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라울 2세 드 브리엔 Raoul II de Brienne | |
출생 | 1315년 | |
프랑스 왕국 | ||
사망 | 1350년 11월 19일 (향년 35세) | |
프랑스 왕국 루브르 궁 | ||
아버지 | 라울 1세 드 브리엔 | |
어머니 | 멜로의 잔 | |
누이 | 잔 드 브리엔, 마리 드 브리엔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카트린 | |
직위 | 외와 긴 백작, 자르낙과 샤토뇌프 영주, 프랑스 무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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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무관장.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1차 캉 공방전에서 생포된 후 4년 만에 풀려난 뒤 장 2세의 의심을 받고 처형되었다.2. 생애
1315년경 외와 긴 백작이자 자르낙과 샤토뇌프 영주이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무관장이기도 했던 라울 1세 드 브리엔과 멜로 지역의 영주이자 무관장을 역임했던 드뢰 5세 드 멜로의 딸 잔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잔과 마리가 있었다. 1340년 사보이아 가문의 한 분파인 사보이아-보 가문의 일원인 루이 2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했다. 1345년 1월 19일 아버지가 필리프 6세의 아들인 필리프 도를레앙과 샤를 4세의 딸 블랑슈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죽어버린 뒤, 아버지의 직위를 그대로 계승했다.1346년, 라울은 프랑스 북쪽 변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 해 7월 25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의 캉에 도착한 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라울과 시의회에 항복을 권유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라울은 이를 거부하고 사절을 투옥했다. 그 후 라울은 캉 시를 구성하는 세 지역인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생장 섬 중 생장 섬을 포기하고 나머지 두 지역을 중점적으로 경비하려 했다. 그러나 생장 섬에 거주하는 부유한 상인 및 지주들이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구 시가지를 포기하고 생장 섬을 경비하기로 했다.
다음날 현장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구시가지가 방어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곳을 즉시 점령했다. 이후 바이외 주교 기욤 베르트랑의 지휘를 받는 군인 300명이 주둔하고 있는 마을 북쪽의 요새를 봉쇄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이 파견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전장을 쭉 살펴본 뒤 캉 시가지를 관통하는 오돈 강 북쪽 기슭에 있는 다리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려 했지만, 약탈을 열망하는 장궁병과 중장병들이 편성이 완료되기도 전에 다리를 향해 돌진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병사들이 돌격하자 당장 돌아오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했다.
잉글랜드군은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오돈 강을 건너 반대편 강둑을 따라 급조된 적 방어선을 공격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서둘러 이를 막으려 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는 적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러던 중 일부 잉글랜드군이 도시에 침투한 뒤 디리 수비군을 후방에서 공격하자, 프랑스 병사들은 공포에 질러 패주했다. 몇몇 프랑스 고위 장교들은 말을 타고 잉글랜드의 포위를 뚫고 성채로 도주했고, 다른 몇몇 장교들은 탑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버텼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모조리 학살되었고, 라울을 비롯한 소수의 부유한 전투원과 상인들은 생포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로 끌려가 4년간 옥고를 치르던 라울은 1350년 60,000 리브르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의 소유물인 긴 성을 잉글랜드에 양도하기로 했다. 긴 성은 잉글랜드가 1차 칼레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로, 칼레 주변의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에드워드 3세는 그곳을 확보한다면 칼레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라울 2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라울을 체포한 뒤 루브르 궁전 내 지하감옥에 가둔 후 11월 19일 재판도 치르지 않고 즉결 처형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발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가 처형된 이유가 대내외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장 2세의 첫 아내인 보헤미아의 보나가 라울과 간통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