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러시아의 수학자이자 전(前) 카잔 대학교 총장.2. 생애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체프스키[1]는 1792년 12월 1일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하급 관리[2]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기울어 가족들과 함께 카잔으로 이주하였다.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카잔 대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여 졸업 후 시간강사직을 얻고 교수와 학장을 거쳐 카잔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1832년엔 나이 차이가 있는 영주의 딸과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은 요절했다. 총장직에서 파면된 이후 '범기하학 원론'을 편저했지만 스트레스와 노환으로 인해 시력은 실명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제자가 대필했다. 이후 대학 행사에 참여했지만 딱히 그가 한 것은 없고 그의 저서를 대학 측에 기증한 게 전부라고 한다. 1856년에 기아로 사망했다.
3. 업적
'평행선 공준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모순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창시했다. 사실 그의 논문은 발표되고 나서도 묻혀 있었는데, 3년 후 보여이 야노시가 같은 내용을 발표하면서 그의 업적도 드러났다. 그래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한 종류인 '쌍곡 기하학'은 이들의 이름을 따서 '보여이-로바체프스키 기하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수학자이자 저술가인 E.T 벨은 자신의 저서 '수학을 만든 사람들'에서 그를 '기하학의 코페르니쿠스라고 칭했다.
3.1. 학생과 시민을 위하는 총장
당시 기준으로 흔한 지잡대에 불과하던 카잔 대학을 러시아의 명문대[3][4]로 만든 일등 공신 중 한 명이다. 그는 교수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총장직을 역임할 때 비용을 대부분 대학교 시설 재정비와 기타 시설 및 장비 신설에 아끼지 않고 썼다. 행동력도 좋아서 도서관에 아무렇게나 꽂힌 책을 직접 분류하고 박물관에 있는 화석과 박제의 먼지를 털어 제자리에 전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그의 행동력과 혜안은 팬데믹에서도 빛을 발했는데, 러시아에서 콜레라가 유행하자 보균자들은 따로 격리하고 가급적 비감염자끼리 생활할 것을 강제하여 카잔 시민들의 비감염자 비율과 생존율을 높였다.
이외에 배우고 싶으나 돈이 없는 몇 학생들에게 지갑을 털어 책을 사주거나 교통비나 학비까지 지원해서 학교에 오게 해줬다는 등 훈훈한 미담도 있다.
4. 기타
차갑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초상화와는 달리 심각한 반골이자 열혈 타입의 전형이었다. 학창 시절엔 툭하면 '불온서적'을 들고 다녔고, 반항도 잦아서 영구 제적 후 영장을 받고 학계와 영영 이별할 뻔했으나 그를 가르쳐 본 교수들의 변호로 무사히 풀려났다.그 성격에 그 행동력이다보니 이런 일화도 존재한다. 평소보다 힘든 작업이 많아 웃옷을 다 벗고 일하던 로바체프스키에게 외국 학자가 안내를 부탁했다. 박물관의 전시품부터 잡상식에 대한것까지 모르는 게 없는 그를 조금 격식있는 청소부쯤으로 오해한 학자는 금화다발을 팁으로 챙겨줬지만 순간 빡친 로바체프스키는 자신을 무시하는 거라 여겼는지 욕을 속사포로 내뱉으며 그에게 금화들을 도로 던져버렸다. 오해가 풀린 건 그날 저녁 연회에서 서로를 만난 후였다고.
소행성 중 로바체프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
(참고문헌: E.T 벨 - 수학을 만든 사람들 II/원제 Men of Mathmatics 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