京都小学生殺害事件
1. 개요
1999년 일본에서 발생한 아동 살인 사건. 후술될 범인의 범행 성명서에서 따 온 '테루쿠하노루 사건(てるくはのる事件)' 혹은 사건 발생 장소에서 기인하여 '히노 초등학교 아동 살인 사건(日野小学校児童殺人事件)'이라고도 한다.2. 사건 경위
1999년 12월 21일 오후 2시경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 소재한 시립 히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이던 2학년생 나카무라 토시키(中村俊希, 당시 7세)군이 복면을 쓴 괴한에게 목 등을 수 차례 찔려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당시 운동장에는 초등학생 20여 명이 놀고 있었고 범인은 이들 중 정글짐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토시키군에게 접근하여 상해를 입혔다. 이상하게도 범인은 토시키군을 찌른 뒤 다른 아동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북쪽에 위치한 뒷문으로 빠져나가 자전거로 도주했다.사건 현장과 범인의 도주 경로에서 유류품이 여럿 발견되었는데 사건 현장인 운동장에서는 길이 약 30cm 가량의 식칼 1자루와 둔기, 살충제 용기가 발견되었고 현장에서 약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원에서 피 묻은 점퍼와 도주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전거, 검은 복면과 장갑 한 짝, 나이프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토시키군이 습격당했던 정글짐 근처에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의 '범행 성명문'이 발견되었다.
나는 히노 초등학교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유는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도망치지만 나중에 이름을 말할 작정으로 편지를 남깁니다. 그러니 지금은 뒤쫓지 말아 주십시오. 절 찾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식별하는 기호
테루쿠하노루(てるくはのる)[1]
이유는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도망치지만 나중에 이름을 말할 작정으로 편지를 남깁니다. 그러니 지금은 뒤쫓지 말아 주십시오. 절 찾지 말아 주십시오
저를 식별하는 기호
테루쿠하노루(てるくはのる)[1]
성명문 마지막의 '테루쿠하노루'라는 의미불명의 문구 때문에 이 사건은 언론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성명문의 내용이나 범행 수법 등이 불과 2년 전 고베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고 특히 초등학생이나 미취학 아동 자녀를 둔 부모들의 불안감을 크게 증폭시켰다. 언론을 비롯해 각계 각층에서 '테루쿠하노루'의 의미를 놓고 수많은 해석과 의견이 오갔지만 범인을 추론해내지는 못했다.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노 초등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치안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사건 전부터 고양이를 프라이팬으로 지지거나 건물 옥상에서 떨어뜨리는가 하면 도랑에 빠뜨려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 일련의 동물 학대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시너를 흡입하는 불량학생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망치를 든 괴한에게 쫓겨 도망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히노 초등학교 부근에서 차에 탄 남성이 아이들에게 뭔가 사 주겠다며 말을 거는 모습이 세 차례 정도 목격된 일이 있었다. 이렇다보니 주민들은 평소에도 아이들의 등하교 안전에 대해 상당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런 상황에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 직후 교토부경은 즉각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관 약 90여명을 동원해 범인을 특정하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당시 살해 현장을 목격한 초등학생의 '우리 형 또래로 보였다'는 증언과 범행 성명문의 서투른 글씨, 그리고 2년 전 사카키바라 사건의 전례를 토대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사이로 범인의 연령대를 특정하고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유류품의 경우 대부분 인근 상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기 때문에 유류품을 통해 범인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후시미구에 인접한 우지시의 한 대형마트에서 범행 이틀 전 젊은 남성이 유류품 중에 포함된 것과 같은 상품 3점을 사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러나 CCTV의 화질이 좋지 않은 데다 영상에 찍힌 남성의 모습도 경찰이 당초 예상했던 연령대보다 훨씬 높아서 수사 범위를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 바람에 수사는 더욱 난관에 부딪혔다.
이후 범인이 도주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 자전거가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서 판매되었고 방범등록 당시의 주소지가 우지시에 실존하는 비디오 렌탈샵 소재지로 기록되어 있음이 판명되었다. 이에 수사본부 측은 해당 비디오샵의 고객 명단을 분석해 대형마트 CCTV 속의 남성과 자전거를 구입한 남성의 인상착의가 매우 유사함을 확인함에 따라 사건 발생 1개월 만인 2000년 1월 후시미구에 거주하던 재수생 오카무라 히로마사(岡村浩昌, 당시 21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2000년 2월 5일 오전 7시경 경찰은 오카무라의 자택을 방문해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오카무라는 처음에는 동행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모친의 설득으로 자택 근처 공원에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한 뒤 수사관과 함께 공원으로 나갔다. 그러나 오카무라는 이후에도 임의동행을 계속 거부하다 수사관의 감시가 잠시 소홀해진 것을 틈타 도주했고 인근 아파트 단지 옥상으로 올라가 문을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오후 12시 30분경 오카무라를 발견했으나 옥상 문이 잠겨 있었기에 시간을 허비하는 데 그쳤고 결국 10분 후 오카무라는 그대로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교토지방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했을 때는 이미 오카무라가 자살한 지 5분이 경과한 후였다.
