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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1965)/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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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공금 횡령3. 레인보우합창단 관련 논란4. 일본군 위안부 '화대' 발언5. 호모포비아 발언 논란6. 사과문 논란
6.1. 관련 법원 판결
7. "조선 여성 절반은 성노리개" 발언 논란8. 중도입국 자녀 관련 허위주장9. 이태원 압사 사고 관련 발언 논란

1. 개요

김성회(1965)의 논란을 정리한 문서.

2. 공금 횡령

2016년 새로 SUV 차량을 구입하고 차량 할부금 자동이체 계좌를 본인이 대표로 재직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인 한국다문화센터 법인 계좌로 해놓았다. 2016년 1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법인 계좌의 437만원이 개인 차랑 할부금 갚는 데에 사용되었고 2019년 3월 업무상 횡령으로 기소되었다.

2019년 11월 1심 판결이 나왔고 법원은 "피고인은 다문화센터의 자금 관리 등을 총괄하는 이사로서 업무상 임무를 위배하여 다문화센터의 자금을 자신의 소유인 경우와 같이 처분하고자 했다. 불법 영득의 의사를 인정함에 지장이 없다" 고 판단,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김성회 측에선 "차량은 다문화센터 업무를 위해 사용했고, 횡령의 고의는 없었다"며 항소했지만, 2심은 1심 판결을 유지했다.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됐고, 2020년 11월 10일, '400만 원 벌금형'이 최종 확정됐다. # #

3. 레인보우합창단 관련 논란

한국다문화센터가 운영하는 레인보우합창단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했을 때 부모들에게 개회식 참석 대가라는 명목으로 1인당 30만 원을 걷고 올림픽 조직위에서 무료로 제공한 패딩을 회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2017년 1월에는 당시 본인이 지지하는 정치인이었던 반기문의 행사에 합창단을 동원한 게 밝혀졌다.

4. 일본군 위안부 '화대' 발언

페북으로부터 또 차단 당했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난 번, 차단에서 풀리고, 며칠 되자마자.. 기억도 없는 수년전의 댓글 논쟁(아마도 박근혜 정부 한일 위안부 합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상대 의 보상금 요구에, "그럼 정부가 나서서 밀린 화대라도 받아내란 말이냐?" 고 비난 한 댓글)을 가지고, 페북 규정위반이라며 차단조치를 취한 다고 알리더니, 한달간 차단조치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제 페북을 보며, 끊임없이 신고 하고.. 얼토당토 않은 사안을 가 지고 차단 시켜서 저의 언로를 막으려고 작정하고 있나 봅니다. 페북의 이런 조치들이 이번 정부 들어서서 너무 심하네요. 예전엔 전혀 경험하지 못하던 일들입니다.
어쨌든, 오늘에서야 풀렸고.. 그래서 가장 최근에 쓴..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59편, 반일민족주의와 바람직한 민족주의의 길(아일랜드 편)을 링크합니다.
페친분들.. 많이 읽어주세요.
2019년 9월 20일

김성회는 과거 페이스북으로부터 차단조치를 받았는데, 그 이유가 위안부 할머니의 보상요구를 두고 그럼 정부가 나서서 밀린 화대라도 받아내란 말이냐?라고 댓글을 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발언은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던 것을 두고 누리꾼과 논쟁을 벌이던 중 김성회가 페이스북에 남긴 댓글로 해석된다. 일본 정부를 향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를 두고 '밀린 화대'라며 모욕한 것이다.

화대는 성매수자가 성매매의 대가로 지불하는 돈을 뜻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성매매 여성에 비유한 것이다.

5. 호모포비아 발언 논란

한동안 페북에 글을 못썼습니다.

지난번 제 포스팅에 "레인보우 합창단은 동성애와 상관없다"며,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신병의 일종으로 생각한다"고 쓴 글이 성적 취향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 말이라며, 페북 포스팅을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규칙을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페북의 규칙이라며 막무가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에 그동안 올리지 못한 재미있는 다문화 이야기 연재를 다시 올립니다. 이번엔 임진왜란 때 가토의 우 선봉장으로 와서 휘하 장병을 이끌고 조선에 귀화한 뒤, 울산성 전투 등 크고작은 전투를 수없이 치르고.. 또 북방으로 가서 국경수비를 자청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공로를 세 운 일본인 출신 조선 장군 사야가 김충선을 소개합니다.
2019년 6월 28일.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여러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종교 다문화 비서관이라는 직책이 새로운 사회에 대해 좀더 유연적으로 대처하자는 의미를 포함하는 자리인만큼, 비서관의 성인식이 그러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그는 '혐오발언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며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성애는 흡연처럼 치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학계에서는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정신병이 아니라고 하고 있으며, 동성애 성향은 외부 요인으로 치료할 수 없고 이성애적인 행동을 권유 • 강요하는 치료법은 동성애 성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정신 질환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의학적인 근거가 부족하고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평이 많다.[1]

