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910년 1월 24일 |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법상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 | |
사망 | 1935년 4월 1일 |
대구형무소 |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송현동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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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한국의 공산주의자.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권오종은 10살 연상의 9촌 조카, 즉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권예윤은 1910년 1월 24일 경상북도 안동군 부내면 법상동(현 안동시 법상동)에서 아버지 권태환(權泰煥)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남균(金南均)의 딸 사이의 3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25년 8월 창립된 안동청년동맹에 참여하였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피로서 자유를 얻는다', '버려야 할 것은 철쇄이고 얻어야 할 것은 자유이다', '전쟁은 우리들의 살 길이다'라는 글귀가 적힌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1930년 10월 16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11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착수하려 했지만 안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연이어 체포되면서 단체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31년 4월 안동지역 청년운동의 부흥을 위하여 안상윤(安相潤)·권중택(權重澤) 등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 안동콤그룹에 가입하고, 그 지도를 받게 될 인쇄직공조합과 여성투사 양성을 위한 여자부(女子部)의 조직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는 안동콤그룹의 세포 조직인 적색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3년 조직이 발각되어 안동콤그룹과 산하 세포 조직원 143명이 검속되었다. 권예윤도 이때 체포되어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35년 4월 1일에 옥사했다.
3. 기타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권예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1] 동정공파(同正公派) 조균(兆均)계 34세 영(寧) 항렬로, 본인은 항렬자를 쓰지 않았으나 남동생 권영재(權寧哉)·권영호(權寧浩)가 항렬자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