌이, 노예용으로 사냥한 조선인 포로를 의미한다. 이들은 청병 개인의 소유물로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식이라 이득을 노린 청병들은 앞다투어 피로인을 사로잡았다. 특히 강화도도성, 남한산성 일대에서 몸값을 치를 수 있는 사대부가 여인들이 많이 사로잡혔다. 훗날 이들 중 대부분이 환향녀라 불리며, 인격체가 아니라 마치 손때 타서 못쓰게 된 휴지쪼가리마냥 제 남편과 시가로부터 줄줄이 강제이혼당해야 했던 당대 분위기를 상기해 보면, 이런 광경을 보면서 강빈과 소현세자가 느꼈을 고통이 충분히 짐작이 간다.

피로인이 어찌나 많았는지 산과 들에 가득해 청의 철수 행렬이 하루 30~40리(15~20km)에 불과했다 한다. 철수행로는 평지가 아닌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는 험로였다. 여기에 청은 때때로 병사를 풀어 말먹이 풀과 양식을 약탈했던 바람에, 이미 청군에게 피해를 입었던 내지 고을들이 다시 한 번 참화를 입었다.

세자 일행은 청군의 철수행렬을 따라 경기도 고양, 파주, 개성, 해주, 평양 등을 거쳐 북쪽으로 갔다. 배종하는 시강원 관원들이 백방으로 거처를 수소문했으나 풍찬노숙 하는 일이 잦았다. 세자는 개성, 봉산, 덕연 등지에서 피난민들을 구휼하고 청군이 백성을 노략질하는 일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다. 또 청이 조선에 요구한 수군의 수를 줄여주도록 청하기도 했다. 황해도 평산부터 높은 고개와 험한 산길이 연달아 있어 고생하며 평안도 가산, 정주를 거쳐 3월 30일 압록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 요동에서 심양으로 향하는 길은 또 다시 노지에서 유숙하는 나날이었다. 4월 10일 심양 인근에 이르자 용골대는 잔치를 베풀어 세자를 대접하였다. 그리고 "황제가 있는 곳에서는 가마를 탈 수 없으니, 빈궁도 성에 이르러서는 을 타야 한다"고 하였다. 배종관들이 항의하였으나 청은 "우리의 국법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며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강빈은 성 밑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려 말을 타고 심양성에 들어갔다.

강빈을 주인공으로 한 창작물에서는 이때 강빈이 말을 타면서, 뭔가 일종의 쾌감 비슷한 각성을 느꼈고, 이후 이 경험은 그녀가 청나라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조선인 포로들을 구해내는 대범한 일들을 하는 데 있어 크게 작용했다는 상상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다만, 설령 이런 상상이 사실이었다 가정해도, 이와 별개로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때 강빈은 이듬해 4월,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고, 마찬가지로 멘탈 쇼크로 앓아누웠던 소현세자보다 더 크게 아팠다.

그럴 수 밖에 없어 보이는 것이 멘탈도 멘탈이지만 이후 1637년(인조 15년)이 끝나기 전, 강빈은 3녀 경숙군주를 출산했다. 달수로 보건대 4월 중순 심양에 도착한 후 경숙군주를 잉태했을 가능성이 없다. 앞서 말했듯 병자호란이 터지기 직전에 잉태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경우, 강빈은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때 임신 초기였다. 그게 아니면 삼전도 항복 후 재회한 두 사람이 심양으로 끌려오는 그 힘겨운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의지하다 가진 딸이다. 아무튼, 심양에서 말을 탈 무렵, 강빈은 확실히 임신 중이었다.

2.6. 심양관 생활

그중 대표적인 일화로 1640년(인조 18년), 소현세자가 29세가 되던 해에 청나라숭덕제(청 태종 홍타이지)가 소현세자 일행의 생활비가 부담된다 하여 세자에게 20만평 가량의 허허벌판 땅을 거의 반 강제로 주면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알아서 살라"고 했다. 세자의 수행원(익위사)들은 이를 "세자 저하고국으로 영영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수작이 아닌가"라고 우려했으나 현실적으로 거부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농사 지을 인력이 문제였다. 세자가 이를 홍타이지에게 묻자, 청 황제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사람을 데려오든 뭘 하든 알아서 충당하라"고 했다. 그때 강빈은 우연히 심양 시내에서 노예 시장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현세자를 설득하여 그들을 돈주고 구해내 심양 근교에 농장을 세우고 그들을 그 농장에서 일하게끔 했다.

농장 경영은 거의 전적으로 강빈이 주관했던 걸로 보이며, 농장에서 얻은 이득으로 소현세자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잦은 선물 요구를 만족시키고 나름대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는 밑천이 되었다.

2.7. 자녀

소현세자와의 금슬이 상당히 좋았던 듯 하다. 소현세자 16세, 강빈 17세에 혼인하여 각각 18세, 19세 되던 해 첫 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 죽은 군주(郡主)[33] 2명을 포함해 총 8남매를 낳는다.[34] 이 중 묵던(심양)[35]의 볼모 생활 때 태어난 아이만 5명이나 된다. 볼모 생활 9년 중 초반 2년 가량은 시어머니 인열왕후의 3년상 중이었고, 두 사람 모두 현지에서 스트레스성 질환을 상당히 자주 앓은 점을 생각하면 흠좀무.[36] 어쩌면 힘든 볼모 생활 속에서 서로만을 의지하면서 살다보니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막내 경안군 이석견과 경녕군주밖에 없어 자식 복도 없다고 보여질 수 있지만,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효종의 직계는 모두 단절된 반면 경안군은 요절했음에도 후사를 남겨 오늘날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로 남아있다는 것은 실로 묘한 부분.

여하간 볼모 생활 중에도 세자관에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지는 날이 없었다. 금슬이 어찌나 좋았던지, 강빈은 귀국 당시에도 임신 중이었다. 만일 소현세자가 일찍 하세하지 않았다면 출산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출산은 지금보다 더 산모의 건강을 해치는 일이었고, 산모사망도 많았는데,[37] 8명이나 출산하고도 건강했던 것을 보아 타고난 체력이 뛰어났던 듯 하다.[38]

경완군 석린이 조선으로 보내져 조선에서 자란 점을 생각하면 청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조선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시동생 봉림대군(효종)의 장자인 현종은 8세에 귀국할 때까지 청나라에서 성장했다. 대통을 이을 왕손이 아닌지라 느슨했던 모양. 때문에 현종은 한반도 역대 왕 중 최초는 아니지만 기록상 조선의 임금 중 외국 땅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강빈의 자녀인 경안군과 경녕군주는 각각 22세, 42세까지 살았다. 살아남아 혼례를 올리고 성년에 이른 아들은 경안군 뿐이며, 소현세자의 후손은 모두 경안군 가계에 속한다. 그나마 민회빈 강씨(강빈)에게 유일한 위안거리가 있다면 효종의 가계는 철종 이후 직계 자손이 단절된 반면,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절멸하지 않고 현재까지 살아서 후손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 경안군의 경우 효종 말년에 유배에서 풀려났고, 오래 살지 못했음에도 자손을 남겼고 영조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이인좌의 난에 휘말려 죽었지만, 어찌저찌 살아남아서 대를 이어 끝내 후손을 남겼다.[39]

2.8. 남편의 죽음

그러나 소현세자와 영구 귀국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의 항복(정축하성) 등으로 인조의 권위가 밑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서버렸기 때문이었다.

