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배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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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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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 1993-94 · 1996-97 · 1997-98 |
해러것 타운 AFC | ||
Harrogate Town Association Football Club | ||
<colbgcolor=#000> 이름 | <colbgcolor=#fff,#191919> 데이비드 배티 David Batty | |
출생 | 1968년 12월 2일 ([age(1968-12-02)]세) | |
<colbgcolor=#fff,#191919>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 리즈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장 | 173cm | |
직업 | 축구 선수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행정가 | |
소속 | 선수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87~1993) 블랙번 로버스 FC (1993~1996)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6~1998)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8~2004) |
행정 | 해러것 타운 AFC (2015~ / 부회장) | |
국가대표 | 42경기 (잉글랜드 / 1991~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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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적의 은퇴한 축구선수.2. 경력
2.1. 클럽 경력
2.1.1. 리즈 유나이티드 FC 1기
리즈의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에서 태어난 데이비드 배티는 1987년 11월, 18세의 나이로 스윈던 타운과의 경기에서 리즈 유나이티드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빠르게 리즈의 전설적인 선수인 빌리 브렘너의 모습을 닮은 경쟁적인 미드필더로 명성을 얻었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배티는 감독 브렘너의 권유로 매일 아침 생달걀을 섞은 셰리를 마시며 체력을 키웠다. 배티는 1989-90 시즌에 리즈가 2부 리그에서 승격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고, 1991-92 시즌에 리즈가 1부 리그 챔피언십을 우승할 때는 게리 스피드, 게리 매칼리스터, 고든 스트라칸과 함께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배티는 상대 공격을 저지하는 데 탁월했으며, 볼을 차지한 후의 분배 능력도 뛰어나 많은 역습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기에서 유일하게 부족했던 부분은 득점력이었으며, 리즈 팬들은 배티가 상대 진영에서 공을 받을 때마다 "슈팅"을 외치곤 했다.1993년 10월, 리즈의 감독 하워드 윌킨슨은 팀을 재건하기 위해 자금을 필요로 했고, 케니 달글리시가 이끄는 블랙번 로버스의 275만 파운드 제안을 마지못해 수락했다. 윌킨슨은 8개월 후 칼튼 팔머를 26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2.1.2. 블랙번 로버스 FC
이 시점에서 블랙번은 앨런 시어러와 크리스 서튼과 같은 선수들로 구성된 프리미어 리그 신흥 강호였다.[1] 배티는 발 골절로 인해 블랙번이 1994-95 시즌에 우승한 대부분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그 시즌에 5경기만 출전했다. 그는 자신의 기여가 미미하다고 판단해 우승 메달을 거부했다. 그 다음 시즌 배티는 블랙번의 챔피언스 리그 캠페인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팀은 녹아웃 단계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배티와 그의 팀 동료 그레이엄 르 소가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 중 싸운 사건으로 기억된다.1996년 배티는 블랙번 로버스를 떠나기를 요청했고, 케빈 키건이 이끄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375만 파운드에 이적했다.
2.1.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배티가 미드필드에서의 저돌적인 플레이와 수비적인 커버를 제공하면서 뉴캐슬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도전할 수 있었다. 뉴캐슬은 두 시즌 연속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이어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키건 감독은 배티와 함께 훈련장에서 일하면서 그가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배티의 성실한 경기 태도, 태클, 그리고 팀을 위해 희생하는 플레이는 감독, 동료, 팬들 모두에게 존경받았다.그의 첫 번째 시즌 동안 키건이 떠나고 케니 달글리시가 감독으로 취임하여 또 다른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97-98 시즌은 실망스러운 시즌이었고, 뉴캐슬은 13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들은 1998년 FA컵 결승에 진출했으며, 배티는 결승전에 출전했다. 1998년 8월 새 감독 루드 굴리트가 팀을 재건하면서 배티는 1998년 12월 440만 파운드에 리즈 유나이티드로 돌아갔다.
2.1.4. 리즈 유나이티드 FC 2기
배티는 데이비드 오리어리 감독 하의 리즈로 돌아왔다. 오리어리는 배티가 그의 젊은 팀에 경험과 활력을 제공하길 원했다. 첫 경기에서 갈비뼈 부상을 입은 후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1998-99 시즌이 끝날 때까지 그는 리즈 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9-2000 시즌 초반 그는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했고, 갈비뼈 부상으로 인한 심장 문제로 복용한 약물의 부작용으로 회복이 길어졌다. 이로 인해 그는 UEFA 유로 2000을 놓쳤다.배티의 경험은 리즈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고 UEFA컵과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 오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2년 오리어리가 리즈에서 해임되면서 배티는 후임 감독들에게 외면받게 되었고, 2004년 5월 리즈에서 방출되면서 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2004년 1월 7일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리즈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데이비드 배티는 1991년 5월, 22세의 나이에 그레이엄 테일러 감독 아래 소련을 상대로 한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1998년 FIFA 월드컵 당시 배티는 글렌 호들 감독 아래 잉글랜드의 주전 선수였지만, 잉글랜드가 출전한 4경기에서 제한적인 출전을 했다. 그는 폴 인스와 함께 8강 진출을 좌절시킨 카를로스 로아에게 페널티킥을 막힌 것으로 주목받았다. 배티는 총 42번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으며, 마지막 경기는 1999년 폴란드와의 0-0 무승부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그는 84분에 퇴장을 당했다.3. 기록
3.1. 대회 기록
- 리즈 유나이티드 FC (1987~1993)
- 프리미어 리그: 1991-92
- EFL 챔피언십: 1989-90
- FA 커뮤니티 실드: 1992
3.2.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팀: 1993-94, 1996-97, 1997-98
- 리즈 유나이티드 FC 올해의 선수: 1990-91
-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올해의 선수: 1997-98
4. 여담
은퇴 후, 배티는 'The Match'에 출연하여 전직 프로 선수들이 유명인 팀과 맞붙는 자선 경기에 참여했다. 이 경기는 뉴캐슬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열렸다.배티의 은퇴 이후, 앨런 시어러와 제프 케나를 포함한 몇몇 전 동료들은 배티가 축구를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고, 단지 축구를 잘했기 때문에 경기를 했다고 언급했다. 시어러는 배티가 경기를 공부하거나 다른 경기를 보지 않았으며, 항상 훈련에 가장 늦게 도착하고 가장 먼저 떠났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티는 치열한 경쟁자였다. 2004년 은퇴 후, 배티는 주목받는 삶을 피하고 요크셔에서 살고 있으며, 인터뷰나 행사 참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않는 배티의 삶 때문에, 레스 퍼디난드는 배티가 다른 이름으로 슈퍼바이크 챔피언이 되었다거나 파일리에서 카라반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퍼디난드는 "현실은 조금 더 평범하다: 배티는 항상 계획했던 대로 가족과 함께 요크셔에서 조용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1] 구단의 자금 상황, 유럽에서의 명성은 차원이 다르지만, 현재의 맨체스터 시티 FC와 비슷한 위치였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