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1 00:17:11

동쏘아이 전투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1. 개요

동쏘아이 전투(Battle of Dong Xoai, [ruby(戰,ruby=Trận)][ruby(同,ruby=Đồng)][ruby(𣒱,ruby=Xoài)])는 1965년 6월 9일부터 13일까지 전개된 전투로 베트콩이 대승을 거둔 전투다. 이아드랑 전투 이전 베트콩이 빈지아 전투와 더불어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한 상징적인 전투다.

2. 배경

1965년 5월에 웨스트모얼랜드가 보낸 전신의 내용들은 더욱 단호하고 비관적이었다. 그는 상황이 굉장히 나쁘며 남베트남군이 절대로 현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베트콩이 나라를 반으로 나눌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이는 미군 지휘부가 오랫동안 우려해왔던 바이기는 하지만, 베트콩이 지역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엄청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워싱턴은 워스트모얼랜드가 보낸 전신들에 충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짙게 낀 먹구름처럼 일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경고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사이공이 가장 불안해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5월 말에 베트콩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했고, 남베트남군은 그곳으로 증강된 병력을 급파했다. 매복은 상대가 선호하는 전술이었다. 전투는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남베트남군 병력은 심한 상처를 입었고, 두 개 대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남베트남군의 지휘관들은 적과 대면하면서 불안을 드러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송정은 옮김, 최고의 인재들 - 왜 미국 최고의 브레인들이 베트남전이라는 최악의 오류를 범했는가, 글항아리, 2014, 938쪽.
1964년 빈지아 전투 이후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전역 곳곳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 1965년 2월 7일 베트콩은 중부 고원 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의 플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미군 헬기 7대를 파괴했고, 사흘 후인 2월 10일 베트콩이 퀴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미군 23명을 사살했다. 1965년 3월 30일 사이공에서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로 2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1], 1965년 5월 초 베트콩은 남베트남군 기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항상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베트콩은 1965년 5월부터 푹롱성에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5월 10일만 하더라도 스나이퍼 병력도 보유한 베트콩 한개 연대가 공격을 게시했고, 베트콩들은 푹롱 성에 있던 여러 개의 전략촌들을 파괴했다.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의 공세를 막기 위해 이른바 정예부대로 알려진 레인저 부대를 11일에 보냈는데, 오히려 레인저 부대의 반격을 격퇴했다. 베트남 측 자료에 따르면, 이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군 10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한다. 5월 15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 지역 부대를 격퇴시켰고, 차량 20대도 파괴했다. 이와 같이 남베트남군 지역 민병대와 레인저 대대를 격파하며 승승장구하던 베트콩은 5월 31일 남베트남군과의 1차전을 종료했고, 빈프억성에 있는 동쏘아이를 공격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3. 전개

빈지아에서의 대승 이후 남베트남군과 인민의 역량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즉 해방군은 계속하여 안라오(An Lao), 데오 농(Deo Nhong), 플레이쿠, 동쏘아이(Dong Xoai), 바지아(Ba Gia) 등지의 전투에서 수많은 괴뢰군 정규대대들을 전멸시켰다.[2]
베트남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산하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 지음, 김종욱 옮김, 베트남 공산당사 - 베트남 인민의 반제·반봉건 투쟁에서 해방 후 사회주의 건설까지, 소나무, 1989, 122쪽.
1965년 6월 9일 베트콩은 공격을 위한 최종 준비를 마쳤다. 베트콩이 최종적인 준비를 마치고 있는 동안, 특수부대 내에 있는 미군 병력은 비상태세에 들어갔고, 베트콩은 예정 공격시간 보다 70분 더 앞당겨 공격을 게시했다. 이것이 23시 30분의 일이었다. 선제공격이 있자 베트콩은 잠시 당황했었는데, 이미 전투 계획이 누설되었다고 판단한 베트콩의 정찰소대는 응사했고 결국 사령부는 예정시간 보다 빠른 진격명령을 내리게 됐다. 베트콩은 동쏘아이에 있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주둔하는 기지에 박격포 세례를 가했고, 포격 이후 베트콩 보병 부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 날인 10일 1시 30분 베트콩 부대는 다른 루투를 통해 남베트남군 특수부대 기지 중앙부에 침투했으며, 2시 40분 중앙을 뚫은 베트콩은 다수의 남베트남군을 사살 및 포로로 붙잡았다. 같은 시각 미군 헬기 두대가 베트콩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도 했지만, 이미 베트콩은 승기를 잡고 있었다. 6월 10일 4시 쯤 베트콩은 동쏘아이 지역을 점령했고, 그 후 베트콩 병력은 다른 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이동했다. 베트콩은 이날 새벽에 송배(Song Be) 다리를 파괴했다.