인조 vs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 vs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이후 집권 여당이 광해군 과잉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40]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 류영경)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인조는) 한 나라의 군주가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개망신을 당했으니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는데, 인조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역시 경계해야 했다.
그대가 만약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하여 은덕을 잊지 않고 자신을 맡기고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책을 삼으려 한다면, 앞으로 명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헌납하고, 그들과의 수호(修好)를 끊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버리고,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는 장자(長子) 및 재일자(再一子)를 인질로 삼고, 제대신(諸大臣)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으라. 만일 그대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짐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할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태종이 항복한 인조에게 보낸 답서
당장 병자호란청태종이 보낸 답변부터가 "수틀리면 너 끌어 내리고 소현세자 보고 왕 하라고 하겠다."는 말을 분명히 적고 있었다. 실제로 이런 일은 벌어지진 않았지만 당대 인조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조선 역사에서 타의로 왕위를 물려주고 좋게 끝난 역사가 없었던 인조 입장에서는 매우 두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 결국 이에 대한 두려움과 바닥을 친 권위는 점차 아들 소현세자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과 적대로 이어졌다.

인조 개인적인 입장 뿐 아니라 조선 입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그다지 반가운 건 아니었는데, 청으로부터 집권 정당성을 얻어 왕이 즉위하는 일이 거듭된다면 결국 고려 말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통째로 예속되는 루트로 흐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부마국)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 데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가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나라의 일부로 간주되는 이유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명나라의 책봉이 사후 승인으로 조선 왕들의 즉위에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조가 청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하는 일 자체가 소현세자가 왕 노릇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출현했음을 뜻하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은 매우 자명했다. 이 경우 청 황실과의 통혼이 이뤄져 청의 피가 흐르는 조선 왕이 탄생해 완전히 종속될 위험까지 있었다.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에서 청이 이렇게 왕위 계승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지만 당대의 인조 입장에서는 진지하게 그 점까지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위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이듬해 귀국한지 2달 만인 1645년(인조 23년) 4월, 원인모를 죽음을 맞았다. 심양일기승정원일기가 해석되기 전, 조선왕조실록만이 대중적인 사료였던 시절엔,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보이는 데다, 실제로 당시 소현세자의 시신을 본 사람들도 사망 직후 참혹하게 변한 시신의 형태 때문에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 같다"는 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최근 심양일기승정원일기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소현세자의 죽음을 단순 병사, 혹은 의료사고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소현세자1644년(인조 22년), 영구 귀국을 위해 북경을 떠난 시점부터 아프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중간 기착지인 심양에 오래 머물며 귀국이 늦어졌다. 다만 당시 왕족들에게 지병은 흔한 것이었으며, 특히 소현세자스트레스로 인한 속앓이를 자주 했다. 아무튼 기록을 확인해보면 소현세자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다가 1645년(인조 23년) 4월 23일 호전되어가던 병세가 갑자기 나빠져 동월 26일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소현세자가 보였던 증상을 토대로, 그가 앓았던 병이 실제로 무엇인지 현대적으로 증명해 보려는 시도들도 있다. 다만, 17세기 조선 의학과 기록 용어의 한계 때문에, 그 역시 독살설과 마찬가지로 확증이 아닌 추측에 머물렀다. 소현세자 독살 이미지를 바꿔보기 위해 소현세자만주에서 병을 앓는 장면만 골라 편집을 했음에도, 불운이 겹친 재수없는 경우엔 병세가 급격히 나빠질 가능성이 없지도 않다, 란 결론에 머문 것이다.

때문에 병사를 주장하던 이들 일부는 인조가 보낸 어의 이형익이 일으킨 의료사고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형익의 시침은 탕약이 효험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논의 끝에 이뤄진 응급조치로서 처음에는 효과를 봤다. 하지만 이형익의 3번째 시침 직후, 소현세자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도 사실이고, 또 하필 그 이형익이 소현세자와 강빈의 정적인 소용 조씨의 사람이라는 것도 마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긴 하다.

결론적으로 소현세자의 죽음은 현재로선 규명이 불가능한 '의문사'로 결론 내리는 게 타당해 보인다. 타살의 증거도 명쾌하지 않지만, 병사의 증거도 확정적이지 않다. 심양일기승정원일기가 해석이 된 후, 병사의 가능성이 생긴 나머지 아예 그쪽으로 단정짓고 기존의 주장을 완벽한 오류라고 폄하하는 주장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문제는 병사도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란 점이다.

또, 당시 소현세자인조에게 있어 '정적, 자신을 위협하는 후계자'였던 것, 인조가 총애하던 소용 조씨가 세자와 강빈을 못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것, 특히 소현세자 사후 마치 인조가 기다렸다는 듯 강빈과 그 아들들에게 했던 행동들을 보면, 소현세자 사망을 둘러싼 의혹들을 전면 부정하고 인조의 결백을 전면 확신하는 것 역시 타살을 확정하는 것만큼이나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는 하나, 현재 독살설이 있는 역대 왕들의 사인 중 실제 독살 가능성이 높은 설이 소현세자 독살설이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후계를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죽었으니 소현세자의 아들(원손)을 '세손'으로 잇게 하는게 정상이겠지만 인조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을 후계로 하고 싶었던 것. 이에 인조는 소현세자의 가계를 아예 대통(大統)에서 배제할 결심으로 강빈과 세자의 아들들까지도 모조리 제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방법은 심플하게 강빈을 역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2.9. 억울한 죽음

소현세자 사후, 궁내에서 누군가 소용 조씨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는 소용 조씨의 자작극이었으나, 인조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것을 강빈을 제거하는 도구로 적극 활용하여[41] 강빈의 궁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강빈은 후궁 별당에 감금했다. 그러나 인조의 의도와 달리, 세자빈(강빈)의 궁녀들은 이때 고문사까지 당하는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데도 "강씨가 저주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하지 않았고, 물증도 없었다.

이런 가운데 1646년(인조 24년) 1월에는 인조가 먹는 수라의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의 독살 미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모급 사건인데, 이때 인조의 대처가 상당히 이상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면 신하들에게 알리거나 의금부나 형조에서 마땅히 조사하여야 정상이나, 정작 인조는 이렇게 하지 않고 1월 3일에 궁궐 내에서 내시를 통해 자체적으로 조사를 벌인다. 이것만으로도 정상이 아닌데, 조사 과정에서 수라를 만드는 왕의 궁녀(수라 상궁)들을 조사하지 않고 세자빈(강빈)의 궁녀들을 더 많이 잡아 고문까지 하며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강씨는 위의 저주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경덕궁에 유폐되어 있었고, 강씨의 궁녀들도 줄줄이 끌려가 심문받거나 상전인 강씨와 같이 유폐중이었는데, 의 수라에 을 섞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했을지 정말 의문이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고 "공식 조사를 하자"고 요청했지만, 인조는 오히려 이를 거부하였다. 게다가 신하들의 계속된 요청에 1월 11일에서야 뜻을 꺾고 의금부에 명령하여 공식 조사를 시작한것이다.[42] 이쯤 되면 처음부터 강씨를 노리고 한 '표적 조사'라고 볼 수밖에 없었고, 의금부가 1달 동안 조사했지만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세자빈(강빈)의 궁녀를 포함한 용의자들도 고문을 당해도 끝까지 자백하지 않아서 고문사하는 일이 벌어진다. 특히 10명 중 7명이 고문사했을 정도.

