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1 12:51:33

노먼 레슬리

성명 노먼 레슬리
Norman Leslie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554년 8월 29일
프랑스 왕국 캉브레 인근 렌티 요새 앞
아버지 제4대 로스 백작 조지 레슬리
어머니 마거릿 크라이튼
형제 윌리엄, 핼렌, 자넷, 로버트
배우자 이소벨 린제이
직위 파이프 장관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거친 구혼 초기엔 잉글랜드군과 맞섰지만, 개신교 설교자를 처단한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을 살해한 뒤 개신교 추총자들과 함께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점거하고 18개월간 농성했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프랑스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뒤 잉글랜드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등극하자 프랑스로 망명했고,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2. 생애

제4대 로스 백작 조지 레슬리와 제3대 크라이튼 경 윌리엄 크라이튼의 사생아이자 외동딸인 마거릿 크라이튼의 장남이다. 형제로 윌리엄, 핼렌, 자넷, 로버트가 있었다. 그러나 부모의 결혼은 1520년 11월 27일 무효로 선고되었고, 그는 형제와 함께 사생아로 전락했다. 1537년과 1539년 '주 재무장관 회계'에 기록된 그에게 제공된 복장에 대한 내용은 그가 당시 궁정에서 어떤 관직을 맡았음을 시사하지만,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41년 12월 7일, 당시 로스 가문의 세습 직위였던 파이프 지방 장관직이 그에게 종신 임명되었다.

1542년 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군이 솔웨이 모스 전투를 치를 때 참여했다가 스코틀랜드군이 참패하면서 생포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헨리 8세의 이익을 증진하도록 협조하겠다고 서약한 뒤 풀려났다. 1543년 12월 12일,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이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가 콜빌 가문의 본래 영지였던 웨미스 성을 몰수한 뒤 로스 가문에 하사했던 조치를 취소하고 제임스 콜빌 경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하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이때부터 데이비드 비튼을 적대시했다.

1544년 4월 17일,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에 보낸 정보원으로부터 노먼 레슬리 등이 파이프를 지나는 데이비드 비튼을 살해한 뒤 헨리 8세의 보호를 받기를 희망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먼 레슬리 등은 왕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을 굳건히 다지고 헨리 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메리 여왕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데이비드 비튼을 살해한다면 헨리 8세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만족스러운 답변을 해주지 않자, 그는 마음을 바꿔 데이비드 비튼을 지지하기로 했다. 데이비드 비튼이 퍼스의 교구장직을 놓고 제2대 루스벤 경 윌리엄 루스벤과 갈등을 벌였을 때, 그는 데이비드 비튼을 지지했다.

1545년 2월 12일 앤크럼 무어 전투에 참여해 스코틀랜드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1546년 3월 1일 데이비드 비튼의 명령으로 개신교 설교자 조지 위샤트를 화형에 처하자, 윌리엄 커콜디와 함께 개신교 신자들을 규합한 뒤 데이비드 비튼을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1546년 5월 29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데이비드 비튼이 머물던 세인트앤드루스 성을 기습해 단숨에 점거하고, 동료들이 추기경을 무참히 죽일 때 성을 지켰다. 그 후 그곳에서 18개월간 잉글랜드 당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항전했으며, 잉글랜드 추밀원은 반란군 지도자 노먼 레슬리와 윌리엄 커콜디에게 각각 100파운드를 연금으로 보냈다.

그러나 1547년 7월 28~30일 스코틀랜드를 돕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함락이 불가피해지자, 노먼 레슬리와 윌리엄 커콜디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로 끌려갔다가 탈출 후 덴마크로 피신했고, 나중엔 잉글랜드로 건너가 에드워드 6세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1553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즉위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로 망명한 뒤 프랑스 국왕 앙리 2세 휘하에 복무했다. 1554년 8월 14일 캉브레 인근 렌티 요새에서 벌어진 잉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그는 부하 30명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해 창이 부러질 때까지 적 기병 5명을 직접 사살했지만 끝내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이후 왕의 천막으로 옮겨진 뒤 15일 후인 8월 29일에 부상이 악화하여 사망했다. 앙리 2세는 그가 용맹하게 싸우다가 죽은 것에 깊은 감명을 받고, 스코틀랜드 섭정인 마리 드 기즈에게 지난 날 데이비드 비튼을 살해한 일로 재산이 몰수되었던 다른 인사들이 자기 영지를 되찾게 하라고 권고했다.

노먼 레슬리는 제5대 린제이 경 존 린제이의 딸 이소벨 린제이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아버지 조지 레슬리는 1558년 메리 여왕프랑수아 2세의 결혼식에 참석한 직후 사망했고, 로스 백작위와 영지는 노먼 레슬리의 이복형제인 앤드류 레슬리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