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15 16:08:54

라마크리슈나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파일:라마크리슈나.jpg
출생1836년 2월 18일
사망1886년 8월 16일 (향년 50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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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4.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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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는 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성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경전에 기록된 진리의 육화임에 틀림없다.”
당대 라마크리슈나를 만난 철학자들의 평
신화가 되어버린 위대한 영혼
로망 롤랑, [라마크리슈나] 평전 中

인도의 종교가, 구루, 신비주의자.

19세기 인종차별주의가 횡횡하며 종교계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던 근대기 서구 종교계와 철학계에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진리'를 설파한 힌두교 종교철학자였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지만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은 힌두교의 근대화와 국제화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으며, 힌두교에 끼친 영향력은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와 8세기 인도 최고의 철학자 샹카라에도 비견될 정도이다.[1]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은 그의 사후 제자 비베카난다가 창설한 라마크리슈나 미션을 통해 서구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현대 서구권을 비롯한 해외의 주 힌두교 신자들은 라마크리슈나 미션이나 하레크리슈나 운동이 대부분이다.

2. 생애

"난 새로운 신앙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낡은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라마크리슈나는 콜카타 인근 가난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벵골 사투리를 쓰던 순박한 촌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몰랐으며 영어도 산스크리트어도 몰랐으며, 체계적으로 신학이나 철학을 배운 적도 없었다. 라마크리슈나 본인이 생전에 직접 글을 남기지 않고 제자들이 라마크리슈나의 사상을 편찬해서 반포한 것은 이런 사정이 있었다.

13세이던 어느 날 들판에서 검은 구름 속에서 불가사의한 빛을 보았는데, 그 순간 선 채로 사마디에 들어 이 세계 현상 전체가 신의 현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칼리 사원에서 지냈는데, 칼리 여신의 신상 앞에 앉아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또다시 신을 체험했다.

“이 방과 사원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시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대신 거기 끝없이 지즈냐나(지혜)의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어느 쪽으로 눈을 돌리든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를 향하여 파도쳐오는 저 즈냐나뿐이었다. 잠시 후, 그 바다의 파도들은 나에게 몰려와서 내 속으로 흡수되어버렸다. 너무나 강렬한 이 충격으로 하여 나는 의식을 잃고 주저앉아버렸다.”

이 경험을 한 뒤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달리 미친 사람과 흡사한 방식으로 행동했다. 지인들은 그를 고향으로 데려가서 결혼을 시켰는데 그때 그는 23살이었고 아내는 불과 6살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다시 칼리 사원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 몸과 마음이 경험한 영적인 세계의 4분의 1만 경험하더라도 보통 사람 같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 날들의 대부분이 영원한 어머니(깔리 여신)의 성스러운 비전에 대한 법열로 지나가 버렸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졸음조차도 내 눈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모든 감각이 나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리고 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영원한 어머니로부터 내 몸 쪽으로 마음이 거꾸로 돌아올 때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의 쿤달리니 각성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발에서 머리로 진동하는 감각과 함께 무엇인가가 상승했다. 이 감각이 대뇌에 이르기 전에는 아직 의식의 불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대뇌에 이르는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했다. 시각과 청각은 정지해버렸고, 말하는 것조차 전혀 불가능했다. ‘나’와 ‘너’의 구별이 사라져버렸다. 이 신비로운 영력이 여기까지, 또는 여기까지(자신의 가슴과 목을 가리키며) 차올라 올 때의 느낌은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영력이 이곳을 넘어가자(목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마음과 느낌은 더 이상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 일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미간의 반대쪽 여섯 번째 차크라를 가리키며) 마음이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신의 비전을 경험하면서 사마디에 들어갔다. 여기 신과 나 사이는 오직 엷은 막이 쳐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엷은 막을 통해서 그 신을 느낄 수 있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말년에 후두암을 앓다가 죽었다. 이때 한 학자가 그에게 왜 어머니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지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어머니를 생각할 때면 이 육체를 완전히 잊게 된다. 그래서 육체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목 어디엔가에 상처가 난, 인간 육체에 쌓인 무한한 영혼이다.”

어느 날, 그는 칼리 사원의 강으로 난 목욕통 돌계단에 서 있었다. 그때 두 개의 조각배가 강에서 물결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한쪽 배에 탄 사공이 다른 쪽 배에 탄 사공의 등을 노로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라마크리슈나는 등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을 듣고 그의 조카인 흐리다이가 달려가 보니 그의 등에는 심한 매 자국이 나 있었다고 한다.

“교리에 신경 쓰지 말라! 교의와 종파, 교회와 사원에 신경 쓰지 말라!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을 알고 있으니 그것은 모두 맞는 것이다.”