이렇게 무리해가며 조사를 했는데도 증거가 안 나오자, 인조는 아예 죄를 만들어 누명을 뒤집어씌우기로 작정을 하고 활동에 나선다. 음력 2월 3일인조비망기를 통해서 조사를 하던 신하들을 압박한다. 이에 같은 날 신하들이 조사가 지지부진한 것을 사죄하며 동시에 "용의자들을 고문해도 나오는 게 없습니다"라고 강하게 항변을 했다. 그러자 인조는 아예 강빈을 직접 언급해가며 누명을 씌우는데, 인조는 "강빈은 심양에 있을 때 왕위를 도모하면서 홍금적의(용포)를 만들고 내전(內殿)의 칭호[43]를 마음대로 사용했고[44], 작년 가을에는 성내는 일이 많았으며, 요즘은 문안을 안 한다.[45] 이것으로 봤을 때 최근의 저주 사건과 지금의 독살 시도 모두 강빈이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강빈을 사형시키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대 법률이나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눈으로 봐도, 상황이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인조의 주장에 근거가 하나도 없다. 신하들도 이 황당한 주장에 전부 어이가 없어서, 이시백이 "전하께서 언급하신 홍금적의 주장은, 그냥 비단을 사들인 것이지 역모로 보기 어렵습니다"라고 주장했고, 김류이경석 같은 신하들도 이시백의 말에 수긍했다. 무엇보다 설령 이게 다 사실이더라도, 화 좀 내고 문안 인사 좀 오지 않은 게 어떻게 저주와 독살의 근거가 되는지는 아무도 수긍하지 못했다. 아니, 그것보다도 별당에 감금된 강빈이 저주는 그렇다 쳐도 독살 시도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어명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신하들은 "옛 성현들처럼 자비롭게 처리합시다"라는 나름대로의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인조는 이조차 거부한다. 다음날에도 김류 등 신하들이 당태종과 태자 승건의 사례를 들어가며 강빈을 살려줄 것을 청했지만, 인조는 "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빈은 내 자식이 아닌데,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지 않은가?"라며 신하들의 간청을 또다시 거부한다.

게다가 강빈에 대한 인조의 분노가 제대로 표출되는 일화가 있다. 인조가 위의 신하들의 간청을 거부한 후에 신하들이 "강빈은 전하의 자식이 아니지만 전하의 자식인 소현과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맞지 않습니까?"라고까지 하며 극구 반대를 하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인조가 우승지 정치화에게 "아니! 이 자식들이, 내가 강빈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했는데 유언비어를 퍼트리면서 나를 모욕하고 있느냐? 이거 불충 아니냐? 얘들 조져야 하는 거 아니냐?"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정치화가 "어제 올라온 신하들의 보고서를 보니, 그들의 주장에 억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을 모욕한다는 건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말에 화를 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1646년(인조 24년) 2월 9일기사

참고로 조선임금도 사람이므로 살면서 욕설을 했지만, 공문서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관이 어느 정도 필터링으로 걸러서 표기했다. 보통 '차마 듣지 못할 하교', '주상께서 대노하며'라고 둘러대는 형태. 의 수준이 '더벅머리 선비놈'과 같이 나름 적절하다 느껴질 경우에는 그대로 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록에서 대놓고 임금이 개새끼라고 그대로 욕을 한 건 실록 전체를 통틀어 인조가 유일하다. 어쩌면 사관이 걸러서 표기한 것조차 저 정도이고, 실제로는 누가 듣기에 거북한 더 심한 욕이었을 수도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개 이 때에 강빈이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조 소원(趙昭媛)이 더욱 참소를 자행하였다. (上)이 궁중의 사람들에게 “감히 강씨와 말하는 자는 죄를 주겠다.”고 경계하였기 때문에 양궁(兩宮)의 왕래가 끊겼으므로 어선(御膳)에 을 넣는 것은 형세상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상이 이와 같이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다 조씨(趙氏)가 모함한 데에서 연유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상식적으로 수라상에서 이 발견되면 수라를 책임지는 궁인들을 심문해서 배후를 밝히는 게 순서인데, 정작 그들은 수사선상에서 배제하여 심문도 하지 않았으며, 심문을 하기 전부터 이미 "강빈의 짓이다"라고 확정하여 주장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다. 이 때문에 사관들에게도 대차게 까인다. 또한 당시 수라상이 올려지는 과정부터가, 사옹원으로 납품된 재료로 출퇴근 인력인 남자 숙수가 조리하여[46] 대전에 도착하고, 이미 음식이 식었다고 궁녀들이 퇴선간에서 다시 데워 올린다. 즉 손을 엄청나게 거쳐거쳐 올라오기 때문에, 독살 시도가 있었다면 그 인력들부터 먼저 추궁해야 앞뒤가 맞다.

이 정도로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티가 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소용 조씨의 횡포는 바로 인조 본인이 그녀에게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정도면 단순한 모함이 아니라 그냥 애초부터 인조가 작정하고 강빈을 죽일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당시 신하들도 다들 알긴 알았을 것이다. 상대방이 이니까 대놓고 비판하진 못하고 이렇게 서술한 거고. 애초에 대놓고 비판할 수 있었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처벌을 반대했을 거다. 게다가 왕권 국가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왕을 함부로 비난하면 반역자로 몰릴 판이고.

결국 신하들의 반대는 소용없었고,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1646년(인조 24년) 3월 15일, 36살의 강빈은 조씨 저주 사건과 인조 독살 음모를 저질렀다는 죄목 및, 강빈이 일전에 대전으로 와서 큰 소리로 "저를 못살게 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외친 죄목 등으로 세자빈 자리에서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뒤 사사되었다.

여담인데 나중에 인조가 강빈을 후원에 감금한 뒤 "전복을 넣어 시아비를 죽이려고 든 죄"[47]라며 강씨를 죽이려고 할 때 신하들이 극구 말리는데, 인조가 들고 나온 것이 성종폐비 윤씨에 대한 처분이었다. "성종 때에 연산군의 어미가 폐출되고 딱히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을 한 것도 없었지만, 그 당시의 신하들은 후환을 걱정해서 죽이라고 청했다. 나라를 걱정하는 신하란 이래야지. 왜 니들은 그렇게 시아비를 죽이려는 패악한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냐? 왜, 나중에 강씨의 자식들이 연산군처럼 니들한테 해코지할까봐 겁나냐?"라면서 인조는 기어코 강씨에 대한 처분을 밀어붙였다. "옛 사람들 말씀에 요순을 본받으려거든 조종을 본받으라 했으니, 나는 성종대왕을 본받겠다"면서.[48]

2.10. 사후

강빈은 사후에도 매우 고통받았다. 강빈이 사사당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강빈의 사형을 반대했던 신하들을 비난하면서, 강빈이 죽기 전에 '소숙[49]과 조씨가 이 애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너희는 커서 이 원수를 갚아다오!'라는 내용의 혈서를 자녀들과 시비들에게 남겼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정식 조사[50]를 요청했다. 만약 이 강빈 혈서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인조의 입장에서는 강빈 사건에 대한 완벽한 전환점이 되고, 문제가 많았던 강빈의 숙청도 역모에 대한 처단이 되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강빈 혈서의 존재를 주장한 인조는 이 정식 조사 요청을 처음부터 무시했다. 이후 인조는 그놈의 혈서를 빌미심아 사돈집안까지 타깃으로 잡아서 그 집안까지 싹 다 몰살시켰는데, 먼저 강빈의 친정어머니이자 사부인인 신예옥 여사를 사사시킨 것을 시작으로 강빈의 남자 형제들도 덤으로 모두 죽여버렸다. 또한 이미 죽은 강빈의 아버지이자 본인의 사돈인 강석기[51]도 삭탈관직하고 무덤을 파내어 시신의 목을 쳐서 부관참시시켰다.

