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22:19:35

공해동

<colbgcolor=#000><colcolor=#fff> 공해동
孔海東
출생 1931년 11월 22일
경상북도 달성군
사망 1952년 9월 13일
강원도 금성군
복무 대한민국 육군
최종계급 육군 하사
복무 기간 1951~1953
1. 개요2. 생애 및 군 경력 3. 공훈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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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해동(孔海東, 1931년 11월 22일 ~ 1952년 9월 13일)은 대한민국의 6.25전쟁 참전 군인이다.

2. 생애 및 군 경력

초기 생애 및 육군 입대
공해동 하사는 1931년 11월 경상북도 달성군 하변면에서 출생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제26연대 제1대대 수색중대의 기관총사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하였다.

6.25 전쟁 참전
수도고지 전투와 중공군의 공세
1952년, 휴전회담이 포로송환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중공군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국군을 상대로 강력한 국지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국군 제2군단은 6월 10일부터 적정 탐지 및 적진 파괴, 교란을 위한 제한목표공격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하계·추계공세로 인해 수도고지, 지형능선, 독수리고지, 피의고지, A고지, B고지 등 주요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었다.
수도사단은 1952년 3월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마친 후 중부전선 금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수도고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고지 탈환 작전 및 공해동 하사의 활약
1952년 9월 6일, 중공군의 공세로 수도고지가 함락되었다.
수도사단은 제26연대를 투입하여 6차례 탈환 작전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임무를 교대한 제1연대가 9월 9일 수도고지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후 중공군은 수차례 반격을 감행하며 수도고지를 탈환하려 했지만, 수도사단은 끝까지 방어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도사단 제1연대에 배속된 제21수색중대 기관총사수 공해동 하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기관총을 사격한 투혼
1952년 9월 13일 새벽 1시 15분, 녹색 신호탄과 함께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다섯 개의 주요 접근로를 통해 중대 단위 병력을 투입하며 수도고지를 향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공해동 하사는 기관총을 사격하며 적의 돌파를 저지하였으며, 우박처럼 쏟아지는 적 탄환에도 불굴의 투지로 방아쇠를 놓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여러 발의 총탄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였으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관총을 사격하며 적의 공격을 끝까지 저지하였다.
공해동 하사의 희생적인 저항 덕분에 수도사단은 끝내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치고 수도고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해동 하사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또한 2019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그를 "9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3. 공훈

을지무공훈장 (1952년 추서)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2019년 9월)

4. 참고 자료

국방부, 『호국의 별』7, 1983.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6.25 전쟁영웅 공해동 육군 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