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16:48

돈목방교령

목린돈교령에서 넘어옴
1. 개요2. 배경3. 내용4. 반응와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6월 10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우방에 대해 배척, 악감을 도발하는 언론 및 단체 활동을 금지한 법안. 명목상 '우방'에 대한 배척 금지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내부의 항일 운동 단속을 위한 것이었다.

한자로 敦睦邦交令이라 쓰며 이웃나라와 가까이 지내는 령...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목린돈교령, 방교돈목령, 목린령이라고도 한다. 목린돈교령의 경우, 睦隣敦交令으로 쓰고 이 역시 이웃과 가까이 지내는 령으로 해석하면 된다.

2. 배경

1934년 만주 대흉작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날로 증강되는 소련의 극동 군사력에 불안을 품은 일본 군부는 중국의 화북 5개성을 침탈하여 이를 일본 제국을 위한 블록 경제권 및 소련에 맞서기 위한 완충지대, 배후지대로 삼아야 한다고 보고 1935년부터 화북분리공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5년 5월, 하북 사건이 일어나 친일 언론인들이 암살되고 항일의용군 손영근 부대와 일본군이 교전하는 일이 있자 일본군은 국민정부가 남의사를 이용하여 테러를 자행하고 불법적으로 토비를 지원했다고 주장하며 하매 협정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노골적인 위협을 가했다.

당시 군사위원장인 장제스는 사천성에서 대장정 중인 중국공산당을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난징의 국민정부는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국민정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일 유화론자였으며 하매 협정의 협상 당사자인 베이핑 군사위원회 분회 위원장 허잉친 역시 대일 유화론자였다. 국민정부 내부에서는 사천성에 있는 장제스를 불러와 일본에 항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셌지만 왕징웨이와 허잉친은 일본에 대한 군사적 저항은 국가의 멸망을 불러올 뿐이라고 주장하며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강경히 주장했다. 이런 시점에서 무모한 즉시항일주의는 국가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자충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급감한 중일 무역과 일본 제품 보이콧 운동이 국민정부의 계획적 반일운동이라 여기고 여기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며 위협하고 있었다. 목전에 닥친 일본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일본을 달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에 왕징웨이는 6월 10일, 문제의 돈교방목령 발표를 결정하게 된다.

3. 내용

우리나라가 현재 자립할 길은 정치를 밝게 하고, 문화를 촉진시켜 국력의 충실을 기해야 된다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신의를 지키고, 공동으로 국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웃과 화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중앙은 이미 누차 훈계를 거듭하여 우리 국민이 우방에 대해 화목함에 힘씀이 마땅하고 배척하거나 악감정을 도발하는 언론 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더욱이 이 목적을 위해 어떠한 단체를 조직하여 국교를 방해해서도 안된다. 이에 거듭 금령을 내려 이를 확실히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만약에 위배됨이 있으면 정한바 엄한 징계에 처하겠다. 이에 명령함.

일단은 일본을 특정하지 않고 우방에 대한 배척, 중상을 금지한다는 내용이지만 1935년 당시 중국에서 가장 거세게 불어닥치는 민중운동은 항일, 배일운동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이는 중국 내부의 항일운동을 단속하는 법안이었다. 이후 중국 내부에서는 항일이라는 글자가 사실상 금지어가 되어 항일 대신에 항x라는 복자(伏字)로 표기되었다.

4. 반응와 결과

돈교방목령 발표 이후, 일본은 크게 환영하였다. 6월 28일, 주중 일본대사 아리요시 아키라는 중국이 일본의 '공명정대한 요구'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기쁘기 한량없다면서 "이번 기회를 빌어 중국측은 마땅히 이번에 발포한 돈목방교령 등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배일 풍조를 더욱더 근절시켰으면 한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반면 중국 공산당, 반장 군벌, 시민사회는 격렬히 반발하며 이를 국민정부의 매국적인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중국공산당8.1 선언을 발표, 일치항일을 주장하는 한편 11월 13일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화북을 병탐한 것과 장제스의 화북, 중국을 공개적으로 팔아 넘긴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정부를 공격했고 11월 28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정부와 중국공농홍군 혁명군사위원회 명의로 <항일구국선언>을 발표, 항일 반장을 선동했다. 그리고 리쭝런, 천지탕의 서남정무위원회를 비롯한 반장군벌들도 이를 좋은 구실로 사용해 먹었으며 1936년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1930년대 중반의 중국의 항일운동에는 중국 공산당나 반장파의 입김이 작용한 것 자체는 분명했고 이에 국민정부는 학생운동 자체를 단순히 무모한 주장을 넘어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정부 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게 된다.

허나 돈목방교령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법안 하나로 항일감정이 가라앉을리는 없었고 일본은 일본대로 계속해서 화북을 침략하게 되면서 12.9 운동 등 거센 항일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장제스 없이 항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 공산당은 핍장항일, 옹장항일로 노선을 전환하였으며 1936년 서안 사건으로 2차 국공합작이 결성되었고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개막된다.

5. 참고문헌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고려대학교 역사학연구소.
  • 西安事變의 平和的 解決에 관한 一硏究, 신은주,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西安事變의 배경에 관한 연구, 한희정, 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