급기야 인조1647년(인조 25년) 5월에 신빙성이고 뭐고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정식 조사도 거부해 존재조차 확실치않은 강빈의 혈서를 근거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까지 전부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왕권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자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 있는 후계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인조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그 가계를 완전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 강빈 혈서 논란은 마지막으로 남은 3명의 손자들까지 완전히 처리하기 위한 인조의 자작극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결국 할아버지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소현세자의 자식들 중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2년 후 풍토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52] 결국 강씨의 아들 중에는 3남 경안군 이석견(이백)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힘겹게 유배 생활을 이어나갔다.

또한 강빈의 궁녀들 중에 '신생'이란 이름의 궁녀가 강빈을 배신하고 살아남았는데, 1년 뒤 신생의 지휘로 궁궐 곳곳에서 강빈의 저주 증거를 찾아내기 위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물론 당연히 증거는 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라 1년 뒤에야 저주의 증거라는 것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근데 어째서 1년이 지난 후에야 증거가 나왔는지는 설명은 생략한다.

1649년(인조 27년)에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했다. 하지만 효종 역시 자신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형수 강빈에 대해 매우 강경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이어갔다. 이로 인해 효종 대에도 강빈의 대우는 정말 험악했다. 강빈이 사사되기 전에 쓰인 윤방의 사장에 강빈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효종은 눈이 뒤집혀서 관련자들을 죄다 처벌했다.[53] 특히 이 시기에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내막을 겉으로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전부 '강빈은 억울하게 죽었고 인조가 어거지를 부려 억지로 사형시킨 것이다'라는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강빈을 신원해달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빗발쳤다. 하지만 효종은 오히려 "이 일을 꺼내는 놈들은 죄다 역적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묵살해버렸다. 그런 식이면 손자도 역적이네?
비록 여러 세대 뒤에라도 만약 역강의 일을 조정에 아뢰는 자가 있으면, 역당(逆黨)으로 논하여 바로 궐정에서 추국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혹 강포한 신하나 흉악한 사람이 있어서 이 전교를 따르지 않거든, 삼사(三司)의 백공(百工)들은 모두 즉시 다투어 논집하여 역당으로 논하는 것이 옳다. 이 뜻을 내외의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라.
효종실록》, 1652년(효종 3년) 6월 3일 기사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이 있었다면 효종에게는 강빈이 있었을 정도로, 효종은 강빈의 신원에 대해 가히 역린 수준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일례로 효종 재위 시절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어떤 말이라도 다 받아들이고 벌도 내리지 않겠다."는 구언의 교지가 내려졌다. 이때 평소에도 강빈 사건에 대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말하고 다닌 황해도 관찰사 김홍욱이 강빈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효종에게 "강빈의 억울한 죽음에 하늘이 노해서 그렇습니다. 강빈을 신원하고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경안군 석견을 석방해 주십시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은 효종은 약속을 깨고 김홍욱을 압송해 곤장을 때려 장살(때려 죽임)했다.[54][55] 나라가 힘들 때 "벌을 내리지 않을 테니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어떤 것이라도 다 하라!"라고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왕들이 화를 낼지언정 어떤 이야기든 다 하라고 해서 상소를 올렸더니 그 사람을 죽인 사례는 딱 이 김홍욱의 사례 하나뿐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강(姜)의 옥사가 가장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느냐 하면, 저주의 변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을 때 일어났는데 그 당시는 궁중 상하가 화락하고 편안하였으니 강(姜)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불측한 큰 역모를 했겠습니까. 만약 그때는 강의 짓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궁중에서의 저주가 어떤 일들이기에 아무나의 손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여기에 대해서 크게 의심을 하는 바입니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년) 7월 7일 기사

김홍욱이 서울로 압송되자 효종친국을 집행하였고, 흥분하여 김홍욱을 때려죽일 기세로 곤장을 치라고 명하였다. 삼정승들도 효종이 매우 화가 난 상태이고 김홍욱이 바른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강빈 사건이 무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형을 집행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자 효종은 분노하여 신하들을 비난하며 기어이 친국을 강행한다. 결국 곤장을 심하게 맞은 김홍욱은 자신을 심문하는 삼정승과 대간들에게 "의견을 말한 것만으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예로부터 말하는 자를 죽여놓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었소?"라고 항변하며 죽었다.[56] 나중에 이 말을 전해들은 효종의 분노는 정말 엄청났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우의정 심지원이 모두 만류하자 효종은 "대신들이 이와 같이 신구(伸救)하는데 그 의도가 형신하고 싶지 않아서인가? 후세에 비록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인데 경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길길이 날뛰었고 원임대신 구인후가 눈물을 흘리며 "신이 어찌 홍욱을 추호인들 구원할 생각이 있겠습니까? 홍욱이 만약 역적 강(姜)과 공모했는데 신이 신구하려 한다면 신은 의당 역적을 비호한 죄를 받겠습니다."라고 김홍욱을 부디 살려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었고, 결국 끌려나갔다. 대사간 유경창이 뜯어말리자 효종은 "간흉의 무리가 국가를 시험하려고 군부와 대신을 속박하니 이런 무리들에게 죄를 주지 않는다면 내가 임금 노릇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무시했다. 김홍욱은 매를 견디지 못하고 대신과 대간들의 이름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했고 유경창에게는 효종의 소매를 잡아서 말리지 않고 무엇하냐고 외쳤는데 효종은 우의정 심지원을 제외하고 김홍욱이 부른 사람들을 모조리 체차해버렸다. 그리고 금부도사 이이형도 김홍욱을 늦게 잡아왔다고 매를 맞았다. 하지만 일련의 상황 자체가 워낙에 억지였던 터라 조정의 신하들과 산림(지방의 양반들)들은 김홍욱의 처벌을 극구 반대했고, 김집과 그 휘하의 문하생들까지 김홍욱을 사면해 달라는 집단 탄원서를 효종에게 올렸다. 하지만 효종은 이 모든 요청을 무시하고 기어이 김홍욱을 곤장으로 때려 죽였고 김홍욱의 자손과 지친들을 조정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대신과 금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김홍욱(金弘郁)을 궐정에서 다시 국문하니, 홍욱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당초 홍욱은 항상 강씨(姜氏)의 옥사를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하여, 평소 다른 사람을 만나면 문득 이것을 이야기했다. 또 그 의심스러운 단서를 소장을 올려 그 원통함을 풀어 주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이때에 와서 분부에 따라 진언했다가 마침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니 듣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효종실록》, 1654년(효종 5년) 7월 17일 기사

위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관들조차 "김홍욱이 억울하게 죽었다"효종을 비판할 지경이었다. 신하들도 나중에 이 일이 도가 지나쳤다고 효종에게 한마디씩 하며 당사자 김홍욱의 신원은 감히 주장하지 못했지만 자식들의 관직 진출은 허용해 달라고 주장했다. 홍문관 부수찬이었던 홍우원도 효종에게 강빈의 신원회복과 석견의 석방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했고, 다시 김홍욱의 무고와 신원회복과 강빈의 신원을 건의하다가 파직당하고 만다.[57] 이후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다 김홍욱의 신원을 요청했는데 호조판서 허적이 강력한 김홍욱 변호의 상소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은퇴했던 이경석에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원로와 산림, 남인과 서인을 가리지 않고 김홍욱을 변호했다. 이에 송시열의 상소를 계기로 효종 8년에 김홍욱의 자손들에게 내려진 연좌제를 거두어들였고 죽기 직전인 효종 10년에야 김홍욱의 관작을 복구해주었다.