6월 10일 8시 미군 헬기들이 동쏘아이로 부터 4km 떨어진 투언로이(Thuan Loi) 농장지역에 착륙했다. 남베트남군 1개 대대도 배치했다. 사실 남베트남군 사령부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투언로이 인근의 상륙 지점이 베트남군이 즉시 발견해 교전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어 병력을 상륙시키기에 이상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이 이 지역에 착륙하여 매복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며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군 헬기가 착륙지점을 떠나자, 베트콩 병사들은 즉시 남베트남군의 주위를 돌려 기습공격했고, 15분 후 남베트남군 1개 대대의 주력이 완전히 붕괴됐다. 그날 점심 때는 베트콩이 남베트남군 본부 건물을 57mm 무반동포로 파괴했다. 이날 출격한 헬기들은 치열한 전투로 거의 모든 헬리콥터가 피해를 입었고, 헬기 한대는 파괴되었으며, 파괴된 헬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그날 15시 남베트남군은 추가 병력 및 레인저 부대를 이끌고 반격을 가했다. 레인저 부대는 동쏘아이 중앙부 쪽으로 진격했지만, 매복하고 있던 베트콩에게 공격받아 사실상 섬멸 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사살되었고 도주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겁에 질려 도주하지 못하고 지원부대가 오길 기다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구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 그날 지녁 남베트남군 대대 병력은 특수부대 기지 근처에 있는 베트콩 진지를 공격했고, 캠프 와 마을을 탈환하기도 했다. 베트콩이 빼앗긴 곳을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가했지만, 남베트남군 레인저 대대를 몰아내는 데에 실패했다.

베트콩은 동쏘아이 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최종공격을 감행했고, 6월 12일 매복을 통해 동쏘아이에서 투언로이 지역으로 이동하는 남베트남군 대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공수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공수부대의 경우 몇달 전 빈지아 전투에 투입되었던 병력이기도 했다. 즉, 이 공수부대가 앞서 언급한 베트콩의 매복 공격에 걸려 섬멸 당했다. 전투를 치른 다음날 공수부대의 병력은 470명에서 159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즉, 베트콩의 매복에 걸려 참패를 당한 것이다. 이랬다 보니 베트남 측 자료는 동쏘아이에서 투언로이 지역으로 이동하던 괴뢰군 부대를 거의 사살했다고 표현했다. 남베트남군 공수부대가 패배하자, 미국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베트콩이 동쏘아이를 공격할 능력과 힘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판단했다. 반면 동쏘아이 인근의 남베트남군의 병력은 심각한 수준으로 고갈된 상태였다. 즉, 베트콩의 공격을 격퇴할 전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전투는 6월 13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웨스트모어랜드는 베트콩에게 프억롱성을 장악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내주고 싶어 하지 않았고, 미군 전투병력을 투입하기로 6월 13일에 결정했다. 700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도착했지만, 5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가, 베트콩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여 영토를 점령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6월 18일에 투입한 병력을 부대 기지로 복귀시켰다.

4. 결과

전투는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동쏘아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최소 416명이 전사하고 174명이 부상당했으며, 233명이 실종됐다. 미군도 29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3명은 실종됐다. 베트남 측 자료에 따르면, 동쏘아이 전투가 한참이던 6월 9일부터 12일까지 3일 동안 남베트남군은 총 608명의 사상자를 냈다. 여기에는 미군 사상자 42명도 포함된다. 그러나 5월부터 7월까지 해당 지역에서의 베트콩의 전과는 베트남측 자료에 의거하면 이것보다 더 높아진다. 총 4,459명을 사살했고 미군 73명도 사살했다. 화기류 1,652정을 노획했으며, 390개의 야포 및 60대의 장갑차를 파괴했으며, 34대의 헬기를 격추했다. 남베트남군의 요충지 76곳을 파괴했고, 5만 6,000명의 인민을 해방시키는 한편 유격군 및 350명의 신규병력이 추가 증원되어 지역 유격전의 발판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동쏘아이 전투 3일간 나온 사상자는 미국 측이나 베트남 측이나 크게 수치 차이는 많이 나지 않는다.

베트콩 측 사상자는 우선 베트남 측 통계에 따르면, 전투 기간 3일 동안 134명의 베트콩이 전사했고, 29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반면에 미국 측 통계는 126명의 베트콩 시신이 재탈환한 부대 주둔지에서 발견됐고, 그 외에도 전장 곳곳에 수백 구의 시신이 더 흩어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동쏘아이 전투 시기 베트콩은 분명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전투가 벌어지기 3달 전 미국은 다낭에 정규 병력을 상륙시켰고 그 규모를 증강해 나갔다. 이후에도 베트콩은 여러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1965년 11월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미군과 맞붙은 전투는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많이 달랐다. 이 시점부터 베트남 전쟁의 전투 양상이 바뀌게 된다.

[1] 이 중 2명의 미국인이 죽었고, 19명의 베트남인이 죽었으며, 1명의 필리핀인이 죽었다. 나머지는 부상자였다.[2] 해당 전투들은 전부다 베트콩이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압승한 전투들이다. 미 지상군 개입 이전 베트콩들은 말 그대로 로빈후드처럼 싸웠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