6. 사과문 논란

저에 대한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관에 임명되었다고 발표된 뒤, 일부 언론들이 집요하게 저를 파헤치고 있네요. 그동안 제가 내로남불 586세력과 종북주사파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해왔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몇가진 해명하거나 사과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페북 포스팅을 올림니다.

1.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밀린 화대" 발언
아마, 전에 쓴 글에서도 나타났듯이 박근혜 정부때 진행된 한일정부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하 면서, 포괄적 사과와 배상이 이뤄진 것을 트집잡고, 개인보상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누군가와 언쟁 하면서 댓글로 짤막하게 대꾸한 것이 문제가 된 듯 합니다.

이에 대해 페북에서 개인간 언쟁을 하다 일어난 일이지만, 지나친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깨끗이 사과드립니다.

2. 동성애가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한 발언
개인들의 다양한 성적 취향에 대해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선천적인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후천적인 버릇이나 습관을 자신의 본능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경우에도 동성애도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흡연자가 금연치료를 받듯이 일정한 치료에 의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온 발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개인의 성적취향에 대한 혐오발언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3. 레인보우합창단의 일부 학부모에 대한 민사소송 패소의 건 지난 18년 평창 올림픽 후 mbc의 편파 왜곡보도가 진행된 뒤 2건의 민사소송을 진행했습니다. 하나는 mbc의 이덕영 기자와 임영서 부장에 대한 소송이었고, 다른 하나는 mbc에 거짓제보를 한 3명의 학부모에 대한 소송이었습니다. 두 건의 소송은 1심에선 개별로 진행되었고, 2심에선 합산하여 진행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mbc에 대한 소송은 한국다문화센터가 부분승소하였고, 학부모들에 대한 소송은 거짓은 인정되나 학부모로서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취지로 기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mbc와의 소송은 감춰둔 채, 학부모와의 소송만을 떼어서 편집 보도하는 행태가 균형잡힌 언론의 태도인지에 대해 되묻고 싶습니다.

4. 페북 포스팅 숨김처리에 대해
페북 포스팅 숨김처리하거나 삭제처리 한 적 없습니다. 지난 게시물에 대해선 일정 시간이 지나면, 친구만 보기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개인 페이지에서 그럴 뿐, 관련 페북인 레인보우합창단 페이지 등은 그대로 둡니다.

마치, 제가 무슨 큰 잘못이나 하고 도망이라도 치는듯이, 일부 언론에서 "숨김처리" "삭제" 등의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합니다.

5. 결론
위에서 밝혔듯이 지난 과거에 있었던 위안부 문제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저의 지나친 표현에 대해 깨끗이 사과드립니다. 그 외, 균형감을 상실하고 신상털이식 보도를 하는 일부 언론에 대해선 깊은 유감을 표명합니다.
2022년 5월 11일에 올린 글

6.1. 관련 법원 판결

대법원 민사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김성회 전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관의 과거 다문화센터 대표 시절 논란을 보도하며 김 전 비서관의 얼굴을 방송에 내보낸 MBC 기자 등에 대해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판결했다.(대법원 2020다253423)[판결] 김성회 전 비서관 얼굴 그대로 송출했던 MBC… 대법원, "위법성 조각된다"