효종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갔던 대군 시절에 소현세자 부부와 심양에서 무탈히 잘 지냈음에도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형수 강빈한테 적대적인 입장을 내보이고, 강빈의 신원에 거의 알러지 수준의 반응을 보인 까닭은 효종 자신의 승계에서 나타난 비정상이고 불안한 측면을 본인도 인정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종법을 어기고 차남으로 즉위한 효종 본인의 입장에서는[58], 강빈의 무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대놓고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효종이 비정통이고 소현세자의 맏아들이 적통이라는 주장은 모친 '강빈'이 역적이라면 깨지게 된다. 역적의 아들이니 정통성이 없다는 뜻. 실제로 임오화변 당시 영조가 어떻게든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진 않았던 이유도 손자 정조의 정통성만큼은 유지시킨 채 아들 사도세자만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효종이 사적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왕이라는 지위에 있어서 부친 인조의 결정을 뒤집고 "사실 형수(강빈)는 억울하게 죽은 거고, 형의 아들이 돼야 하는 거니 나는 비정통이오."라고 공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효종 시기 강빈은 절대 신원이 불가능했던 것.

더 나아가, 효종 입장에선 정통성 시비와 관련하여 이미 사망한 인물인 형수 강빈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편리했을 것이며, 최소한 살아있는 신료들에게까지 정치적 불안정을 제공할 요인은 별로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강빈의 죽음이 워낙 억지 그 자체였고 억울한 죽음이다 보니 신원 요구가 빗발쳤고, 이로 인해 김홍욱 같은 사례도 일어나 결론적으로 생각만큼 '편리하고 조용히' 넘어가진 않았지만...

아무튼 세상이 강빈의 억울함을 다 알더라도 효종 본인만큼은 강빈의 신원에 절대로 임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 초기에 억울하게 죽은 장인 심온세종대왕이 끝까지 신원하지 않았던 것과 유사한 조선의 종법제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효종은 남겨진 강빈의 자식인 조카 경안군에 대한 견제도 풀지 않았다. 물론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경안군을 한양에 더 가까운 경상도 함양으로 옮기게 했다가 다시 더 가까운 교동도(강화도)로 옮겨주었다. 하지만 경안군은 삼촌 효종이 죽기 직전까지 왕족 대접을 받지 못하고 효종이 사망한 그 해(1659년) 간신히 경안군(慶安君)으로 봉군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가난하게 살다 23살에 요절했다. 그나마 경안군이 어른이 되어 두 아들을 남기고 죽은 덕에 소현세자 혈손들은 효종의 아들 현종 때까지 살아남아 쭉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이 가계는 효종 직계가 단절된 조선 말까지 끈덕지게 살아남아 신원되었다. 효종의 이런 태도는 강빈의 딸들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도르곤이 "조선공주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요구했을 때 효종은 본인의 딸 뿐 아니라 강빈의 딸도 서둘러 혼인시켜 청나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했지만, 이는 조카딸들에 대한 죄책감과 동정심보다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왕족 여성을 적국에 보내는 것 자체를 치욕으로 여긴 것에 가깝다. 실제로 효종이 강빈의 딸들에게 군주로 봉한 것은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기 직전이어서 군주가 되기 전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시집간 강빈의 딸들은 당연히 시가에서 제대로 된 왕족 대접도 받지 못했다.

결국 억울하게 죽어간 강빈은 효종, 현종 대에는 '역강(逆姜: 역적 강씨)', '강적(姜賊: 강씨 성의 도적)' 등으로까지 불리다가,[59] 효종 이래 효종계의 3대째 계승에 성공해 정통성이 많이 확충됐고 더 이상 강빈의 위치가 역적인지 아닌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손자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그것도 숙종 44년(1718년)인 거의 끝자락이나 되어서야 신원이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숙종 44년 3월, 침을 맞던 숙종은 갑자기 대신들을 부르더니 "내가 평소에 강빈의 옥사에 대해서는 늘 측은하게 여겼다. 주역에서 사악한 집안은 벌을 받고 선한 집안은 복이 있다던데 소현세자의 후손인 임창군이 잘 살고 있으니 소현세자 집안은 선한 집안인 것이다."라고 운을 띄우며 소현세자의 장인 강석기는 명재상이었고, 김홍욱이 정말로 역적을 비호했으면 효종이 왜 신원했겠으며, 소현세자 사당을 보니 쓸쓸한게 안타깝다고 슬금슬금 강빈을 신원해줄 뜻을 밝혔다. 이에 판중추부사 이유(李濡), 서종태(徐宗泰), 영의정 김창집, 판중추부사 이이명, 우의정 조태채가 신하들의 여론을 취합하여 강빈의 신원을 청했고, 외방에 나가 있던 좌의정 권상하송시열이 생전에 강빈의 신원을 청했다고 아뢰자 숙종 44년 4월 8일, 강빈을 공식적으로 신원하였다.

3. 평가

강빈이 여러 모로 차기 국모로서 위엄과 강단을 갖춘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병자호란 때는 검찰사 김경징이 왕실을 제대로 호위하지 못하자 몸소 꾸짖었고, 심양에서의 볼모 생활로 스트레스에 치여사는 세자를 잘 내조하고 심양관의 안살림을 꾸려간 점은 차기 국모로서 부끄럼 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다만 왕실 여성의 몸으로 경제 활동에 참여했다는 점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아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노비 관리법, 제초하고 퇴비 주는 법 등 농사에 관한 각종 조언을 늘어놓은 이황이나 이황이 남겨둔 막대한 재산 관리하느라 과거를 못 본 이황 맏아들의 사례에서 엿보이듯 조선 사대부들은 재산 증식에 열성적이었고 이는 여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부부유별이 주를 이루던 조선 시대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재산은 철저하게 나누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족 여인들 역시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임노동자 고용, 품삯지급, 생산품 판매, 돈놀이, 이 모든 걸 꾸려가기 위한 회계업무까지 폭넓은 경제적 능력을 갖춰야 했다.

