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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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로 | 夔州路
1. 개요
기주로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로 오늘날 청두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관할했다. 동천부로, 이주로, 성도부로와 함께 사천(四川)의 유래가 되는 천협사로(川峽四路) 중의 하나이다.여기에 적힌 정보들은 《송사》 89권 지리지5의 정보를 따른다.
2. 행정구역
2.1. 기주(夔州)
운안군(雲安郡). 도독부(都督府)로 영강군절도사(寧江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치소는 백제성(白帝城)에 설치하였으나 1006년 성의 동쪽으로 치소를 옮겼다. 1129년 기이병마검할(夔利兵馬鈐轄)로 승격되었다. 1188년 수신이 귀주(歸州)와 협주(峽州)의 병마사(兵馬司)를 겸임하였다.- 현
- 봉절현(奉節縣), 무산현(巫山縣)
2.2. 소경부(紹慶府)
검중군(黔中郡). 본래 검주(黔州)로 군사주였으며 무태군절도사(武泰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1228년 부로 승격되었다.- 기미주[3]
- 남영주(南寧州), 원주(遠州), 건주(犍州), 청주(淸州), 장주(蔣州), 지주(知州), 만주(蠻州), 습주(襲州), 아주(峨州), 방주(邦州), 학주(鶴州), 노주(勞州), 의주(義州), 복주(福州), 유주(儒州), 영주(令州), 학주(郝州), 보령주(普寧州), 연주(緣州), 나주(那州), 난주(鸞州), 사주(絲州), 공주(邛州), 부주(敷州), 황주(晃州), 후주(侯州), 분주(焚州), 첨주(添州), 요주(瑤州), 쌍성주(雙城州), 훈주(訓州), 향주(鄕州), 무룡주(茂龍州), 정주(整州), 악선주(樂善州), 무수주(撫水州), 사원주(思元州), 일주(逸州), 사주(思州), 남평주(南平州), 훈주(勳州), 강주(姜州), 능주(稜州), 홍주(鴻州), 화무주(和武州), 휘주(暉州), 박주(毫州), 팽주(鼓州), 현주(懸州)
2.3. 시주(施州)
청강군(淸江郡). 군사주였다.- 감
- 황적감(廣積監)[6]
2.4. 함순부(咸淳府)
남빈군(南賓郡). 본래 충주(忠州)로 군사주였다. 도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머물렀던 잠저가 이곳에 있어서 1265년 당시 연호였던 함순(咸淳)을 따서 부로 승격하였다.2.5. 만주(萬州)
남포군(南浦郡). 군사주였다.- 현
- 남포현(南浦縣)[9], 무령현(武寧縣)
2.6. 개주(開州)
성산군(盛山郡). 군사주였다.2.7. 달주(達州)
통천군(通川郡). 군사주였다. 본래 명칭은 통주(通州)였으나 965년 개칭되었다. 967년 낭영현(閬英縣)과 선한현(宣漢縣)을 폐지하고, 1073년 삼강현(三岡縣)을 폐지하고, 1075년 석고현(石鼓縣)을 폐지하여 통천현(通川縣), 신녕현(新寧縣), 영목현(永睦縣)으로 통폐합했다.2.8. 부주(涪州)
부릉군(涪陵郡). 군사주였다. 1070년 온산현(溫山縣)을 진으로 격하하였다. 1110년 백마채(白馬砦)를 폐지하였다. 1266년 치소를 삼대산(三臺山)으로 옮겼다.2.9. 중경부(重慶府)
파군(巴郡). 본래 명칭은 유주(渝州)였으나 1102년 공주(恭州)로 개칭되었으며 군사주였다. 고종의 잠번이 이곳에 있어서 고종이 즉위한 뒤 부로 승격되었다. 967년 만수현(萬壽縣)을 폐지하였다. 옹희(雍熙) 연간에 남평현(南平縣)을 폐지하였다. 1048년 검주(黔州)의 기미주였던 남주(南州)와 진주(溱州)가 소속되었다. 1053년 남주에 남천현(南川縣)을 설치하였다. 1074년 남천현(南川縣)을 남평군(南平軍) 관할로 두었다.- 기미주
- 진주(溱州)[18]
2.10. 운안군(雲安軍)
973년 기주(夔州) 운안현(雲安縣)에 군을 설치하였다. 1129년 군사를 파견하였다.- 현
- 운안현(雲安縣)[19]
- 감
- 운안감(雲安監)[20]
2.11. 양산군(梁山軍)
고량군(高梁郡). 969년 만주(萬州)의 석씨둔전무(石氏屯田務)에 양산군을 설치하고 양산현(梁山縣)을 관할에 두었다. 1072년 다시 충주 규계현을 양산군의 관할로 넣었으나 1086년 다시 만주 관할이 되었다.- 현
- 양산현(梁山縣)
2.12. 남평군(南平軍)
1075년 西番部 공주(恭州) 남천현(南川縣) 동불파(銅佛壩)에 군을 설치하였다.- 채
- 진계채(溱溪砦)
2.13. 대녕감(大寧監)
973년 기주(夔州) 대창현(大昌縣)의 염천소(鹽泉所)에 감을 설치하였다.- 현
- 대창현(大昌縣)[23]
2.14. 진주(珍州)
당나라 정관(唐貞) 연간에 설치되었으나 당나라 말에 상실한 지역이다. 1108년 다시 주가 설치되었다. 1121년 승주(承州)가 폐지되고 수양현이 진주의 관할이 되었다.- 현