7. "조선 여성 절반은 성노리개" 발언 논란

여성 절반은 성적 쾌락의 대상이었다.
독백(부끄러운 고백)
1. 조선시대 태종 때 15% 이하였던 노비가 세종 때 노비 종모법으로 27~8%까지 늘고, 성리학적 신분제 사회가 확립된 성종조에는 42%까지 늘어났다는 것은 실증적인 역사다.
고로 조선조에 절반에 달하는 40~50%의 인구가 노비였고, 그중 노비 2 세를 낳을 수 있는 여성노비가 더 선호되었다.
그리고 노비들은 자유가 없었으며, 여성노비는 외거를 하더라도 양반 주인이 수청을 요구하면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는 것은 역사 학계에서는 일반화된 이론이다.
결국 여성인구의 절반이 언제든 주인인 양반들의 성적 쾌락의 대상이었 던 것이다. 그런 부끄런 역사를 반성하자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2. 중도입국자녀를 받아들인 이유는 재혼 결혼이주여성 중에서 본국에 있을 때, 전 남편과의 사이에 서 나은 아이를 어머니품으로 데려오자는 취지였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국 중도입국자녀의 대부분은 결혼이주여성이나 한국국적을 취득한 귀화 한국인들의 친인척들이었다.
그 비율이 92%까지 되었고, 정작 정확한 의미의 중도입국자녀는 4%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2015 년 계명대 김혜준 교수의 논문 중, 중도입국자녀에 대한 실태조사로 확인되었다.
3. 도대체 왜 대한민국의 지식인과 언론은 자기만의 도덕적 편견에 사로잡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가?
예전 2차대전 때 영국이 승리한다는 거짓 찬양만 하던 언론들 사이에서.. 한 언론이 "그렇지 않고, 고전증"이라는 진실을 보도한 덕택에 국민들의 질타가 쏟아지고 영국정부가 심기일전해서 이길 수 있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4. 불편한 진실을 얼굴 붉히면서라도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세상은 좀 더 진실해지고, 사람들 은 좀 더 자유로워지고, 함께 번영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목숨이 두려워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듯이..!![2]
두려운 것은 사회적, 도덕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언론들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안락함을 위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나의 비겁함이다.
2022년 5월 12일, 페이스북에 쓴 글 원본
조선시대 절반의 여성이 성노리개였다
-세종의 노비 종모법은 전체 인구 5~10%였던 노비(노예)를 전체 인구 40~50%에 달하게 해
-사노비던 관노비던 낮엔 허드렛일, 밤엔 성노리개였던 여성노비. 양민과 결혼해도 자식은 노예
-일본군 위안부에 분노한다면, 조선시대 노예제와 지금 북한에서의 반인권 참상에도 분노하자
1. 선택적인 분노와 정략적인 분노가 아니려면
세종 때 만들어진 노비 종모법은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 제도에 의해, 전체 인구 5~10%밖에 안되던 노비(노예)가 급속히 늘어나 전체 인구의 40~50%에 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인구 절반이 노비였던 것이다.
그중 가장 비참한 것이 여성 노비였다. 여성 노비들 중에는 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밤 시중도 드는, 한마디로 성노리개이면서 노예노동을 하는 관비도 많았고, 양반이 드나드는 일반 주막에서 허드렛일과 성노예를 겸하는 기생도 흔했다.
1890년대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했던 조선은 전체인구 40~50%가 노예였다. 프랑스 대혁명기 이전에 흑인 노예제도까지 폐지된 서구유럽과 비교해도, 뒤늦은 링컨의 노예해방과 비교해도 100년 가량 뒤늦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일반 여성 노비들의 경우도 결혼하기 전에는 낮에 집안 허드렛일을 하고, 밤에는 양반집 주인이나 그 아들의 성노리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결혼은 노비를 양산하기 위해 주인이 정해주는 대로, 다른 외거 노비나 일반 양민과 결혼해야만 했다.
외거 노비나 일반 양민과 결혼하면 좋지 않냐고? 좋은 것 같지만, 실제는 그녀가 낳은 자녀는 원래 주인의 노비가 되었다. 심지어, 원래 주인이 노비가 결혼해 살림하는 곳으로 찾아와 남편을 내쫓고 잠자리를 갖기 일쑤였다. 즉, 결혼하고서도 성노리개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와 같은 일 때문에 벌어진 사건 사고들이 수없이 많다. 또, 외지나 변방에 근무하는 군관에게도 허드렛일과 잠자리를 해주는 변방 관기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주변 마을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 중에서 선발되어 배속되었다. 선발된 관기 중에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여성 노비도 많았다.
심지어, 정약용 같이 중앙에서 힘 깨나 쓰던 관료가 귀양살이를 할 때는 관에서 귀양살이를 도우며 허드렛일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성 노비를 배속하기도 했다. 정약용 역시 그 여인 사이에서 애까지 낳았으나, 귀양살이가 풀려난 뒤그녀가 서울까지 찾아오고 매년 선물 꾸러미를 보냈음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고 싶은가? 위안부 제도를 운영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운가? 반인권적인 행태를 미워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분노의 절반만큼이라도,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는 반인권의 참상에도 분노하자. 조선시대 벌어진 노예제도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반성하고 분노하자. 그렇지 않다면 선택적인 분노가 정략적인 분노를 하는 것에 무엇이 다르겠는가!

