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0:06

구순암(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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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7년 경기도
사망 1932년 5월 4일 이와테현 게센군 야하기촌
(현 리쿠젠타카타시 야하기정)
본적 경기도 미상
공훈전자사료관 분류: 후손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묘소 미확인
공훈전자사료관 분류: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사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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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2. 생애

1907년 무렵 경기도에서 태어났다.[1]

1930년 초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하여 노동쟁의를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2]

1932년 4월 정순옥鄭順玉 등과 함께 일본 이와테현岩手縣 게센군氣仙郡 야하기촌失作村오후나토선 철도 공사 현장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해당 공사 현장에서 한국인 노동자는 하루 12시간의 노동과 일본 평균 일당에 못미치는 금액을 받으면서 각종 용품을 고가에 구매해야 했다. 이에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토건노조상임위원회는 현지 지도를 위해 강유홍姜有鴻을 비롯한 2인을 파견했다.[3][4][5][6][7]

같은해 4월 26일 공사 현장에 분포한 간이숙소飯場를 중심으로 한국인 60여명과 일본인 4명이 참가한 동맹파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부상수당 지급, 해고 반대 등을 요구했다. 동년 동월 28일 200여명의 노동자들은 업무를 중지하고 동맹파업을 결의했다. 파업 노동자를 대리하는 교섭위원들이 아이다쿠미有田組와 협상한 결과 사측이 요구 사항의 상당부분을 받아들이면서 양측은 합의서에 조인했다. 이후 파업을 주도했던 지도부는 향후 운동 방향에 대하여 논의했다.[8][9][10]

같은해 5월 2일 합의서에 조인했던 아이다쿠미는 한국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며 일본인 100여 명을 무장시켰다.[11][12][13][14][15][16]

같은해 5월 4일 오후 5시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유혈사태가 발발했다. 구순암과 정순옥은 폭도들에게서 탈출한 강유홍 등과 공사 현장 내 간이식당 '모찌야餅屋'에서 대책을 숙의하던 중 오후 8시 30분 무장한 일본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한국인 지도부가 연달아 살해당하는 동안 구순암은 뽕나무밭으로 끌려가 피살되었다.[17][18]

3. 사후

같은해 5월 6일 검사의 입회 아래 구순암 등에 대한 부검이 집도되었고 8일 오후 2시 가매장되었다. 같은해 6월 8일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식이 열렸다.[19]

2006년 광복 61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총313명의 독립운동가에 훈.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구순암 등 99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20]

4. 기타

  • 활동 당시 야마다 하루키치山田春吉라는 이명을 사용했다.[21]
  • 구순암의 사망 원인은 2016년 부터 진행된 대한민국 정부의 『일본지역 한국독립운동가 찾기』 사업 와중에 확인되었다.[22]


[1] '구순암具順岩',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 '재외한인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일본 지역 서훈 미전수 독립유공자 현황과 전수 방안' 임영언(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3] '関東大震災から9年後、虐殺は「平時」にも起きていた', 安田 菜津紀, Dialogue for People 2024.1.4[4]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재인용[5] '200206 훈장미전수자 명단(일본)',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6]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7] 학술 자료 등에서 구순암의 행적은 강유홍과 중첩되어 서술된다. 다만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서 파견한 2명이 강유홍 외 김범이金凡伊로 확인되는 까닭에 구순암은 쟁의 초기 야하기촌 공사 현장에서 활동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8] '구순암具順岩',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9] '岩手県大船渡線鉄道工事場スト', 法政大学大原社会問題研[10] '이와대현 조선인 학살사건 (岩手縣 朝鮮人 虐殺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11] 아이다쿠미有田組에 대하여 주 나고야 총영사관 자료에는 폭력단을 조직한 주체로 설명하였고, 공훈전자사료관 자료에는 아이다쿠미가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했다고 서술했지만 폭력단과의 관계가 누락되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에는 폭력단의 명칭을 아이다쿠미로 기재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는 아이다쿠미를 청부업체로 표기하면서 노사협상 주체이자 폭력단을 조직한 배후로 기술했다. 오노데라 노리오小野寺教郎가 저술한 「산리쿠의 철로 그 빛과 그늘三陸の鉄路 その光と陰」에는 당시 관련 재판에 출석한 일본인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아이다쿠미를 원청업체(元請けの有田組)로 기재했다.[1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09년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4]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5]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재인용[16] 주 나고야 총영사관 2020.02.10 재인용[17] Dialogue for People 2024.1.4, 재인용[18]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20] '독립운동 포상자 명단', 동아일보, 2006.08.09[21]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재인용[22] 국가보훈부: 학술회의 자료 2020.06.15,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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