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태열(台烈) |
본관 | 영양 남씨[1] |
출생 | 1883년 8월 23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 (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2] | |
사망 | 1954년 12월 12일[3] |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신사리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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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남삼진은 1883년 8월 23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하현 마령(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에서 아버지 남만강(南萬康)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제선(金濟善)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9품 군위훈도(軍威訓導)를 지낸 남첨(南䄡)의 12대손이다.그는 1919년 3월 21일 김은수(金銀守), 천양쇠 등이 주도한 안동군 임동면 중평동 편향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해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일본 경찰이 이를 막으려 하자, 그는 군중과 함께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비품과 서류들을 파기하고 경찰을 폭행했다.
얼마 후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26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에 대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검사의 공소로 열린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끝에 8월 19일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로 형이 확정되어 1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아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신사리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1954년 12월 12일에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남삼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