무엇보다 어디까지가 강빈의 역할이고, 어디까지가 소현세자의 역할이었는지 구분이 모호하다. 위에서 언급한 사족 여인들의 경제 활동은 주로 길쌈이나 염색 같이 집안에서 여인들이 하는 일이었고 농장처럼 밖에서 하는 농업 경영은 일반적으로 남편의 일이었다. 그리고 강빈이 직접 농장 운영을 주도했다는 특별한 기록은 없다. 강빈이 경영을 주도했다면 꽤나 파격적인 일이라 오히려 기록에 남았을 텐데 세자의 근신들은 농사 짓고 자급자족이 가능해지면 아예 조선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했지 드라마 등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세자빈의 파격적 행보에 기함하진 않았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경제 활동 양상을 고려하면 세자가 직접 관여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강빈에 대해 고찰한 논문에서도 지적하는 사안인데 강빈이 심양관의 대청 무역 활동에 개입했다는 기록도 딱히 없다.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혀 청의 중신 피파이(皮牌)의 첩이 된 회은군 이덕인의 딸이 심양관을 드나들었다는 기록과 강빈 사사 이후 역관 서상현과 이신검이 강빈의 심부름으로 해초를 사오고, 금부처 등 재물을 실어 봉황성에 갔던 일로 심문받고 처형당한 사례를 바탕으로 간접적으로 청 황실, 청 귀족 여인들과 교류하고 무역을 했을 가능성을 상상했던 게 어느 순간 정설이 되고 있다.[60]

이석철이 왕이 되었으면 강빈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을 거란 일각의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 종법상 수렴청정은 대비의 몫이지 왕비가 된 적도 없는 며느리의 몫이 아니다. 그 인수대비조차 드라마와 달리 실제론 정치에 크게 관여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강빈이? 인조가 이석철에에 보위를 물려줬으면 나이 어린 장렬왕후가 수렴하게 되고 조선 내정은 훨씬 혼란스러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장렬왕후는 너무 어려서 한낱 후궁에 불과한 소용 조씨도 맘대로 못하는 처지였고 당시 조선은 인조 말기에 내정 수습이 마무리 되지 못한 상태로 청의 재침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조 말기부터 일본 핑계로 군사력 재건을 시도하며 청과 협상을 시도하는데 청은 이걸 곱게 보지 않아 3번째 침공 가능성을 재단했다. 효종은 친청파 김자점을 처단하고 이경석 등 외교전문가들을 파견해 위기를 진화한 뒤 대동법 등 인조대 미완된 제도 개혁을 이어가는데 이게 12살짜리 어린 왕과 26세 왕대비 데리고 가능한 일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강씨의 친정이 고려 구국 영웅 강감찬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강감찬의 묘가 1960년대에 이를 때까지 위치가 묘연해졌다"는 주장이 있는데, 진주 강씨 인헌공파 문중에서 날조한 이야기다.

대한제국 멸망 직전인 순종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순종 3년 1월 6일 승정원일기 묘의 위치를 아니까 정비하고 제사 지낼 것 아닌가? 국역만 보면 찾아 보수하라는 부분을 '실전된 무덤을 수소문해 정비하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방문(訪問)으로, 지방관이 묘를 찾아보고 주변을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주라는 지시다.

4. 여담

  • 보통 '민회빈'보다 당대 호칭인 '강빈(姜嬪)'으로 불리는데, 이는 그녀가 폐위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신원되어 시호를 받았기 때문이며 시호를 받은 뒤에도 이게 통칭으로 굳어졌다. 폐세자빈 중에서 '성+빈'으로 된 명칭이 쓰인 사람들 중에서 이 명칭이 대한민국에서도 통칭으로 쓰이는 건 민회빈 뿐으로 과부가 된 세자빈이었는데 봉호를 받기 전에 폐위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남편은 폐세자가 아닌데 폐세자빈이 된 세자빈은 민회빈 외에 3명(현빈 유씨, 휘빈 김씨, 순빈 봉씨)이 더 있지만, 이들은 모두 세종 때 이전으로 세자빈이 되자마자 봉호를 받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봉호(封號)'로 불린다. 다만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될 때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지와 세자빈 박씨도 같이 폐위당했다. 안타깝게도 박씨는 유일하게 세자빈 시절에 봉호도 못 받아서 폐빈 박씨라고만 불린다.
  • 동생인 강문두가 신익성의 딸과 결혼하는데, 강문두의 장모가 다름아닌 선조인빈 김씨의 딸 정숙옹주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정숙옹주의 동복오빠가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이다. 즉, 인조와 신익성의 딸은 고종(외)사촌이며 이미 며느리 이전에 민회빈 강씨와는 사돈간이었던 것. 소현세자에게 강문두는 당고모부(종고모부)인 동시에 처남인 셈.

5. 대중매체에서

  • <박씨전>의 박씨 부인의 실제 모델이 민회빈 강씨라는 설이 있는데 근거가 희박하다.
  •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는 배우 이문희가 연기했다.
  • 2007년 역사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에서는 이선영 아나운서가 연기했다.
  •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배우 김하윤이 연기했다.
  •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배우 송선미가 연기했다. 온화하면서 따뜻하고[61] 매우 진취적이고 강인한 여성상[62]을 보여주는데 작중에서 보여준 행각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역적 소리 들으며 사약 정도가 아닌 거열형 받는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막 나가는 등 실제 역사와는 다른 행동도 보여주었다. 주인공 소용 조씨와 첫 만남부터 시아버지가 총애하는 후궁조소용을 천출이라고 경멸하거나 조씨 소생 숭선군을 "천기는 면하게 해주겠다"고 조롱하는 등[63] 숭선군을 왕족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무개념 발언에다 중간부터는 세자빈의 외당숙인 송준길이 염려할 정도로 편집증적인 정신병 환자로 보일 정도로 상당히 과격하다. 남편 소현세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한밤 중에 사람들을 떼로 끌어모아 궁궐로 달려가는 장면이라든가, 세자빈의 엄마라는 작자는 세자로 임명된 봉림대군에게 대놓고 "세자 자리를 도둑질했다"고 모욕을 주는 등 역모로 능지처참당해도 할 말 없는 행동을 보인다.[64] 하지만 역사적 왜곡과는 별개로 송선미의 열연으로 인해 인물이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의 소현세자를 다른 작품들에서 존재감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 유시연의 역사 소설 <공녀, 난아>에서는 주요한 조연으로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몸종인 주인공 난아와 친하게 지냈으나 얄궂은 운명으로 주인공은 공녀가 되어 고생하다가 강씨와 다시 만나는가 했지만 결국 역사대로 강씨와 두 아들은 죽고 살아남은 강씨의 3남인 석견을 주인공이 돌보는 결말을 맺는다.

