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金재瀯 | |
이명 | 김재형(金梓瀅), 김호(金浩), 김성일(金聖逸, 聖一), 김해파(金海坡, 海波), 김국향(金國鄕), 김국경(金國卿) |
출생 | 1892년 7월 3일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 |
본적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
본관 | ○○ ○씨 (○○ ○氏) |
부모 | 부친 - 김동윤(金東潤) |
배우자 | 김우실(金宇實) |
경력 |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견습생 하동군청 고원 영어강습소 회원 상하이 청년동맹회 회원 마작구락부 경영 |
학력 | 구례공립보통학교 (졸업) 오성학교 (중퇴)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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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하동군 출신의 밀정이다.2. 생애
2.1. 어린 시절
1892년 7월 3일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서 김동윤(金東潤)의 차남으로 태어났고, 김우실(金宇實)과 결혼하였다. 7세 때부터 10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10년 전남 구례공립보통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하여 1911년 3월 졸업했다. 1912년 서울의 사립 오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다 1914년 질병으로 중퇴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견습생과 1918년 하동군청 고원으로 6개월씩 근무하였다.1921년 봄 상경하여 영어강습소를 몇 달 다니다 그만두고, 1924년 4월 경북 성주의 정세호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2.2. 밀정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순사부장 나까가와 및 총영사관 주재 조선총독부 통역관 오다 미츠와 접촉하여, 빚 갚을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밀정 계약을 맺었다. 같은 해 8월 상하이 청년동맹회에 가입했다.1925년 대대적인 반일배영의 기세로 5.30운동이 일어나자 6월 5일 윤자영·조덕진 등과 함께 청년동맹회 대표로 상하이 대학생연합회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배일 전단 수천 부를 건네받아 자동차로 프랑스조계 안팎에 뿌렸다. 같은 해 여름, 오다 미츠의 종용에 의해 의열단원 최림의 소개로 단장 김원봉과 회견하고 권유를 받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11월 오다 미츠에게 여비 100원을 받고 한커우로 가서 영국조계에 체류하며 의열단원들의 동향을 정탐하였다. 돈이 떨어지자 여관비를 빌려달라며 일본총영사관을 찾아가, 본인이 밀정임과 그간의 경위를 진술했다. 1931년 5월 수년간 총기·아편 밀수 및 금전편취 등의 행위로 그 지방의 안녕질서를 해쳤다는 이유로 한커우 일본총영사로부터 3년간 중국재류금지 처분을 받았다. 국내 송환 길에 상하이에서 도주했다가 1932년 9월 귀국하여, 이듬해 5월부터 경남 진주에서 마작구락부를 경영했다. 1934년 3월 폐업하고 중국 톈진으로 건너가 아편 밀매를 하다 또 실패하여 결국 6월에 다시 귀국하였다. 1935년 6월 성주를 거쳐 대구로 가서 배회하며 소일하다 부랑자로 검속되어 유치장에 갇혔다. 그때 같이 유치되어 알게 된 김덕원(金德元)에게 중국 항저우의 육군비행학교 입학을 주선하는 사기성 소개장을 써주었다. 김덕원은 이를 자랑하며 여러 사람에게 동행을 권유했는데, 그것이 경찰 정보망에 포착되어 지명 수배된 후, 댄스홀 설립을 위해 체재 중이던 중국 안둥현에서 1936년 5월 22일 일경에 붙잡혔다.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 받고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송국되었는데, 7월 27일 경성지법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독립운동자를 가장한 밀정으로 1924년부터 약 2년간 상하이 청년동맹회와 의열단의 동향을 일제에게 밀고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였고, 그 후로도 여러모로 부도덕한 행태를 보인 인물이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