- 악원현(樂源縣), 수양현(綏陽縣)[24]
- 채
- 준의채(遵義砦)[25]
2.15. 사주(思州)
1118년에 설치되어 무천현(務川縣), 공수현(邛水縣), 안이현(安夷縣)을 관할하였다. 이후 주와 무천현을 폐지하고 무천성(務川城)으로 명명했으며, 공수현과 안이현에 보(堡)를 설치하고 검주(黔州) 관할로 두었다. 1131년 다시 사주를 설치하였다.- 현
- 무천현(務川縣), 안이현(安夷縣), 공수현(邛水縣)[26]
2.16. 파주(播州)
악원군(樂源郡). 1108년 南平夷人 양문귀(楊文貴) 등이 땅을 바친 뒤 주를 설치하고 파천현(播川縣), 낭천현(琅川縣), 대수현(帶水縣)을 관할로 두었다. 1121년 폐지되어 남평군(南平軍)에 통폐합되었다. 1236년 백면보(白綿堡)에 다시 파주를 설치하고 3개의 현을 폐지했다. 1239년 다시 파주가 설치되고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하였다. 함순(咸淳) 연간 말엽에 진주(珍州)를 통폐합하였다.- 현
- 악원현(樂源縣)[27]
[1] 1063년 홍두현(洪杜縣), 양수현(洋水縣), 도유현(都濡縣), 신녕현(信寧縣)이 폐지되어 통폐합되었다. 홍두채(洪杜砦), 소동채(小洞砦), 계산채(界山砦), 난계채(難溪砦)가 있었다.[2] 백석채(白石砦), 문란채(門闌砦), 좌수채(佐水砦), 영안채(永安砦), 안락채(安樂砦), 쌍홍채(雙洪砦), 사영채(射營砦), 우수채(右水砦), 만총채(蠻塚砦), 욕수채(浴水砦), 잠평채(潛平砦), 녹각채(鹿角砦), 만취채(萬就砦), 육보채(六堡砦), 백수채(白水砦), 상계채(土溪砦), 소계채(小溪砦), 석주채(石柱砦), 고망채(高望砦), 목공채(木孔砦), 동류채(東流砦), 이창채(李昌砦), 복야채(僕射砦), 상양채(相陽砦), 소촌채(小邨砦), 석문채(石門砦), (茆田砦), 목책채(木柵砦), 호안채(虎眼砦)가 있었다.[3] 49개의 기미주가 있었으나 정강의 변 이후 56개로 늘어났다.[4] 가라채(歌羅砦), 영녕채(永寧砦), 세사채(細沙砦), 영변채(寧邊砦), 철목채(尖木砦), 이평채(夷平砦)가 있었다. 1073년 영흥채(永興砦)를 폐지하고 평이채(夷平砦)를 설치했다. 1080년 영녕채를 폐지하고 행랑채(行廊砦)와 안확채(安確砦)를 설치하였다.[5] 연천채(連天砦)가 있었다.[6] 1096년 설치되어 철전(鐵錢)의 주조를 담당했다.[7] 1072년 규계현(桂溪縣)을 점강현에 통폐합했다.[8] 남빈현과 풍도현은 정강의 변 이후 설치되었다.[9] 평운채(平雲砦)가 있었다.[10] 1044년 신포현(新浦縣)을 개강현에 통폐합했다.[11] 옛 명칭은 만세현(萬歲縣)이었다[12] 수나라 시기에는 영목현(永穆縣)이라는 이름이었다.[13] 정강의 변 이후 설치되었다.[14] 백마염장(白馬鹽塲)이 있었다.[15] 1119년 무룡현을 지현(枳縣)으로 고쳤다가 1131년 다시 무룡현이 되었다.[16] 석영진(石英鎭), 봉옥진(峰玉鎭), 남계진(藍溪鎭), 신흥진(新興鎭)이 있었다.[17] 967년 치소를 마종진(馬騣鎭)으로 옮겼다.[18] 영의현(榮懿縣)과 부환현(扶歡縣)을 관할하였으며 이후 남평군(南平軍) 관할이 되었다.[19] 사문채(思問砦), 한기채(捍技砦), 평남채(平南砦)와 옥정염장(玉井鹽塲), 단운염정(團雲鹽井)이 있었다.[20] 1071년 운안감의 호구를 안의현(安義縣)으로 옮겼다. 1073년 호를 운안현(雲安縣)으로 소속시켰고 다시 감을 설치하였다.[21] 1075년 융화현(隆化縣)에 통폐합되었다가 1078년 다시 설치되었다. 영의채(榮懿砦), 개변채(開邊砦), 통안채(通安砦), 안온채(安穩砦), 귀정채(歸正砦), 진천보(溱川堡)가 있었다.[22] 1075년 패주(涪州)에서 남평군 관할이 되었다. 칠도수채(七渡水砦)가 있었으나 1110년 폐지되었다.[23] 989년 기주에서 대녕감 관할이 되었다. 감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치소가 있었으나 1215년 수구감(水口監)으로 치소를 옮겼다.[24] 수양현은 본래 기미주인 이주(夷州) 소속이었으나 1109년 추장이 땅을 바치면서 승주(承州)를 설치했고 수양현을 비롯해 도상현(都上縣), 의천현(義泉縣), 영이현(寧夷縣), 양천현(洋川縣)을 관할하였다. 1121년 주와 도상현 등을 폐지했고 수양현을 진주 관할로 두었다.[25] 1108년 파주의 양문귀(楊文貴)가 땅을 바치면서 준의군(遵義軍)과 준의현(遵義縣)을 설치했으나 1121년 군과 현을 폐지하고 준의채를 명칭으로 삼고 진주 관할로 두었다.[26] 이 현들은 1122년 폐지되어 검주(黔州) 관할이 되었으나 1132년에 복구되었다.[27] 준의채(遵義砦)가 있었다. 1207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218년 다시 채로 격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