6. 참고 문서


[1] 순회묘로 명명순회세자 무덤의 전례에 따라 소현묘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순회묘, 의소세손의 의소묘와 함께 원(園)으로 개칭되었다. 무조건 세자무덤=원(園)이 아니고 원이 아닌 묘로 명명했으니 격을 낮췄다고 하면 안 된다. 세자의 무덤을 원으로 일괄 명명하기 시작한건 조선 망하기 직전인 고종 때의 일이다. 그전까진 정조가 비명에 죽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전부로 그 외엔 묘라고 부르다 의경세자, 효장세자, 효명세자처럼 추존되면 '릉'으로 올리는 식이었다. 사도세자의 경우도 그가 조선사에 유일무이한 부왕에게 처분당한 세자라서 큰아버지 진종(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된 정조선왕과의 의리를 내세우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추존하는게 불가능해 궁여지책으로 '원'으로라도 개칭한 것이지 단순한 병사(病死)였다면 바로 왕릉으로 격상되었을 것이다.[2] 이조판서 신식의 딸이다.[3] 진주 강씨 인헌공파라고 불리기도 한다.[4] 소현동궁일기에서는 1625년(인조 3년)과 1626년(인조 4년)에 강석기가 부응교와 집의 등을 역임하는 한편 겸사서(兼司書, 정6품), 겸문학(兼文學, 정5품), 겸보덕(兼輔德. 정3품)직을 맡아 세자강학에 참여한 기록을 담고 있다.[5] 이 뒤에 소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야사들이 주르륵 나온다. "현명한 규수가 난폭하고 어리석은 세자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연기를 했다"는 것. 다만 공사견문록의 저자인 정재륜만 해도 효종부마로서, 야사를 통해서라도 소현세자의 이미지를 망쳐야 할 충분한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자세한 건 소현세자 항목 참조.[6] 소현세자는 아둔하고 난폭하다는 야사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실제 사가 기록을 보면, 다소 내향적이고 낯가리는 성향은 있으나 착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다. 또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책임감이 강하고 아랫사람들을 세심하게 신경써 주는 타입이었으며, 일절 도덕적 실책이나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고 도리어 정묘호란분조를 이끌거나 병자호란의 패배와 항복으로 인해 에 볼모로 잡혀가서도 차기 국본(왕세자)다운 현명한 처신을 보였다. 역시 자세한 건 소현세자 항목 참조.[7] 예시라고 하긴 뭐하지만 당시 생존해있던 왕실 최고 어른인 소성대비광해군의심병에 휘말려, 아들 영창대군친정 식구들을 모두 잃고 딸 정명공주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는 큰 고난을 겪은 바 있다. 사실 어찌보면 인목왕후는 적절한 예시인게 사대부 여성이 오를수 있는 가장 최고 권력 및 지위이자 피가 섞이지 않은 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대비의 자리까지 앉았음에도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핍박한 광해군은 폐위당하고 인조가 오른 것이지만 인조도 제 2의 광해군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었고 실제로도 조강지처 인열왕후와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인목왕후가 모두 부재한걸 기회삼아 계비 장렬왕후도 무시한채 강빈을 왕의 권위 하나로 퉁쳐서 어거지로 죽인것이다.[8] 김상용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불을 질러 자결했다. 이때 "김상용은 자결한 것이 아니라, 담뱃불을 붙이다 사고사했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김상용과 피난생활을 함께 했던 강석기는 이 소문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김상용이 자결한 과정을 변호, 설명하기도 했다.[9] 강석기와 함께 자결한 김상용의 명예를 위해 변호하기도 했다.[10] 김상용 본인이거나 당시 장동 김씨의 영수였던 다른 인물로 보인다. 장동 김씨안동 김씨의 한 분파로, 대대로 한양 북촌에 살던 유서깊은 권세가였다.[11] 그릇 등 살림살이에 쓰는 기물[12] 인조실록 17권, 인조 5년(1627년) 7월 8일[13] 인조실록 17권, 인조 5년(1627년) 10월 8일[14] 1628년 12월 24일 산실청을 철거했다는 승정원일기 기록, 그리고 동궁일기에 12월 17일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궁일기에는 '중전'이 출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학자들은 빈궁의 오기로 결론내린 듯 하다. 직후 시강원 스승들이 빈궁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이 있는데다, 인열왕후는 이듬해 7월에 대군을 출산했기 때문에 달수가 안 맞기 때문이다. 양력으로는 1629년 1월10일에 출산.[15] 산실청은 중전 인열왕후가 출산해도 세울 수 있었고 인열왕후 역시도 아직 출산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마침 인조와 인열왕후는 딸도 거의 못 낳았던터라 만약 이 딸이 훗날 사망했다면 왕과 왕비의 딸인 공주가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다.[16] 참고로 조선은 계승권이 없는 딸이라도 봉군 자체는 오늘날로 따지면 유치원~초등학생 때로 꽤 늦게 하는 편이었다. 1628년에 태어난 공주는 아마 7~8살 즈음인 1635~1636년에는 친할머니이자 중전 인열왕후의 사망과 병자호란을 잇달아 겪으면서 미처 봉군을 못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17] 1640년(인조 18년) 1월 5일 군주(세자의 적녀)가 사망했고, 이로 인해 인조가 상심했단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있으며, 또 1640년(인조 18년) 1월 25일 심양일기에 군주의 부음이 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상으로 보면 조선에서 죽은 딸의 소식이 이무렵 심양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18] 일각에선 1628년(인조 6년) 태어난 딸이 이때 죽었고 1631년(인조 9년) 태어난 딸이 1640년(인조 18년) 죽었다고 기술되기도 했는데, 동궁일기를 근거로 하면 이때 죽은 건 명확히 새로 태어난 '신생' 군주다.[19] 이런 부분에서 조선왕조실록이 사료로서 더 나은 점은 당대 사람들이 눈으로 맥락을 정리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이해시켜 준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은 그 시대 관점에서 더 중요한 맥락만 다루기 때문에, 이 손녀의 죽음 소식에 놀란 인조가 태묘의 동향대제를 중지했다는 것만 제대로 기술되어 있다.[20] 인열왕후1635년(인조 13년) 12월 5일 출산하였으나 이때 낳은 왕자는 바로 사산해 죽고 인열왕후도 그에 대한 충격으로 위독해졌다가 12월 9일 결국 승하했다.[21] 인조실록 32권, 인조 14년(1636년) 4월 14일 무자 1번째 기사[22] 이후 강빈은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던 시절인 1637년(인조 15년) 3녀 경숙군주, 1640년(인조 18년) 2남 경완군 석린, 1642년(인조 20년) 4녀 경녕군주, 1643년(인조 21년) 5녀 경순군주가 청나라 심양에서 출생했고 1644년(인조 22년) 10월 북경에서 3남 경안군 석견을 낳았다. 2남 3녀를 낳고 조선으로 영구 귀국 후 1645년(인조 23년) 3월 경 아들을 임신하나, 소현세자 사후 유복자가 되고 충격으로 유산한다.[23] 나중에 상복 배틀 예송논쟁의 단초가 될 장렬왕후가 이 새 중전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1639년(인조 17년)에 15살 때 인조와 혼인했다. 하지만 인조는 큰손녀보다 고작 4살 많은 어린 아이를 중궁전에 앉혀놓고 후궁 소용 조씨만 찾느라 중전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찬밥 신세) 취급한 게 거의 확실하다. 장렬왕후에게서 자식 보기는 고사하고 나중에 인조창경궁에서, 장렬왕후경덕궁에 거하는 등 대놓고 별거생활을 했다.[24] 1628년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주를 의미한다[25]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모시고 청나라까지 따라가 수행했으며 조선에 귀향하기 전 시헌력에 대한 역법서를 입수해 시헌력 채용을 처음으로 거론했다. 시헌력이 정식 채용되기 전부터 집안 제사를 시헌력(양력)에 맞춰 치를 정도로 열성적이었다.[26]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1636년) 12월 14일 갑신 3번째기사[27] 동시대를 다룬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인조소현세자, 문무 백관들은 항전 과정에서 시종일관 감정을 참고 꽤 싸늘한 분위기로 수심에 잠겨있는데, 실록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며, 설령 현실이었어도 항전이 길어진 후반 분위기일 것이다. 실록을 보면 다들 초반엔 서로를 안쓰러워하고 감정이 복받쳐 왕이건 세자건 신하들이건 죄다 눈물 파티. 한국인 정서 기본 코드가 괜히 신파인게 아니다.[28] 종묘사직.