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12:13:50

기욤 드 노가레


1. 개요

Guillaume de Nogaret

기욤 드 노가레는 필리프 4세의 국새상서이자 필리프의 재위 초반의 정치를 이끈 정치인이다.

2. 생애

프랑스 남부 랑그독 지방[현]에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에서 세속 법학(또는 로마 법학)을 공부해 법학 교수가 된다. 마요르크 왕[2]의 법학 자문인을 맡았다. 1294년에 보케르 지방의 판관이 된 이후, 1295년에 필리프 4세에게 왕정 회의[3]의 일원이 되었다. 국쇄상서 피에르 플로트를 종교 업무에서 보좌하다가 1302년 황금 박차 전투에서 플로트가 사망하자 왕의 2인자가 된다.

필리프 4세에게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을 부도덕한 인물이라 혹평하며 대립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노가레는 아나니 사건에 휘말린 것으로 유명하다. 1303년에 교황과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 세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할 것이라 협박하고, 필리프는 노가레의 조언을 따라 보니파시오의 정통성을 심판하기 위한 공의회를 소집한다. 보니파시오가 파문 칙서를 작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노가레는 1303년 9월 7일 아나니로 가서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강청한다. 노가레와 동행한 반교황 역모를 꾀한 로마 출신 군인 콜로나는 교황에게 퇴임할 것을 요구하고, 교황이 "나는 죽어도 교황으로 죽겠다"고 선언하자 뺨을 때린다.

1306년에 노가레는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대인들 재산 압류와 퇴출 사업을 지휘하고, 이듬해 성전기사단 체포 및 핍박 정책을 펼첬다. 1307년에 국새상서가 되었다. 하지만 노가레를 경계하기 시작한 필리프는 시종 마리니에 의지하기 시작해 권력이 약화되지만, 1313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새상서로써 영향력을 행사했다.

3. 역사적 의의

법조인으로 시작해서 1306년부터 명실상부한 2인자였기 때문에 필리프 4세 시절을 삼부회의 사회적 상승과 근대 국가의 탄생의 기점으로 보는 역사가들의 단골 예시로 쓰인다. 하지만 필리프 4세 시절 중앙집권화가 시작되었던 것은 맞지만 왕을 포함한 엘리트들이 아직 봉건제의 논리로 집권하였고, 법조인들과 "공무원"들 중 필리프 4세의 왕실 회의 일원으로써 실권을 보유한 인물은 스무 명에서 서른 명 정도에 불과했다.
[현] 툴루즈 근방이라고 본다[2] 프랑스 남부, 스페인 동부에 위치한 작은 왕국[3] 당시 왕정 회의는 느슨하게 규정된 유력 인사들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