"힌두는 물을 빠니, 무슬림은 잘, 영국인들은 워터라고 한다. 이 3개의 말은 다르지만 물이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다. 같은 이치로 어떤 이는 하느님, 어떤 이는 알라, 어떤 이는 라마, 칼리, 브라마로 부를 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명상과 고행을 중시하는 열렬한 비슈누파 힌두교 신자였지만, 힌두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이슬람교에도 이해가 있었고, 그는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파고든 결과 어떤 종교이든 간에 종교의 진리는 각 종교의 구별을 초월한 곳에 귀결된다고 여겼다. 라마크리슈나는 모든 종교는 하나이며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해 신과 하나가 된다고 설파했다. 그는 시대, 지역, 민족에 따라 신이 다른 가르침을 펴며 그를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현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끝내 모든 세속적 생활을 이탈한 학문과 덕이 함께 높다고 하는 파라마한사의 존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에 통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샹카라의 베단타 사상에 입각하여 합리주의의 지적 태도로서가 아니라 내발적인 열정으로서 설법했기 때문에 많은 공명자를 얻기에 이르렀다.

라마크리슈나는 당대 인도 종교들 간의 극심한 종교 갈등 속에서 '공통의 진리'를 설법하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화해시키고자 하였다.

1886년 콜카타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힌두교 전통을 되살려 인도인의 자존감을 드높이고, 모든 종교의 조화를 설파하여 대동세계의 이상을 드높였다.

3. 사후

라마크리슈나의 제자 비베카난다는 1897년 라마크리슈나 미션(Ramakrishna Mission, RKM)을 창설하였고 현대까지도 힌두교 교파 중 하나로 남아있다. 라마크리슈나 미션은 그 범용성 덕분에 현대 서구권을 비롯한 해외에서 가장 성공적인 교포와 개종을 이끌어낸 힌두교 교파 중 하나로 꼽힌다.

사실 라마크리슈나는 학문에 그리 능하지 못했다는 문제점 때문에 교리가 그리 정교하지 못했는데, 캘커타 대학에서 수학한 수재였던 고학력자인 비베카난다가 기존에 축적한 서구적 교양과 힌두교 신앙을 접목시켜 라마크리슈나 미션의 교리를 완성하였다. 비베카난다는 1893년 미국 시카고 종교 대회에서 "모든 종교는 결국 하나의 진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메시지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1900년까지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서구인들에게 힌두교의 교리를 전파하였고, 비베카난다의 당당한 행보는 식민지배에서 고통받던 인도인들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인도 5파 철학의 권위자인 나라얀 샤스트리와 베단타와 니야야 철학의 권위자인 파드말로챤은 라마크리슈나를 신의 화신으로 인정했다.

4. 논란

전기 작가로서 유명했던 로맹 롤랑은 1920년대부터 인도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을 서구에 소개하려는 열의를 보였고, 그런 노력의 결과 “마하트마 간디”의 전기(1924년)가 저술되었고, 이어서 라마크리슈나의 전기(1929년)와 비베카난다의 전기(1930년)가 저술되었다.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는 베토벤을 모델로 삼은 음악가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었다고 하는데, 그 외에도 그는 “톨스토이”, “미켈란젤로”, “로베스 피에르”, “루소”, “핸델”과 같은 전기소설도 저술했다. 전기 작가에 의해서 창작되는 전기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을 참고로 할지라도, 실제로는 작가 자신의 상상으로 빚어내는 허구의 세계다. 다시 말해, 전기 작가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묘사하면서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간디의 경우를 제외하고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는 로맹 롤랑이 전기를 쓰기 오래 전에 이미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켈란젤로”나 “루소” 같은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망한지 30여 년이 지난 뒤에,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에 관련된 일화와 기사들,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출간한 자료들을 토대로 로맹 롤랑의 소설가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아름답고 감동적인 성자의 생애가 만들어진 것이다. 단 한 번도 직접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를 만나 본 적이 없는 작가는 작가적 상상력만으로도 그들의 생애를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의 전기를 읽는 독자는, 사실상 로맹 롤랑을 만나고 있는 것이지, 라마크리슈나나 비베카난다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998년에 나라싱하 P. 실Narasingha P. Sil이라는 인도계 미국 역사학자는 “다시 찾은 라마크리슈나:새로운 전기Ramakrishna Revisited: A New Biography”를 출간했다. 그는 그전 해에 “스와미 비베카난다:재평가Swami Vivekananda: A Reassessment”를 출간했었다. 혹시나 전기 작가인 로맹 롤랑의 두 전기물을 의식하고서 책 제목을 정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찌 되었든, 소설가가 아닌 역사학자의 저술이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라싱하 실의 저서는 로맹 롤랑의 저서와 매우 다르다.