2. 1890년대까지 피붙이를 노예로 삼던 조선사회
조선 노비는 로마 노예보다 훨씬 비참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조선시대 노비는 세종 때 만들어진 노비 종모법, 일천즉천 제도에 의해 전체 인구의 40~50%까지 늘어난다. 양반이 20% 정도, 중인과 상인이 5~10% 정도, 양민 20~30% 내외가 조선사회 인구 구성이었다.
이토록 양인이 허약하다 보니, 조선의 국방력이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 즉, 양반이나 노비는 군역에서 제외되니 결국 20~30%되는 양인이 조선 국방력을 떠받치는 셈이었다. 그나마 양인만으로 군역을 채우기 어렵다보니, 면천이라는 특혜로 노비들을 동원해 전쟁을 치러야 했다.
조선의 노비제도는 같은 종족을 대상으로 하는 노예제도로, 전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제도였다. 로마 등의 고대 국가에서도 타 종족을 정복한 뒤 그 종족을 노예로 부렸으면 부렸지, 자기 종족을 가축의 일종인 노예로 부리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에 조선의 노비는 로마 또는 다른 어떤 나라의 노예보다 훨씬 비천한 존재였다.
몽골의 경우 노예는 자신의 대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하면 얼마되지 않아 면천되어 일반인처럼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도 향·부곡·소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고려시대까지는 그러했다.
로마의 경우는 노예가 주인 자식들의 과외 선생 노릇도 했고 학교의 교사가 되기도 했다. 집정관이나 황제 밑에서 서무 회계를 담당하는 실무진들은 노예 출신들이 많았다. 의사 등의 전문직 대부분은 노예출신들이었다. 심지어 노예출신 중에서 나중에 황제가 된 인물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는 그 같은 신분상승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주 특이한 경우로 반기문 총장의 선조인 경우인데, 주인에 의해 면천이 되어 과거급제를 해서 벼슬길에 올랐으나 노비였던 과거가 드러나 탄핵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왕의 총애로 간신히 탄핵은 면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노비제도는 그 비율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을 뿐 아니라, 어떤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사방팔방 막혀 있어 참으로 비참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전쟁이 극성기를 이룰 때 로마 인구의 30%정도가 노예였다는 것과 비교를 해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런 비참한 노예제도를 1890년대까지 유지했던 것이 조선이었다. 이미 프랑스 대혁명기 이전에 흑인 노예제도까지 폐지된 서구유럽과 비교해도, 뒤늦은 링컨의 노예해방과 비교해도 100년 가까이 뒤늦은 것이었다.
인구의 4~50%가 노비이고, 놀고 먹는 양반을 제외하면 겨우 20% 남짓의 사람들에 의해 지탱하던 조선사회. 그런 사회에서 누가 국방력을 담당하고, 근대화를 이룩할 힘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거기서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가 있었겠는가?
국뽕에 취해서, 다른 나라에게 삿대질하기 이전에 우리 역사의 꼬라지를 제대로 알고 분노하더라도 해야 할 것이다.
2022년 3월 1일 제3의 길이라는 사이트에 올린 글 아카이브
“여성인구의 절반이 언제든 주인인 양반들의 성적 쾌락의 대상이었다”는 발언###으로 또 다시 논란이 되었다.

비판에 대응한답시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지만 대다수가 틀린 말로 제대로 된 역사 지식이라 할 수 없는 글이다. 김성회의 뉴라이트식 사고방식과 달리 주류 사학계는 저런 주장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제일 문제 되는 노비와 성노리개 부분은 애초에 관노비가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에 양반이라고 건들 수 없었고 사노비의 경우도 집도 따로 살림도 따로지만 주인에게 세금만 내는 형태가 많았으니 역사적으로 보나 윤리적으로 보나 왜곡된 발언이다. 김성회가 서양과 한국의 노예제를 단순 비교하며 100년 가까이 늦었다는데, 사회과학을 접하며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일반론과 특수성 이론도 구분 못하고 사회현상을 본 것이다. 학계의 정설은 사회구성의 발전사 설명에서 흔히 고대 노예제 중세 농노제 등을 들지만, 이런 설명만으로 전근대 신분제의 충분한 해명을 하기 어려우며, 고대 로마의 만민법과 노예제는 신분법제의 범주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양의 경우 국가형성기 이래 노비가 다수 존재했다고 해서 동양의 신분법제를 노비제라고 부를 수 없다고 본다. 동서양의 노비 노예 형태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한국사특강>, 개정신판,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출판부, 255~256p)

