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5 14:55:46

휘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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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자 이향의 폐빈
휘빈 김씨 | 徽嬪 金氏
출생 연대 미상
사망 연대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427년 5월 14일 ~ 1429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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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구 안동 김씨
부모 부친 - 김오문(金五文)
모친 - 정부인 하동 정씨(貞夫人 河東 鄭氏)
배우자 문종
봉작 휘빈(徽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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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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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세자빈. 세종의 첫 번째 맏며느리이고, 왕세자 시절 문종의 첫 정실이다.

2. 생애

구 안동 김씨 가문 출신으로, 상호군 김오문과 숙경택주 정씨의 딸이자 정총의 외손녀이다. 오빠 김중엄은 세종의 조카사위[1]였고, 고모가 태종후궁명빈 김씨이며, 이모부가 이숙번이다. 이런 가문의 배경으로 1427년(세종 9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궁에 들어왔고, 휘빈에 책봉되었다.[2]

그러나 세자 문종은 아내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3] 효동, 덕금이라는 궁녀들을 더 좋아하였다. 휘빈은 남자에게 사랑받는 술법을 시녀 호초에게 물었다. 호초는 세자의 수발을 드는 궁녀의 신발 앞코를 잘라 그것을 태워 재로 만든 다음 세자의 술에 넣어 마시게 하면 세자가 궁녀들을 잊고 세자빈만 찾게 될 것이라는 내용과, 암수 뱀이 교미할 때 나오는 기운을 손수건에 묻혀서 가지고 있으면 세자를 혹하게 할 수 있다는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을 베어다가 불에 태워서 가루를 만들어 가지고 술에 타서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내가 사랑을 받게 되고 저쪽 여자는 멀어져서 배척을 받는다 하니, 효동·덕금 두 시녀의 신을 가지고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는데, 두 여인(효동, 덕금)은 김씨가 시기하는 자들이다. 김씨는 즉시 그 두 여인의 신을 가져다가 자기 손으로 베내어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이나 하여 그 술법을 써 보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틈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호초가 또 말하기를, ‘그 뒤에 주빈께서 다시 그 밖에 또 무슨 술법이 있느냐고 묻기에 제가 또 가르쳐 말하기를,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11년 7월 20일

이상한 술법을 행했다는 흔적이 나오자 소헌왕후가 세자빈의 시녀 호초를 국문해 세자빈이 술법을 행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소헌왕후가 이를 세자빈에게 추궁하자 김씨는 이를 순순히 인정하였고, 중전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대왕은 격노하여 시녀 호초를 참수하고[4] 휘빈 김씨를 폐서인하여 궁에서 내쫓았다.

성종폐비 윤씨를 폐하려하자 임사홍이 반대하였는데, 이때 근거 중 하나가 "세종대왕께서도 휘빈을 쫓아내고 나중에 후회하셨습니다."였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세종은 성급히 휘빈을 쫓아낸 걸 후회했었음을 알게 해준다. 특히 두 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궁녀와 동침하는 사건을 일으켰기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또한 결과론이지만 이때 휘빈과 문종의 결혼이 정상적으로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보았다면, 그 아들의 정통성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다른 사항 볼 것 없이, 그 자식의 나이가 문종 즉위 무렵에 이미 성년의 나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종이 정통성면에서는 완벽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이라는 것과 후견인의 부재라는 빈틈으로 인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말았는데, 만약 이때 태어난 아들이 있었고 문종 즉위 당시 성년이었다면 더이상 말 할 가치조차 없다.


[1] 태종의 차녀인 경정공주의 사위이다. 참고로 경정공주의 남편, 즉 김중엄의 장인이 조대림 사건으로 유명한 조대림이다.[2] 왕비와 세자빈에게도 후궁처럼 별도의 호를 내려주는 것은 이 당시까지 고려의 관습이 남아 있던 영향으로, 휘빈이 폐출된 이후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 폐지되었다.[3] 야사에 박색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상한 짓 하다가 쫓겨난 폐세자빈이라 미화할 여지가 없는데도 정사엔 이런 기록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진짜 추녀였다고 볼 근거는 없다. 문종이 그녀를 총애하지 않았다는 것, 순빈 봉씨를 간택할 때 세종이 노골적으로 외모를 봤다는 것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 듯하다. 물론 그렇게 외모를 보고 뽑은 순빈도 문종과 금슬이 좋지 않았던 걸 보면 휘빈이 사랑받지 못한 이유가 외모 때문이었다고 보긴 어렵다.[4] 연좌제로 이어질 수 있었는데 호초의 아버지인 원주목사 이반을 파직하는 선에서 끝냈다. 호초의 오빠인 호조좌랑 이종인은 관직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