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10일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경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으로 재학하며 불교를 공부했다. 그러던 중 신문을 통해 조선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권청학과 함께 지방학림 학생들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3월 28일 심검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이를 알려 호응을 얻은 뒤, 의거일을 3월 30일로 약정하고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면서 준비를 갖췄다. 그는 깃대 및 종이로 만둔 작은 태극기 깃발을 휴대한 채 동화사를 출발하여, 대구부 덕산정 동화사 출장소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하루 동안 머물렀고, 다시 천으로 만든 태극기 깃발 1개를 만들어 3월 30일 오후 2시경 이것을 깃대에 매어 덕산정 시잔으로 가지고 갔다.
이후 동지들과 함께 깃발을 앞세워 3천여 군중 속을 천천히 걸으며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불복해 상고하면서, 상고취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모두 조선민족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함은 당연한 본무이다. 피고 등은 이번 조선독립 일을 듣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만세를 부른 것이니, 범죄를 구성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보안법에 위반하는 것으로 하여 징역 10개월에 처해짐은 불복한다.
그러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은 상고 기각 판결을 내렸고, 이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 구마자와대학에서 불교철학을 전공하였으며, 국내로 돌아온 뒤 평북 묘향산 보현사 조실 및 불교 전문학원 강사 등을 맡아 불교를 수강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8.15 광복 후 대구 동화사에 거주하다 1955년 6월 1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문옥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출처: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