또한 조선의 신분제도도 갑오개혁 이전 18~19세기에 이미 붕괴되어 갔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한국사특강>, 269p)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16~17세기 양란을 거치며 양천제가 급속도로 무너졌고 조선 정부가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을 오히려 유리하다고 판단했기에 양인 인구 증가가 이뤄졌다고 서술하고 있다.(<다시 찾는 우리역사>, 제2전면개정판, 한영우, 경세원, 378p) 김성회가 제시한 정체불명의 1890년대까지 노비 비중이 40~50% 수치조차도 틀렸다.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전반 울산 지역의 노비호 비중은 14%~0.6%로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었다.(<한국사특강>, 269p) 노비의 호구수가 급속하게 감소했다는 말은 당연하게도 노비들이 대거 신분상승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자료들은 교과서에도 그대로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 한국사>, 교육부 검정, 금성출판사, 192p, "울산의 직역별 인구 구성비") 김성회의 글은 냉정하게 말해 한국사 교과서를 제대로 공부한 고등학생의 과제물보다 가치가 없다고 봐도 좋다.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대등 주요 명문대 교수들이 검토를 다 거친 팩트가 나와 있음에도, 자기들의 의도에 맞는 자료만 골라 왜곡해서 우리가 소수 목소리지만 불편한 진실이라고 떠드는 게 뉴라이트 학자들이기에 환빠의 자국혐오 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정약용에 관한 명예훼손은 정약용 종가에게 고소를 당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하다. 사비가 성적 접대로 쓰였던 일은 분명히 있으나[3]법적으로는 불법이었으며 17세기에도 솔거노비, 외거노비 비율은 35:65 정도였고 외거노비의 결혼율은 70프로를 넘기에 절반이 성노리개라는 수치 주장도 틀라다. 또한 솔거노비의 결혼율도 20% 정도는 되며 다른 이들도 사실혼 관계이지만 솔거노비 주거 환경으로 인해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한 경우도 있기에 저 비율에서 더 줄어들어야 한다. 이후 18세기가 되면 노비 숫자도 감소하고 외거노비 비율은 더욱 늘어나며 인구도 증가하기에 수치는 더욱 줄어든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양인이 20~30%였고 이들이 군역을 다 떠맡았다는 주장 역시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우선 조선 초기의 군역제도를 보면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들은 정군, 또는 정군을 보조하는 보인으로 배정되었고 공노비와 사노비를 포함해 나머지 신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잡색군이나 잡색군을 보조하는 보인으로 편성되었다. [4] [5] 그리고 당시 군역제도를 보면 잡색군과 정군 모두 기병의 경우 보인이 3명, 보병의 경우 2명 배정되는 형태였고 정군에 속하는 수군의 경우 3명, 갑사의 경우 4명이 배정되는 등의 형태였는데 잡색군은 거의 다 보병이고 수군이나 갑사 등은 아예 잡색군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군 한 명당 배정되는 보인의 수는 평균적으로 잡색군에 비해 많을 수 밖에 없었다.[6] 이런 군역제도의 구조로 보았을 때 만약 양인의 비율이 20~30%였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군의 수가 잡색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잡색군의 수는 정군의 2/3 수준이였다.[7] 정군 한 명당 배정되는 보인의 수가 잡색군에 비해 평균적으로 높았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이는 정군, 또는 정군을 보조하는 보인으로 편성된 양인의 수가 잡색군, 또는 잡색군을 보조하는 보인으로 편성된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양인이 전체 인구의 20~30%였고 이들이 군역을 다 떠맡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매우 다른 주장인 것이다. 또한 앞서 지적된 노비가 전체 인구의 40%라는 주장 역시 잡색군에 소속된 각종 중인 계층[8], 장인, 목자 등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며 양쪽에 모두 소속되지 않는 교생, 승려 등의 수도 무시할 수 없는 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과 멀다고 볼 수 있다.[9]

이는 2021년 3월 인터넷 웹진 '제3의길'에 쓴 조선시대 절반의 여성이 성노리개였다는 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엉뚱한 노예제나 북한 인권 문제를 빗댄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발언을 갈릴레오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10]라는 발언에 비유한 것 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억울하다며 다른 주제로 물타기를 하는 것도 문제인데 새로 가져온 주제의 주장을 받쳐주는 적절한 자료 근거없이 자신의 발언을 팩트라고 하고 있는 점이 논란을 가중하는 것이다.

