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성만 |
출생 | 1962년 |
데뷔 | 1991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 1돌 기념 노동자 노래 공모에서 대상 수상 <불패의 전사들> |
웹사이트 | http://cafe.daum.net/sungmansong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민중가수, 작곡가. <불패의 전사들>,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가 대표작이다. 최근작 중에는 <아싸 가오리>2. 상세
개인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인터뷰를 하거나 본인 카페에 자기소개를 할 때도 어떤 사건이 있을 때 몇살이었는지, 가족관계가 어떤지 등을 구태여 밝히려 하지 않는다.서울 왕십리의 판자촌에서 신문배달과 우산팔이를 하며 자라던 와중 한울야학에 다녔다고 한다.[2] 1978년 16세의 나이로 처음 공장에 들어갔다. 이듬해 삼익악기 기숙사에서 지내며 피아노 조각반에 근무했다. 당시 친한 야학 선생님이 책 한 권과 김민기씨의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선물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갑작스레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는데,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의 집단 주거지인 성남 광주대단지였다. 그 뒤 성남 ‘새로나가구’에서 가구 목수 일을 하다 1982년 산업재해를 입었다. 산재를 입은 후 기계를 만지는 것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힘겹게 26만원의 보험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기타를 구입했다고 한다.
성남 모란시장 장돌뱅이 등으로 지내다 1984년 성남에 있던 노래패 ‘다영글’에서 활동하며 노동자 기타교실과 노래교실을 열었다. 교습실인 성남주민교회 지하실에서 기거하며 파업 농성장을 찾아다녔고, 그 와중에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다영글’ 내부에서 "고양된 사회운동 환경에 맞게 노동자 노래패를 비롯한 아마추어 노동자노래운동이 좀더 전문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당시로서는 유명한 팀이었던 '노래모임 새벽'[3]에서 직접 교육을 나온다. 김성만은 다영글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다영글 활동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로 끝났다면서도 당시 노찾사와 꽃다지 등 전문패만 가입하는 민족음악협의회에 노동자 노래패로써는 첨으로 가입한 노래패이기도 했다고 술회한다.
파업 농성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생활을 계속해오던 김성만은 1990년 삼영전자 파업을 마주친다. 당시 카세트테이프를 만드는 성남전자 파업 현장에 가서 노래를 가르쳐주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성남전자 자회사인 콘센트 제조회사 삼영전자도 파업을 벌였다. 2년 동안 삼영전자 창립식에 가서 노래를 부른 인연도 있고 해서 가봤는데, 삼영전자가 남자 300명, 여자 2700여 명이 있던 조합이라 연대를 안 받는다고 했단다. 그러나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가" 공연을 했고, 삼영전자 노동자이던 지금의 아내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삼영전자 파업은 김성만에게 여러모로 전환점에 해당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아내를 만났으며, 파업 당시 만들었던 <불패의 전사들>이라는 노래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 1돌 노동자 노래 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후 <불패의 전사들>은 김성만의 상징곡이 된다.
다영글 활동이 '실패'하면서 한동안 노래를 쉬었던 김성만은 자연스럽게 다시 투쟁 현장에 나오게 되었는데, 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비정규직 음반을 제작하게 되면서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만들게 된다. [4] 현재도 기존의 활동 방식을 유지하며 투쟁을 지속해 오고 있다.
