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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 출생 | 1895년 11월 25일 |
평안남도 강서군 | |
사망 | 1985년 10월 15일 (향년 89세) |
러시아 하바롭스크 | |
묘소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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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신흥무관학교 교관, 고려혁명군정의회 장교 등을 역임하며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김승빈은 1895년 11월 25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10년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부모를 도와 농사를 돕는 한편, 독학으로 한문과 일본어 등을 공부하였다. 1915년 서울의 구황실 근위대에 입대해 1918년 3월까지 근무했다.[출처]1919년 3월 3일 평안북도 사천리지역에서 3.1 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서 체포되었으나 주민들의 격렬한 시위운동의 덕분에 석방되었다. 그 해 4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 만주의 통화현으로 건너갔다. 1919년 4월부터 약 4개월간 통화현 쾌대모자에 있는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고 이후 약 1년 반동안 독립군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 계통의 인사들이 건설한 서간도 독립군기지에 세워진 학교로 수많은 독립군 인재를 양성한 학교였다.[출처2]
일제의 압박으로 인한 중국 지방정권의 종용으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6월 북간도 안도현 오지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6개월 동안 훈련을 마친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생대가 조직되었다. 이에 김승빈은 이청천 등과 함께 교생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 중반 북간도 일대에서 청산리전투가 일단락된뒤 교생대는 홍범도가 이끌던 부대와 광복단 등의 독립군들과 함께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때 김승빈은 소대장과 부대장으로 활동했다. 그가 북간도로 옮겨 한창 활동을 할 때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들이 만주에서 독립군과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독립군들은 어쩔 수 없이 소련 연해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에 김승빈도 1921년 1월 독립군들과 함께 이동해 사할린독립부대에 소속되었다.[출처2]
1921년 4월 이만에 모인 3,000여 명의 독립군들은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여 모든 역랑들을 집결시킨 상태에서 체계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김승빈도 같은 해 5월 홍범도 휘하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오하묵이 지휘하는 한인 독립보병여단에 소속되어 중견 간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출처]
1921년 5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단이 까란다쉬빌리 부대로 배속되어 제3연대 제3대대로 재조직되자 김승빈은 이 부대의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독립군 부대들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서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 산하 제3연대로 편제되자 김승빈도 이 부대의 장교로 합류하여 활약하였다. 그 해 8월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해산되고 한인들로 이루어진 독립군들이 1개 독립연대로 재편된 뒤에는 부연대장을 맡았으며, 이르쿠츠크에 세워진 사관학교의 교관으로도 활동하였다.[출처]
1922년 8월 김좌진, 박일리야 등과 함께 이만에서 150여 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북만주 및 시베리아 일대에서 일본군과 백군들을 상대로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다 1922년 12월 연해주에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자 그 후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한인학교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23년 봄부터 1929년 8월까지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전문학교와 원동종합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였다.[출처]
1937년 11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러시아와 한국의 국경지대인 핫산지역의 국경부대에서 장교로 근무하였다. 1938년 소련군과 일본군이 국경문제로 충돌하며 하산 호 전투가 발발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때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도 참가해 활약하였다.[출처]
1958년 소련군 대좌로 전역한 뒤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게 되었고, 소련 정부로부터 붉은 별 훈장, 일본 타승 훈장 등 모두 6차례의 훈장을 받았다. 전역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그는 1985년 10월 15일 하바롭스크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그는 하바로프스크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출처]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