그리고 2003년에 마니 상카르 무케르지Mani Shankar Mukherjee라는 인도인 작가가 힌디어로 “인간으로서의 승려:스와미 비베카난다의 알려지지 않은 생애The Monk as Man: The Unknown Life of Swami Vivekananda”를 출간했다. 이 책은 2011년에 영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인도인 작가가 묘사하는 비베카난다의 삶은 또 다른 작가 로맹 롤랑의 비베카난다와 너무나 다르다.

“구루들을 발가벗기기”라는 책에서는 현대 서양세계에, 특히 미국에 진출했던 인도 구루들 중에서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를 제일 먼저 다루고 있다. 사실상 비베카난다는 1893년에 미국에서 개최된 시카고 세계 박람회에서 처음으로 힌두 사상에 대해 연설했던 베단타 전승에 속한 스와미 교단의 성직자였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구루들을 발가벗기기”의 저자는 위에서 말한 나라싱하 P. 실의 저서를 전적으로 참고하면서 라마크리슈나와 비베카난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아래는 책의 내용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어렸을 때, 소년 라마크리슈나―나중에 라마크리슈나는 자신이 크리슈나와 라마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는 “여자애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다.”(실의 저서에서 인용) 실제로, 친지들은 그가 자신의 여성적인 육체와 정신에 어울릴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에게 여성용 의복과 금색 장식을 사주었다.

“현존하는 라마크리슈나의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그는 꽤 모양이 좋고 확실한, 거의 여성의 가슴에 가까운 가슴을 갖고 있었다......라마크리슈나는 현대의 의학적 심리학의 용어를 사용하면, ”여성 역할의 호모she male”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성 성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적인 정신과 여성의 가슴을 닮은 가슴을 갖고 있는 남성으로......(사라다난다)는 기록하기를, 겉으로 보기에 스승의 증언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매달 하복부 부위에서 피를 흘리곤 했고...출혈은 여성들의 생리처럼 삼 일 동안 계속되었다.”......한 번은 그는 허리춤 옷을 풀어놓은 상태로 낮잠을 자고 난 뒤 앉아 있었다. 그 때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처럼 앉아있다고 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어린 남자 제자 라칼 고쉬에게 젖을 먹이곤 했다....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남자 신도들과 제자들에게 성적인 태도를 내비쳤다......그는 종종 그들의 여자친구, 혹은 어머니처럼 행동했고, 항상 그들을 사랑스럽게 만지거나 애무했다.”(실의 저서에서 인용)

성인에게 젖을 물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분명히 그 성인을 아이로 보고 그렇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맥락에서 “부모”에게서 “아이”를 향한 성적 친화력이 있다면, 비록 18세의 고쉬의 경우처럼, 젖먹이는 아이가 성년에 이른 남자일지라도, 그런 경우는 분명히 심리학적으로 소아성애적인 요소라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성인 남자가(라마크리슈나의 경우에, “여성 역할의 호모”) 다른 성장한 남자를 아이처럼 행동하게 시키고 있다면,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머니로서 행동할 수 있고, 말 그대로 그 사람에게 젖을 먹인다면, 그 어떤 다른 맥락에서라도, 행동에 있어서 성도착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구루들을 발가벗기기”, 7쪽.)

역사학자 나라싱하 P. 실의 라마크리슈나 전기는 이렇게 로맹 롤랑의 전기와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아마존에 올라와 있는 몇 편의 리뷰성 댓글처럼, 실의 전기는 처음부터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서 쓰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불쾌한 기분까지 든다. 그러면, “구루들을 발가벗기기”의 저자가 인용하는 다른 글을 보자. 이 인용글 중 일부는 라마크리슈나의 제자들의 저서에 나오는 증언이다.

[게다가, 자신의 수제자 비베카난다를 처음으로 만난 후에, 그 젊은이를 다시 보고 싶은 “애끓는 욕구”의 고통 속에서 라마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북쪽 방향의 인적이 드문 장소로 뛰어가서, 거기서 목청껏 외쳤다. “오, 내 사랑, 나에게 다시 돌아오라! 나는 그대를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잠시 후, 나는 기분이 더 좋아졌다. 이런 상태는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곳에 오는 다른 소년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 중 몇 명에게 크게 끌렸지만, (비베카난다)에게 끌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979년에 “제자들Disciples”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책에서 인용)

계속해서 라마크리슈나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를 다양하게 묘사했는데, “커다란 눈의 잉어”, “매우 큰 항아리”, “구멍들이 있는 커다란 대나무”, “수컷 비둘기”와 같이 묘사했다.