3. 비판
사실 현재의 노동운동판에서 딱히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다. 주로 나오는 이야기는 인간성에 대한 부분인데, 음악성에 대한 비판도 적지는 않다. 다만 논란이 있으며- 굉장한 마이페이스.주로 김성만에 대해 불거지는 비판은 이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의 음악과 공연,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매우 높은 자부심과 만족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판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데, 언쟁이 빚어진 어떤 사건에서는 젊은 활동가에게 "좌파고 나발이고 모르겠고, 난 당신하고 동지 아니라고!"라며 화를 낸 뒤퇴갤퇴장하였다. [5] - 자기 복제와 표절이 심하다. <파견법 철폐가>와 <화물연대 진군가>는 완벽히 똑같고, 건설노조에 만들어준 <굴삭기 진군가>의 첫 부분은 동요 <악어떼>(...)와 흡사하다. 또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이 2013년 현재 6년째 투쟁중인데,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학습지 노동자의 노래>를 만들었다. 그런데 후렴구가 <민주노동당가>와 굉장히 비슷하다.[6]
- 소위 말하는 '덤핑' 논란. 민중가요를 부르는 가수들은 자칭타칭 '문화활동가'라고 일컬어지는데, 이 '문화활동'이란 것에 문화예술 노동자의 노동권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까지 논쟁과 개념 정립이 한창 진행중이므로 가수들은 '연대'와 '문화노동권' 사이에 갈등이나 충돌을 겪고 있는데,
- 기묘한(?) 기준을 두어 공연비를 받는다던지,[7]
- 아무 말 못하고 섭외하는 주최측에서 알아서 하기만을 목빼고 기다린다던지,
- "예산에 맞춰 알아서 주세요"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될 대로 되라주최측에 위임한다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아예 돈 되는 곳만 다닌다던지- 새로운 문화운동을 설파하고 천명하면서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행진곡 풍 투쟁가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본인 역시 그 영향권에서 딱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레게, 랩, 메탈 등을 접목한 시도들은 굉장히 조악했다.
- 최근곡 <아싸 가오리>의 경우 일부 활동가에게 격렬하게 비판받은 바 있다. 가오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아싸 가오리"라는 표현이 딱히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은 표현이다. 과거 표현과 관련하여 반여성적인 속설을 들은 바 있고, 집회 현장의 중장년 남성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키득대며 그 속설을 상기하는 모습에서 굉장한 불쾌감을 느낀 몇몇 활동가가 김성만에게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당시 변명과 함께 사과나 유감의 표명 없이 계속 노래를 불렀으며, 수 차례 문제제기를 한 이후에야 <아싸 가오리>의 공연을 자제하기로 하고 유감을 표명하였다.
하는 방식으로 혼돈 파괴 망가...ㄱ!을 겪는 실정이다. 그런데 김성만의 경우, 공연 수익과 사비 등을 털어 음향장비를 구입하는 데에 몰두하는데
그런데 진짜는 따로 있었으니...
3.1. 한국노총가 논쟁
민중가요판 예송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라는 단체의 기관지 <질라라비> 2012년 8월호에 김성만이 기고한 글이 논란의 시초였는데, 글의 제목은 <새 '한국노총가'가 불편하다>. 현행 한국노총가는 2006년 민중가요 작곡가 김호철이 만들고 노동가수 박준이 불렀다. 노래듣기 # 당시 김호철과 박준은 정중히 거절하였으나, 한국노총에서 삼고초려를 하며 "어머니(이소선 여사[8])의 뜻을 받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호소하자
이후 6년이 지나 뜬금없이 김성만의 글이 기고된다. 문제는 김성만이 자극적인 표현, 실명거론, "투쟁하지 않는 좌파가 불편하다"는 표현을 통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것으로 확대해석될 요지가 있는 발언 등 꽤나 강도 높은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4. 음반
- 다 못쓴 편지
- 늦은 시작
- 투.아.요.(투쟁하는 그대가 아름다워요)
- 비정규직 음반 - 어깨를 걸고 비정규직과 함께
- 비정규직 음반 - 어깨를 걸고2 노동자의 길을 택했다
- 삶과 사랑을 온몸으로 노래하라
- 1%의 사랑
[1] 해당 항목 및 본 항목 비판 부분 참고[2] 시대를 감안했을 때, 강학들이 자주 체포되었을 것이 당연하고 제대로 된 공부는 힘들었을 것이다.[3] 서울대 메아리, 노찾사보다 더 수준높게 취급되었다.[4] 사실 그는 불안정노동철폐연대의 이름을 비정규직철폐연대로 헷갈렸다고 한다. <불안정노동 철폐 연대가>가 아닌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가 된 이유.[5] 운동권들에게 "당신과 나는 동지가 아니다"라는 표현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아무리 의미를 가볍게 여겨도 쌍욕 수준으로 여길 수 있는 표현.[6] 김성만의 카페에 접속하거나 약간의 검색을 거치면 금방 들을 수 있다. 관심 있으면 들어보자.[7] 예를 들어 정규직이나 노조 중앙(금속 본조 등) 집회는 얼마 이상 받고, 비정규직 집회는 상황에 맞추어 받고, 어디는 받고, 어디는 포기하고 안받는 등.[8]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