결국 용의자가 자살함에 따라 교토지방검찰청은 이 사건을 피의자 사망에 의한 불기소처분했다.
3. '테루쿠하노루'는 결국 무엇이었나
오카무라의 성명문 말미에 적힌 '테루쿠하노루'의 의미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으나 후에 수사관들이 오카무라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결과 '명언명구 416 페이지'라고 적힌 메모가 발견되었다. 이 메모가 단서가 될 것으로 판단한 수사관들이 오카무라의 방 책장에 있던 명언집 416페이지를 펼쳐보자 'か행' 색인이 나왔으며 해당 페이지에 적혀 있는 글귀의 마지막 글자들을 하나씩 대조해 본 결과 'て', 'る', 'く', 'は', 'の', 'る'가 되는 것이 밝혀져서 결국 특별한 의미는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4. 범인 오카무라 히로마사
오카무라는 부모님과 위로 형이 1명 있었고 초등학생 시절에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학교생활을 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스포츠 만능으로, 특히 발이 빨랐으며 야구부에서도 늘 1, 2등을 다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가을에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전부터 심각했던 형의 가정폭력이 점점 더 심해져서 인근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오카무라의 어머니 얼굴에는 항상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고 한다. 형은 동생인 오카무라에게는 폭력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처참한 가정폭력 현장을 눈앞에서 보며 성장한 것이 후에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를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형은 취직하였음에도 가족들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1994년 4월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서도 성적은 여전히 우수했으며 육상부에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4위의 성적을 올리는 등 화려한 고교 생활을 보내는 듯 했으나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오카무라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결석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유급 위기까지 몰리게 되자 오카무라는 고등학교를 자퇴하려 했지만 담임교사의 만류로 일단 휴학하기로 했다. 휴학 기간 중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틀어박히다시피 지냈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혼자 아파트 복도에서 오랫동안 밖을 내다보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자전거를 만지는 등의 기행 때문에 '유별난 고등학생'이라며 오카무라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퍼졌다고 한다. 또한 휴학 기간 중 교사들은 오카무라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여 한동안 상담을 받게 하기도 했다.
1년간의 휴학이 끝나고 오카무라는 다시 학교에 돌아왔지만 1997년 11월에 담임교사에게 고등학교 생활에 아무 의미가 없으니 중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교사가 어찌어찌 설득하기는 했지만 본인은 납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고 결국 학년말 추가시험에서 영어만 낙제점을 받아 졸업하는 유례가 없는 사례를 남겼다.[2] 그런데 졸업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오카무라가 돌연 학교에 '졸업을 취소시켜 달라'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해 왔다고 한다. 이 전례 없는 요구에 교장과 교감이 이유를 거듭 물었지만 확실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고 이후에도 오카무라는 수십 차례나 졸업 취소를 요구했다.
이후에는 대입 수험에 도전하려 했으나 그다지 열의는 없었던 듯 게임에 빠져 지냈으며 단지에서도 오카무라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5. 사건 이후
사카키바라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2년만에, 그것도 대낮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아동 살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으며 수사 도중 빈틈을 보여 용의자가 도주한 끝에 자살하게 만든 경찰의 허술한 대응이 국민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이 당시는 초등학교 교문이 외부인에게도 완전 개방되던 시기였던지라 일련의 사건들 이후로 아이들의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학교 보안 문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다가 2001년에 10명의 사상자[3]가 발생한 이케다 초등학교 무차별 살상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외부인의 출입을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개선되어 갔다.사건의 피해자 토시키군의 부모는 후에 사건 당시의 상황과 아들을 잃은 심경을 담은 수기 '들으라, '테루쿠하노루'여(聞け、“てるくはのる”よ)'를 출판했다. 또한 아버지 나카무라 세이지는 사건 이후 '범죄 피해자의 모임[4]'에서 활동하면서 교토지검에 당시 수사기록 공개를 요청하기도 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15년 후인 2014년 범인이 같은 마을 사람들 몇명에게 편지를 남겼다는 주장이 모 인터넷 익명 게시판(한글 번역)에서 제기되었다. 편지를 받은 사람 전원이 범인과 친한 관계임을 부정했다는 내용. 다만 출처 자체가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2ch의 표절 사이트로 아무런 공신력이 없으며 오카무라의 메모나 책 하나하나까지 뒤져서 기사화되는 판국에 아는 사람도 여럿일 수밖에 없는 이런 정보가 엠바고가 지켜졌을 가능성은 낮으므로 인터넷 주작글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