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1년 ~ 1561년)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나가노가의 가주.2. 생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신으로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섬기며 각지에서 활약했다.[1] 전국 3대 기습 중 하나인 가와고에 성 전투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우에스기 세력은 호조 우지야스에게 점차 패배를 거듭하며 세를 잃어가고 있었다.1552년 무사시 국을 모두 잃고 노리마사의 거성인 히라이 성마저 호조의 위협에 노출되자 나리마사는 코즈케의 무사들과 같이 호조에게로 배반했다. 코즈케에서의 입지도 거의 없어진 노리마사는 북쪽 누마타 방면으로 탈출해 에치고를 향하게 된다. 우에스기의 충실한 가신이었던 나리마사의 이미지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과는 다르다. 나리마사가 정말로 노리마사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나리마사를 의지해 호조와 항전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멀리 있는 에치고까지 가는 결정을 하게 되었겠는가.
1560년 노리마사가 당시 에치고 나가오 가 당주 우에스기 겐신을 양자로 삼고 간토간레이직을 양도했다. 호조에게 맞서고 있던 사토미 요시타카 등의 요청을 받아, 겐신은 관동관령으로서 호조를 침공한다. 관동의 수많은 제장들이 겐신에게 합세하였고 나리마사는 가장 먼저 원정군에 내응하였다. 결국 오다와라 성을 떨어뜨리지 못해 관동원정은 실패했으나 나리마사 등의 제장은 형식상 우에스기 가를 섬기게 되었다. 겐신의 거성인 가스가야마 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실질적 지배권은 행사할 수 없었다.
1561년 다케다 신겐이 코즈케를 노리고 쳐들어왔으나 나리마사의 거센 저항에 뾰족한 성과는 내지 못했다. 신겐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고즈케를 병탄할 수 없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동년 1561년 11월(6월이라고도 한다) 병사했다. 적남인 나리모리가 후사를 이었다. 이후 신겐은 나리모리를 공격해 1566년 미노와 성을 함락시켰고 나리모리는 자결하였다. 유명한 검술가인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바로 이 나가노가의 가신이었다가 미노와성 함락후 신겐의 출사요청을 거부하고 검술수행을 떠나게 된다.
3. 대중 매체에서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
천하창세에서는 통솔 86, 지략 80, 정치 36, 교양 60. 나이가 많기 때문에 마지막 등장인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통솔이 98까지 올라가 있다. 그럼에도 원래 통솔이 99였던 겐신(이 시나리오에선 103)이나, 가이 슈고로 +4를 받는 신겐을 능가하진 못한다. 타치바나 도세츠와 함께 창금3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는 혼란과 철벽이 있다. 방어전을 위해서 태어난 남자라고 해도 무방한 능력치.
혁신에서는 통솔 97, 무용 80, 지략 91, 정치 40, 족경 S, 기마 B, 궁 A, 철포 D, 계략 A, 병기 D.
창조에서는 통솔 89, 무력 78, 지략 86, 정치 60. PK포함 극 초기 시나리오에서는 코즈케와 시나노 일부를 가지고 있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가신으로 나오고 대략 카와고에 합전 이후가 되면 미노와를 거점으로 독립 다이묘가 된다. 본인 능력치는 우수하나 가신들 능력치가 도저히 다른 강력 다이묘들에게 비벼볼 수준이 아니기에 제법 난이도가 상당하다. 그나마 켄신의 나가오(우에스기) 가문과 동맹이 걸려 있어 든든한 우방은 확보했지만 AI가 잡으면 거짐 다케다나 호죠에 먹히는 신세.
[1] 다만 나가노 가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전 가독인 우에스기 노리히로 치세에, 이웃한 안나카 가를 공격했다가 안나카 가문 등이 노리히로 대신 노리마사를 옹립하는 단초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노리히로가 노리마사에게 굴복하고 은거하기 전까지 나가노 가는 노리히로 편에 서서 노리마사와 싸웠다. 나가노 가의 계보는 뒤죽박죽이라 이 당시 나가노 가문의 대표와 나가노 나리마사의 관계는 불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