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광덕 光德 | |
속명 | 고병완(高秉完) |
출생 | 1927년 ?월 ?일 |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내리(지금의 경기도 오산시) | |
사망 | 1999년 2월 27일 (향년 72세) |
사망지 미상 | |
직업 | 승려,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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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보출처]해방 이후 봉은사 주지, 동국학원 이사 등을 역임한 승려.
속명은 고병완(高秉完)이다.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내리(지금의 경기도 오산시)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집안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소년기에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성한 독서욕과 몸에 배인 독학으로 철학, 역사, 법률, 경제 등 인문사회 분야와 물리학, 수학, 농학 등 자연과학 분야를 넘나드는 독서를 하였다.
2. 생애
청년기에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였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식민지 청년의 민족의식이 눈을 뜨게 되자 삶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당시 박종홍과 신소천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부터 불교로 귀의하게 되는데, 박종홍은 그에게 한국 사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일제시대에 대각사에서 금강경 강의를 통해서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펴고 있던 소천은 깨달음을 불교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에 반야의 대용(大用)을 열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1950년 24세 때 범어사로 출가하여 1956년에 구족계(具足戒)를 동산으로부터 받았다. 은사이자 계사인 동산은 늘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할 것을 요구하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날 중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중이 된 다음에도 행자를 자처하여 출가한 뒤 10여 년 동안이나 행자생활(行者生活)을 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광덕은 곧 비구·대처 양측이 가담한 통합 종단 발족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6년에 대각회를 창립하였는데, 이 무렵 그는 새로 탄생하는 종단의 종헌(宗憲) 전문(前文)에 보조 지눌(普照知訥)을 종조(宗祖)로 명기하였다. 하지만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보조 지눌을 둘러싼 종조 논란은 당시 큰 문제가 되었다. 1963년에는 대학생불교연합회를 조직하였고, 1965년부터 1967년까지 봉은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74년에는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월간 『불광』과 출판사를 만들었으며, 1975년에는 불광회를 조직하여 최초로 도심포교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1977년부터 1995년까지 학교법인 동국학원 이사를 역임하는 등, 그는 일생을 전법(傳法) 포교와 교육에 전념하다가 1999년 2월 27일(음력 1월 12일), 나이 73세, 법랍 50세로 입적하였다.
[정보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광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