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도조 히데노리 (東條 英教) |
출생 | 1855년 12월 16일 |
도쿄도 신주쿠구 | |
사망 | 1913년 12월 16일 (향년 58세)[1] |
직업 | 군인 |
학력 | 육군대학교 1기생 |
최종 계급 | 중장 |
가족 | 아들 도조 히데키 (1884 ~ 1948) 증손녀 도조 유코 (1939 ~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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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육군의 중장이자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이다. 아들과는 반대로 군사적인 안목이 상당했지만 파벌 다툼과 정치질에 밀려 몰락했다. 이런 히데노리의 인생은 아들인 도조 히데키의 인생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2. 생애
모리오카 번사[2]의 아들로 지금의 신주쿠구 일대에서 태어났다. 모리오카 번은 보신 전쟁 당시 좌막파번으로 신정부에 대항했기에 지역 자체가 일종의 역적 취급을 받있고 히데노리 본인도 삿쵸 번벌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교도대에 입대해서 부사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했고 서남전쟁에서 활약을 인정받아 소위로 승진한다.1885년 육군대학교의 1기생으로 수석 졸업하고 독일에서 유학했다. 독일 유학 당시 유명한 에피소드로 당시 육군의 실세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같이 유학 중이던 절친 이구치 쇼고와 함께 찾아가 조슈 위주의 번벌 인사에 대해 항의한 사건이 있다. 부사관 출신 대위가 실세 중장에게 "인사 그런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라고 따진 셈이다. 이 일 이후로 히데노리와 야마가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군 생활도 어려워졌지만, 카와카미 소로쿠의 비호를 받아[3] 참모본부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좌관 시절에는 참모본부 제4부(전사편찬부) 부장까지 올라갔고 육군의 이론가로서 여러 저술을 남겼다. 한편 이 시절에도 청일전쟁 당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지휘를 비판하는 회고록을 쓰는 등 반 조슈벌 성향은 여전했다. 하지만 카와카미 소로쿠가 1899년에 죽고, 1901년에는 보병 제8여단장(소장 승진)으로 발령나면서 군 중앙에서는 밀려나게 된다.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으나 4개월만에 '실병지휘능력부족'이라는 이유[4]로 후방으로 보내졌고 다시는 전선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결국 1907년 중장으로 명예진급 후 예비역 편입. 퇴역 후에는 군사평론가로서 여러 책을 출판하며 생계를 꾸렸고 아들 도조 히데키가 육군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13년에 병사했다.
3. 기타
육군대학교를 1기생으로 수석 졸업한 수재이다.일본체육회체조연습소(현 일본체육대학)의 소장을 맡았다.
아들과 달리 굉장히 유능했으며 이 사람은 오히려 착검돌격을 반대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전술 연구의 선구자다. 반면 도조 히데키는 권모술수와 정치질로 독재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심각한 무능함으로 오판만 반복하다 비참하게 몰락하고 찌질거리다가 비웃음 끝에 처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한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