[29] 반면 소현세자와 관련된 연려실기술 야사들은 부정적인 것들이 많은데 실록 기록에서 유추되는 인물상과 모순되는 방향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아 소현세자 사후 효종의 사위(정재륜)가 주도한 정치적이고 악의적 왜곡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건 소현세자 항목 참조.[30] 민성(閔垶)이라는 사람은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먼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를 벤 뒤 자살하였다. 이건 숱한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31]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32] 당시의 삼전도는 말 그대로 섬의 형태였으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야 섬 주변이 땅으로 메워지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잠실 부근[33] 왕세자의 적녀. 왕세자의 서녀는 현주라 한다.[34] 일찍 죽은 두 군주는 지금의 민회빈이 묻힌 영회원 인근에 묻혔으나 묘소는 실전되었다. 이중 둘째 군주는 부모가 심양에 인질로 있던 그 시기에 사망했다.[35] 심양의 만주어 명칭.[36] 특히 경숙군주와 경완군 이석린은 연년생이다. 그 아래의 3남매 경녕군주, 경순군주, 경안군 이석견도 셋이 나란히 연년생이다.[37] 다름아니라 강빈의 시어머니 인열왕후가 출산으로 사망한것이다. 이렇게 인열왕후가 일찍 사망하여 시아버지 인조의 인성적인 결함이 더욱 심해져서 강빈과 그의 자녀들이 얼마나 억울한 일들을 당했는지를 생각하면 인열왕후의 사망으로 강빈에게 비극의 씨앗이 심어진 셈이다.[38] 귀국하던 당시 강빈은 임신 초기로 남편인 소현세자 사후, 유복자를 사산하였다[39] 그 외에도 인조의 가계 자체가 요절로 점철돼있다. 인조의 친아들 중 숭선군이 52세로 가장 장수했고, 효종이 41세, 인평대군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손자 대에서도 복평군이 52세에 사망한 것이 최장수 기록이다. 증손자 대인 숙종이 그나마 60세. 물론 당시 시대상 50대면 그럭저럭 장수한 거긴 하지만.[40] 참고로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현종당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 다툼이 벌여져 아버지 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상왕이 5명 있었는데, 세조는 상왕으로 달랑 하루 있다가 병사했으므로 크게 의미없는 사례고, 태종은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르고 맘편히 살다갔다. 하지만 나머지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 즉 1,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중 단종은 어린 나이로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41] 대명률 등 조선시대 형법상, 궁중 인물에 대한 저주는 참수에 해당하는 대역죄에 버금가는 중범죄였다.[42] 출처 : 승정원일기.[43] 왕비 칭호.[44] 그나마도 사관의 기록에 의하면 본인이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함.[45] 여기서 인조가 가장 어이없는 헛소리를 내뱉고 자빠졌는데, 애초에 강빈은 저주 사건에 연루되어 유폐,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문안을 드릴래야 드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문안을 안 오는 것 따지기 전에, 감금부터 풀어주고 봤어야 했다.[46] 다만 재료 손질 정도는 궁녀가 거들기도 했다.[47] 전복에서 독이 발견되었을 때 민회빈 강씨는 후원 별당에 구금되어 있었고, "강빈이 전복에 독을 넣었다"고 주장한 것은 인조 외에는 없었다.[48] 민회빈 강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폐비 윤씨에 비하면 강빈의 혐의는 실제적으로 나온 것이 없었고,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소현세자 사망 뒤에 시녀들이 "강빈의 사주로 무당과 통했다"느니, "저주를 벌였다"느니 등의 혐의로 국문받고 유배되고 강빈의 오라비들까지 유배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대전 앞에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라며 고함 지른 정도.[49] 작은아버지. 인조는 "인평대군을 말하는 듯하다"라고 주장.[50] 당시 강빈 사건은 철저히 인조가 독단적으로 조사했으며, 의금부 등 신하들을 통한 사법절차 따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51] 강석기는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영의집 김창집의 상소로 간신히 복권됐다.[52] 이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청나라에서는 "우리가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데려다 키우겠소!"라고 청했으나, 오히려 인조는 "뭐하러 구태여 그렇게 하시오? 어차피 셋 중에 둘은 이미 죽었소!"라고 구라를 쳐서 돌려보냈는데, 말이 씨가 되었는지 석철과 석린이 얼마 안 가 풍토병으로 숨졌다.[53] 윤방이 인조 재위기인 1640년(인조 18년)에 죽은 후 그 아들이 시호를 청하기 위해 당대 최고 문장가 이식에게 사장을 받았는데, 이런저런 사건이 터져 사장도 못 올린 채 이식이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이때 다시 올리려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장을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으로 올릴 수는 없어서 대신 조익에게 부탁했다. 조익은 "이식의 문장이 워낙 좋으니 고칠 게 없다."라며 한두개의 구절만 빼고 그대로 옮겼는데, 문제는 강빈이란 표현을 고치지 않았던 것.[54] 김홍욱의 직계 5대손이 뒷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이다.[55] 헌데 김홍욱에게도 억울한 면이 있었는데, 효종이 "다시는 내 앞에서 강빈 얘기는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라!"라고 했을 때 김홍욱은 외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명을 전달받지 못했다. 김홍욱 입장에서는 졸지에 날벼락을 맞아버린 셈. 김홍욱 본인도 이 점을 어필하며 제발 선처해달라고 했고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지만, 하필 주요 쟁점이 역린이나 다름없는 강빈이었던지라 효종은 기어이 김홍욱을 죽여버렸다.[56]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가. 옛날부터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용방(龍逄)과 비간(比干)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은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국가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죽었는데, 용방은 하나라의 걸왕, 비간은 주나라의 주왕에게 간하다가 죽었던 충신이었으며,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두라는 말은 오자서의 일화다. 사실상 효종을 걸주에 비유하며 이 나라는 망할 것이라며 저주하다 죽은 셈.[57] 홍우원은 2년 뒤에 재복직된다.[58] 실제로 당시 조정 신료들 상당수가 "인조의 후계는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원손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59] 조정 내부 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에 이 헛소문이 퍼졌는지, 심지어 이 시기에 조선에 살았던 헨드릭 하멜도 '왕의 형수가 왕을 저주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라고 잘못 적었을 정도였다.[60] 김남윤, 2013, 소현세자빈 강씨의 심양관 생활, 역사연구No.24, 역사학연구소.[61] 소용 조씨의 계략으로 궁에서 쫓겨나 가마를 타고 귀양을 가던 중 거리로 나온 신하들과 백성들의 대성통곡을 듣자 가마에서 직접 내려 그들의 손을 어루만져주었다.[62] 해산한지 얼마 안 되어 궁녀들과 함께 밭일을 하다가도 "홍승주의 투항으로 임경업명나라와 내통했음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다짜고짜 소현세자를 잡아가 하옥시켰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밭일하던 작업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서 따져묻는 패기를 보여준다. 도르곤조차 질려서 어영부영 변명으로 일관할 정도.[63] 조선에 귀환하면서 소현세자와 같이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겠다"고 약속한 것과 모순된 행위로, 아마 조소용을 단순한 악녀가 아닌 입체성을 가진 인물로 만들고자 한 복선으로 보인다.[64] 하지만 세 아들에 관해서는 진한 모성애와 더불어, 평소의 당찬 성격과 달리 한없이 약한 모습도 보인다.[65] 2012년 MBC 드라마 <마의>에서는 소용 조씨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