8. 중도입국 자녀 관련 허위주장

펜앤드마이크TV의 외국인 노동자·이민 정책, 어떻게 해야하나
김성회: 정부에서 숨기고 있는데 이 경우가 비공식 조사에 의하면 4%만이 정상적인 중도입국자녀입니다.
김대호: 96%는 가짜?
김성회: 네. 친척을 자기 자식이라고 속이고 데리고 가고, 그 경우입니다.

중도입국 자녀는 한국인과 재혼한 외국인 배우자가 데리고 들어온 아이들을 말한다.

2021년 9월, 김성회는 보수 유튜브 방송인 펜앤드마이크TV 에 출연해 "정부에서 숨기고 있는데 비공식 조사에 의하면 4%만이 정상적인 중도입국자녀다", "나머지는 친척을 자기 자식이라고 속이고 데리고 가는 경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육부 관계자는 KBS에 김 비서관이 언급한 통계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고, 복수의 다문화 전문가들도 처음 들어보는 수치라고 밝혔다.

5월 12일 새벽, 김성회는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중도입국 자녀를 받아들인 이유는 재혼 결혼 이주 여성 중에서 본국에 있을 때,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나은 아이를 어머니품으로 데려오자는 취지였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국 중도입국 자녀의 대부분은 결혼 이주 여성이나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 한국인들의 친인척들이었다.
그 비율이 92%까지 되었고, 정작 정확한 의미의 중도입국 자녀는 4%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2015년 계명대 김혜순 교수의 논문 중, 중도입국 자녀에 대한 실태조사로 확인되었다.
<김성회 종교다문화비서관 SNS 게시글 중>

KBS 취재진이 김혜순 교수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김 교수는 "김성회 비서관이 (제 논문을) 인용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걸 쓴 적이 없다"고 답했다. 김 교수가 작성한 2015년 <지역 사회 연구와 이민 현상> 논문을 비롯해 여러 저작물도 추가로 확인해 봤지만 "'중도입국 자녀'가 대부분 정부를 속이고 들어오는 비정상적인 사례"라는 김성회의 주장과 관련한 내용은 없었다고 한다. #

9. 이태원 압사 사고 관련 발언 논란

김성회 전 대통령실 종교다문화비서관이 2022년 11월 3일 오후, SNS에 이태원 압사 사고에 대해 피해자 비난 글을 올려 발생한 논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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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도 무한책임이지만, 개인도 무한책임이다.

왜, 부모도 자기 자식이 이태원 가는 것을 막지 못해놓고.. 이태원 "골목길에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넣었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인지..

매번 무책임한 개인들의 모습, 그것을 당연한 생각인냥 부추키는 언론의 논조.. 이런 남탓과 무책임한 모습이 반복되는 한..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경찰의 직무유기 문제를 떠나서..

국가가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선택한 자유의지에 대해 개인도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선 안된다..!!

국가의 무한책임..
자유의지에 대한 개인의 무한책임..

두가지 모두가 강조되지 않고, 한 쪽에만 책임을 떠넘기는 절름발이 의식과 언론의 논조가 대형 참사를 반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투자해 놓고 손해보면 국가에게 빚 탕감해달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2022년 11월 3일 작성한 파일:18e6826a75bc457cbb791af7191cebf4.jpg #
이태원 압사 사고에 대해 "본인의 자유의지로 이태원에 간 피해자들의 책임이 있다"는 논조의 글을 게시하여 논란이 되었다. 해당 글을 읽어보면 실제 사실관계와는 다소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단 명동, 강남3구 등 다른 밀집지역에서는 사고가 나지 않았으며, 사고 당일에도 이태원에 직접 나가 있던 사람들 말고는 사고를 예측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나는 오늘 인파에 밀려 죽어도 좋다, 위험을 감수하겠다"라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피해자의 자유의지'를 논하는 것은 모순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자유의지는 '외출해서 주요 상권 지역에 가는 것'까지만인데 부모나 가족에게 "스스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의 자유를 미리 제한했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아니고 이것은 "학생은 카페 같은 곳에 가지 말고 집이나 학원에서 공부나 해라"라든지 "여자는 집에서 밥이랑 빨래나 해야지 뭘 출근을 하고 운전을 한다고 까불어"와 같은 식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