후일, 너무 이르게 성불능이 된 기혼자였던 구루는 어느 날 젊은 비베카난다의 등에 올라탄 후에 사마디(즉, 보통은 육체에 대한 자각을 잃은 상태로 들어가는 신비적 황홀경)에 들었다.......물론, 기록되어 있는 라마크리슈나의 동성애적 행위들 중 어떤 것도 그가 실제로 동성애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그런 행위들은 그가 여성의 육체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견해와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는 여성의 몸을 “피, 살, 지방, 내장, 벌레, 대소변과 같은 것들”(“니킬라난다”의 저서 인용) 그 이상으로도 보지 않았다. 실제로, “이 신성한 어머니의 화신”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여자들이 끔찍하게도 무섭다....나는 그들을 나를 잡아먹으려는 암사자로 본다. 게다가, 나는 그들의 다리에서 커다란 구멍을 본다. 나는 그들 모두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으로 생각한다....여자가 내 몸을 만지면, 나는 병이 난다.....닿은 부위는 마치 뿔달린 메기(?)한테 물린 것 같이 아프다.”(니킬라난다의 저서에서 인용)

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여성을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라마크리슈나에게 부정적인 자극을 주어서, 그는 돌발적으로

“사원으로 뛰어가거나 사마디에 들어감으로써 도망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젊은 남자들을 향한 그의 애정은 무언중의 소아성도착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종종 늙어가는 성불능 남성들과 연관되는 것이다......라마크리슈나의 여성들에 대한 경멸은 근본적으로 자신감 없는 남성의 여성혐오주의적인 태도였고, 그는 여성에 대한 선천적인 두려움과 싸우기 위해서 자신을 여성으로 생각했다.”(실의 저서에서 인용)]

(“구루들을 발가벗기기”, 8, 9쪽)

나라싱하 실의 저서에 묘사된 라마크리슈나의 행동이나 경험들을 일반적인 맥락에서 오컬트 용어로 표현해서 설명하면, 지극히 아스트랄적인 경험들로서, 특히 마니뿌라 차크라의 과도한 자극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마니뿌라 차크라는 성 차크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성적 이미지와 표현들이 신비적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아스트랄 경험은 지성적 통찰을 핵심으로 하는 바람직한 명상에 대해서 가장 위험스럽고 삼가야 할 장애이기도 하다. 프로이트가 신비적인 종교적 경험을 억압된 성적 에너지의 왜곡된 표출이라고 분석한 것은 그런 면에서 매우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 그리고 개신교에서 유독 “아버지”를 강조하는 것은, 성적 이미지가 종교적 이미지와 뒤섞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티벳불교 탄트라나 힌두 탄트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성적인 이미지와 종교적 경험을 연계시켜 생각했는데, 그 만큼 인류의 종교적 경험은 성적 환상과 결합된 아스트랄 차원의 경험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구루들을 발가벗기기”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실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1885년 중반에 라마크리슈나는 인후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886년에 사망했고.....기대하듯이, 비베카난다는 남은 제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끝으로, 실은 “현대의 (신 혹은 신성한 어머니의) 화신”에 대해 간략하게 평가하면서 결론을 내린다. 기념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서 경이로운 라마크리슈나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간은 아이였고, 약간은 바보였다.”] (“구루들을 발가벗기기”, 11쪽.)

로맹 롤랑의 라마크리슈나와 나라싱하 실의 라마크리슈나 중 어느 쪽이 진짜 라마크리슈나에 가까울까? 그들 모두 라마크리슈나 사후에 남겨진 자료들과 증언들, 전설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라는 면에서 공통적일 것이다. 교훈적인 소설을 쓰기 좋아했던 로맹 롤랑의 라마크리슈나는 소설가의 작가적 상상력이 십분 발휘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고, 역사학자 나라싱하 실의 서술 역시 “역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해석된 과거”일 뿐이기 때문에, 그 역시 저자의 특정한 관점이 적용되어서 재해석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사망한 스승의 위상을 최대한 높이고 신격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과 가치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남겨진 제자들의 일반적인 습성이다.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스승을 신격화하는 제자들에게는 자신들을 드높이고자 하는 동기가 숨겨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옳고 위대하기 때문에, 그 스승에게 헌신하는 자신들 역시 옳고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신비적인 색채가 강한 종교적 전통과 맹목적인 신격화에 몰두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향한 비판적 관점에서, 최대한 그 전통에 흠을 낼 수 있는 자료들과 정보들을 취합해서 정반대의 해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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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가모니는 엄밀히 말하면 힌두교 이전 브라만교의 종교개혁가였다. 부파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발전하였고, 그런 힌두교에 대항하여 대승불교가 나타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