아울러 이태원에 있던 사람들이 경찰이나 구조대 투입을 방해한 일도 있긴 하지만 특정인을 짚어서 공무집행방해로 벌을 받게 하기는 힘들며, 개인의 안전을 온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대한민국이 법질서와 공권력이 무용한 사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언급되는 투자자 문제는 이번 사고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얘기이다. 패가망신한 개미 투자자나 이번 사고의 피해자들 모두 젊은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공통점만이 존재할 뿐이다.

무엇보다 용산구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보상금과 위로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은 여론이 형성되기도 전에 윤석열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한 일이고 이번 일에 보상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김성회는 대통령과 정부 대응을 찬양하면서도 이런 막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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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보면 전적으로 내가 옳고 내 논리에 공감 못하는 너희들은 종북 주사파이던지 아니면 주사파나 편향된 언론에 선동당한 인간이다, 종북 주사파라고 하니 아닌거같지만 내가 대학생때 학생운동도 해본 대단한 인간이다, 단어 선택에 따라 너희를 고소하겠으니 돈이 아까우면 말을 아껴라, 내가 아니꼬우면 주먹으로 덤벼라 정도의 대응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그가 올린 것만으로 발자취를 종합하면 구속되었던 젊은 시절부터 SNS에 맞짱 얘기를 하는 지금까지, 프로필 사진 취미마저도 선택 운운할만한 안전과는 거리가 멀고 위험 요소를 다분히 끼고 있다. 자기방어를 위해 뜬금 없는 과거 얘기를 하거나 폭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오히려 자기에게만 유하고 남에게는 엄격하다는 것을 반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논란이 되었지만 12월 11일, 또다시 “다 큰 자식들이 놀러가는 걸 부모도 못 말려놓고, 왜 정부에게 모든 책임 떠넘깁니까?!” “이태원 참사 유가족분들…자식들이 날 때부터 국가에 징병됐나요?” “언제부터 자유 대한민국 대통령이 ‘어버이 수령님’이 됐나요?” 등의 글을 올려 피해자와 유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https://v.daum.net/v/20221211194047616

[1] 1950년대부터 주로 이어졌던 혐오 치료도 영화 캐롤에 언급될 정도로 실패로 유명하다. 구토를 유도하는 약을 먹인 상태에서 동성애 요소를 접하게 해서 거부감을 유도한다는 것인데, 소용도 없고 오히려 진료실에 들어오는 간호사를 볼 때만 구토를 했다는 회고가 있을 정도의 흑역사. 전기 충격 요법 등도 마찬가지로 실패와 정신건강에 심한 후유증을 남겨 사장되었다.[2]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3] 관련 사례가 여럿 나오지만 이들의 비율이 어느정도 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4] http://db.history.go.kr/law/item/level.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searchTermImages=%EC%9E%A1%EC%83%89%EA%B5%B0&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arget=jlaw&startLevelIds=&startLawId=&searchType=r&startLevelId=&totalCount=8&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E%A1%EC%83%89%EA%B5%B0&searchKeywordConjunction=AND&levelId=jlawa_304r_0520_0010&position=3[5] 교생이나 승려 등은 정군에도 포함되지 않았고 잡색군에도 포함되지 않았다.[6] http://db.history.go.kr/law/item/level.do?levelId=jlawa_304r_0330_0010[7] http://sillok.history.go.kr/id/kka_12006013_003[8] 서리, 일수, 나장, 역리, 의생, 율생 등[9] 승려는 중종 때 수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발급된 도첩의 수가 6만이 넘었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4004_002 이런 기록을 보면 도첩을 발급받아 군역을 면제받은 승려의 수가 중종 때도 적지 않은 수준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교생의 경우 부, 목, 대도호부의 경우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이 정원으로 당시 조선의 부, 목, 대도호부, 도호부, 군, 현의 수를 봤을 때 조선 전체로 보면 15000명 정도가 정원이였다. 그리고 유생이 되면 군역이 면제된다는 점 때문에 유생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정원보다 실제 수가 많은게 일반적이였다.[10] 이미 많이 알려졌듯, 갈릴레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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